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살면서 돌아보면....

| 조회수 : 13,293 | 추천수 : 81
작성일 : 2011-01-12 16:42:51
살면서 돌아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싶은 어리석고 아쉬웠던 일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K가 세상에 나올 때 분만실 앞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다.

그해 연말 H씨는 산달이라 처가에 가 있고 나는 그 날 심한 감기 몸살로 조퇴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
늦은 밤 난데없이 전화가 울렸다. “병원에 간다.”는 전갈에 택시타고 병원에 도착하니
H씨는 이미 분만실로 들어가 있고 그 밤을 분만실 앞 쪽 의자에 장모님과 앉아
이제나 저제나 분만실 문이 열릴 때 마다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었다.
신기하게도 오한을 동반하던 감기 몸살은 마음에서 사라지니 몸에서도 사라지더라.
그땐 요즘과 달리 산모와 가족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육중한 분만실 앞 의자와 인터폰만이 산모와 아이를 기다리는 가족들의 소통공간이었다.

그렇게 20여 시간을 분만실 앞을 지킨 다음 날 저녁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다.”며 “내일 다시 유도분만 해보자.”는 의사의 말과 함께 H씨는 입원실로 옮겨졌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진통에 나는 그저 H씨 손 잡아주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악~ 소리 나도록 내손을 부여잡는 H씨 손아귀 힘만큼 이를 앙다물고 같이 힘주는 것 말고
아무 할 게 없던 그날 새벽 1시쯤 예고 없이 어머니께서 오셨다.
“내일 다시 유도분만 할 거라” 하니 “그럼 내가 있을 테니 집에 들어가서 좀 자고 아침에 오라”는 말씀에
별 생각 없이 집에 들어가 잠을 잤고 K는 그 새벽에 세상에 나왔다.

돌아보면 참 철없었다.
아무리 H씨가 동의했다 해도 가란다고 간 나는 참 철없고 어리석고 준비 안 된 애비였다.
분만실에서 나오는 K를 처음 안아보지 못해 아쉽고 H씨에겐 지금도 앞으로도 미안할 일이다.

이후 술자리 같은데서 아이 낳는 얘기가 나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 나올 때까지 산모 옆을 지켜라”고 얘기한다.

그렇게 세상 나오며
엄마 좀 힘들게 하고 타이밍 못 맞춰 애비 낯을 붉히게 했던 녀석의 열일곱 번째 생일이 지났다.
방학이라 온 식구 늘어지게 늦잠자고 아침 겸 점심으로 차린 생일상.




냉이와 부추, 상추 샐러드 또는 무침
냉이는 살짝 데처 소금에 따로 무치고 간장과 들기름, 발사믹식초로 드레싱했다


지난 가을 고구마 캐며 말려 두었던 고구마줄기로 '고구마줄기들깨탕'



50cm가 채 안되던 녀석이 어느새 ‘주민등록증 하라’고 연락오고
이 추운 겨울 레깅스에 핫팬츠 달랑 입고 코트로 살짝 가리는 ‘하의 실종 패션’으로 외출을 하신다.
“옷 좀 입으라.”는 지청구엔 “뭐 어때, 안 추워” 하며
거울 앞에 서서 앞태보고 뒤태보고 요리조리 비춰보는 걸로 대답한다.

----------------------------------------------------------------------------------------

딸,
지났지만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해.
이제 고 3이라 한 열 달쯤 고생하겠다.
‘우리 딸 불쌍해서 어쩌지’ 하는 맘이 살짝 들기도 하는데 잘 해낼 거라 아빤 믿어. 우리 딸 힘내!

그리고 네가 지금 행복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렴.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엄마, 아빤 항상 네 편이 되어줄게.
결과를 가지고 우리한테 미안해 할 필요 없다는 말이야.
너의 삶이니 굳이 미안해해야 한다면 너에게 미안할 일일뿐이지.
잊지 마! 지금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할 수 있는 거야.

쫌 소박한 생일상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2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옥수수콩
    '11.1.12 4:49 PM

    엥??? 오후에님 남자다요??
    아니 난 왜 여태 몰랐을까.... 나님 바부...
    따님을 생각하는 아빠 마음이 물씬 느껴지는 글입니다. 괜스리 콧등이 시큰...
    수험생부모님, 따님...올 한해 수고해 주세요....꾸벅...

  • 2. 다이겨
    '11.1.12 5:26 PM

    이런게 행복이다~ 싶어지네요.
    지금껏 해왔던 사랑만큼 앞으로도 더 행복하세요.

  • 3. 열무김치
    '11.1.12 5:51 PM

    아~~ 따뜻한 아부지의 생일상을 받은 소녀는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애 낳은지 3주 됐는데, 말이죠 ...................
    진지하게요,.....
    들어 가란다고 들어가셔서 주무셨다 이 말씀이신가요, 지금 ?
    아...평생 트집 잡히시겠구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십대들은 왜 추위를 안 타는 건가요 ?

  • 4. 나타샤
    '11.1.12 6:11 PM

    어릴때부터 자상한 아빠를 가진 애들이 너무 부러웠었어요. 제 나름 통계를 내어보면 모두 성격도 좋고 자심감도 넘쳐나는 듯 보였거든요. 제 남편에게도 요구사항은 딱 하난데 쉽지가 않나봐요. 자상한 아빠는 타고나는 건가봐요.따님도 알고 있겠죠? 얼굴도 모르는 아짐이지만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 5. remy
    '11.1.12 6:19 PM

    설마.. 생일상을 직접..??
    부러우면 지는건데..으샷!!

  • 6. 변인주
    '11.1.12 8:04 PM

    고구마줄기들깨탕 하나래도 전 감지덕지....
    못먹어본지가 30년~ 이밤중에 침을 질질~

    따님은 전생에 나랄구했죠?
    진정 마지막 케ㅇㅣㅋ은 사오신거죠? 만드신거 아니죠???!!!!
    만드신거라면
    전 아짐 사표낼래요.~~~~

  • 7. 초록
    '11.1.12 8:07 PM

    따님은 오후에 님을 아빠로 선택되 세상에 나온건 만으로도 축복받은 분이네요.
    오늘도 어김없는 멋진 밥상!
    가슴아픈 바깥 세상이 님의 밥상을 보며 참 맛이 무언가 배울수만 있다면....

  • 8. pathos
    '11.1.12 8:11 PM

    가슴아픈 바깥 세상이 님의 밥상을 보며 참 맛이 무언가 배울수만 있다면.... 2222

    멋진 분이십니다. ^^

  • 9. 겨울
    '11.1.12 9:07 PM

    오후에님네 밥상은 딱 제 취향이라.. 언제 보아도... ^^
    야채로 만든 잡채랑, 고구마줄기~~ 너무 먹고 싶네요~
    케잌도 독특하구요?.. 초를 넣었다 뺀 자국도 보이고^^

    따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늘.. 물씬~ 느껴집니다. 이러한 글들 잘 모으셨다가 따님 결혼할떄 주셈~ ^^
    저는 아버지가 무척 엄하셨던 분이라.. 오후에님 같은 아빠... 많이 부럽네요......
    K에게 전해주세요. 생일축하하고,, 많이 부러워한다고!!! ^^

  • 10. crisp
    '11.1.12 9:21 PM

    혹시 글 쓰시는 분 아니세요?
    너무 글이 자연스럽고...감동적이예요..
    만약 요리까지 하셨다면.............주부 자격지심에 철푸덕 넘어지렵니다.

  • 11. 후라이주부
    '11.1.12 10:05 PM

    .....굳이 미안해해야 한다면 너에게 미안할 일일뿐이지....
    (공부 열심히 해라.. 는 말보다 강보다 천배는 더 센 듯... ㅎㅎㅎ)

    K양,
    얼굴도 모르는 태평양 건너 사는 아줌마가 생일축하 인사해요.
    앞으로의 10개월 진심으로 건투를 빌어요 !

    해피 벌쓰데이 투 유~~!

  • 12. 트리니티
    '11.1.12 10:10 PM

    오후에님 따님이 정말 부럽네요^^
    전 대신 자상한 아빠는 없지만 자상한 남푠이 있으니 다행..ㅎㅎ
    뭔가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

    k양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 13. 서현맘
    '11.1.12 10:46 PM

    오후에님 글 읽으니 저도 옛생각 나네요. 진짜 사연없는 임산부들 없겠지만 저도 그중 하나... 첫아이때 20시간이 넘게 산고에 시달리다 분만실에 혼자 걸어들어가서 아이를 낳았죠. 다들 그러고 혼자 낳는줄 알고 저도 그래서 남편 오지말라고 했는데 막상 들어가서 낳아놓고 보니, 예후가 좀 안좋아 고열에 시달리면서 수술받고 있는데 어찌나 서럽던지.... 너무 춥고 서럽고 아프고.. 그래서 막 펑펑 울었네요. 의사쌤은 아기 잘 낳고 왜그러냐고 떨지말라고 구박하는데.... 이 이상한 느낌을 어찌 남자한테 설명한다고 이해할라나... 그냥 울기만 했다는... 남편이랑 같이 안들어온걸 얼마나 후회했던지 몰라요. 요즘은 가족분만실이 잘 되어 있어서 둘째 낳을때는 가족분만실에서 다 같이 있었을 때는 그런 느낌이 하나도 안들고 그랬어요. 옛날 여자들은 병원분만실에서 어떻게 혼자 척척 잘 낳았는지 진짜 궁금하다능...

  • 14. spindle
    '11.1.13 1:38 AM

    오후에님 밥상 정말 좋아해요.
    한동안 안보이셔서 왜 안오시지..했네요^^
    우리집의 L군은 이틀전 입대를 했고
    K양과 같은 학년인 또다른 L군은 집에서 무위도식 중입니다..ㅎㅎ
    우리 아이들도 모두 기숙사에 있는지라 기숙사에 있는 K양 소식 늘 공감하며 읽고 있답니다.

    K양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15. 쎄뇨라팍
    '11.1.13 10:03 AM

    ^^

    가슴뭉클해져 로긴합니다
    오후에님의 사랑이 절절히 느껴지는 생일상과 글들!!!
    나도 이런 아빠가 있었으면..

  • 16. 오후에
    '11.1.13 11:43 AM

    옥수수콩님//ㅎㅎ 모를수도 있죠. 바보씩이나... 저는 콩님이 부럽습니다. 설거지 해주는 백수?두신 콩님이 한없이 부럽다는....
    다이겨님//네 감사합니다.
    열무김치님//들어가란다고 들어가는 죄를 지었지요. 들어가란다는 말을 '가지말고 있어, 어머님이 들어가세요'라고 알아들었어야 했는데.. 제가 그 때 철이없다보니 ㅋㅋ
    나타샤님//축하해주시니 저도 대신 감사드려요. 사실 저도 그다지 자상한 아빤 아닙니다. 수시로 버럭하는 걸요.
    remy님//ㅋㅋ 지셨네요.
    변인주님//아짐 사표 안내셔도 될 듯... 케잌 산겁니다.
    초록님, pathos님//가슴아픈 바깥 세상... 공감합니다.
    겨울님//케잌이 좀 독특하죠. 브라우니 조각을 쌓아 올린건데. 먹다 남기기 좋더군요. 한조각씩 집어먹다 남으면 그대로 냉장고로... 브라우니 집에서 만드시는 분들은 해보셔도 좋을 듯
    crisp님//직업을 물으신거라면 NO!, 잡채는 제가 한게 아니네요
    후라이주부님//태평양 건너서까지 축하해주시고 걱정해주시니 제가 다 감사... 해피 뉴이어
    트리니티님//자상한 남편이 있으시다니 축하.. ㅎㅎ 사실 전 자상하진 않아요
    서현맘님//그러게요 아마도 그땐 왜 그리 분만실을 수술실처럼 해놨었는지...
    spindle님//K도 집에만 오면 무위도식합니다. 설거지 한번을 안합니다. 겨우 제 밥그릇 개수대에 던져 넣는 정도....
    쎄뇨라팍님//잘지내셨어요.(마치 굉장히 잘알고 지내는 사이같은 인사? ㅋㅋ) 항상 좋게 봐주시는 댓글이 반가워 인사드립니다.

  • 17. 부리
    '11.1.13 1:13 PM

    늘 오후에님의 글은 따뜻한 느낌이 나서 좋아요..
    걍 편하게 읽어내려가다가도 가끔은 코끝이 찡해지기도 하는..
    전 따님이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당^^

  • 18. T
    '11.1.13 2:10 PM - 삭제된댓글

    저도 눈물 핑~~
    오후에님 글.. 항상 너무 좋아요. ^^
    K양 생일 축하합니다.

  • 19. Adams 네
    '11.1.14 12:09 AM

    저도.. 짐까지 여자분 이신줄 알았는데 ..
    와우.. 감동이네요~ 아버지께서 딸을 위해 ㅜㅜ

  • 20.
    '11.1.15 10:32 AM

    자상한아빠 넘 훌륭하세요^^
    담주에 딸램생일있어 케잌만들어야하는데 아이디어 훌륭하세요~~
    브라우니 밑에는 그냥케잌시트인가요?
    따라쟁이 해볼라구용~~^^

  • 21. 오후에
    '11.1.16 1:23 AM

    부리님//ㅎㅎ저도 K가 부럽습니당~~

    뽀롱이님//우리 모두 지금 행복해지는 걸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T님//축하해주셔서 감사

    Adams네님//애구 이런 반응엔 저도 이따금 난감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밥을 한게 감동스러울 수 있지만 남자(아버지)여서 감동할 이윤 없을 것 같아서요.

    솔님//아이디어는 제게 아닙니다. 저 케잌 산거거든요. 브라우니 밑에는 그냥 케잌시트더군요. 해보시고 후기 좀 올려주세요. 저도 따라해보게.... 브라우니 만드는 방법은 좀 자세히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41131 대둔산 단풍 보실래요? (feat.쎄미김장) 2 솔이엄마 2025.11.14 450 0
41130 입시생 부모님들 화이팅! 23 소년공원 2025.11.13 3,164 1
41129 189차 봉사후기 ) 2025년 10월 봉사 돈가스와 대패삼겹김.. 5 행복나눔미소 2025.11.05 5,428 8
41128 가을인사차 들렀어요.!! 34 챌시 2025.11.02 7,989 5
41127 요즘 중국 드라마에 빠졌어요. 24 김명진 2025.10.29 5,718 3
41126 맛있는 곶감이 되어라… 13 강아지똥 2025.10.27 5,959 4
41125 가을이 휘리릭 지나갈 것 같아요(feat. 스페인 여행) 12 juju 2025.10.26 4,951 5
41124 책 읽기와 게으른 자의 외식 14 르플로스 2025.10.26 4,808 4
41123 저도 소심하게 16 살구버찌 2025.10.24 6,457 7
41122 지난 추석. 7 진현 2025.10.22 5,691 7
41121 우엉요리 14 박다윤 2025.10.16 8,707 7
41120 세상 제일 쉬운 손님 초대음식은? 10 anabim 2025.10.12 12,171 6
41119 은하수 인생이야기 ㅡ 대학 입학하다 32 은하수 2025.10.12 5,852 11
41118 188차 봉사후기 ) 2025년 9월 봉사 새우구이와 새우튀김,.. 9 행복나눔미소 2025.10.10 7,485 8
41117 밤 밥 3 나이팅게일 2025.10.08 6,145 3
41116 저도 메리 추석입니다~ 2 andyqueen 2025.10.05 5,451 2
41115 메리 추석 ! 82님들 안전한 연휴 보내세요 9 챌시 2025.10.05 3,856 5
41114 아점으로 든든하게 감자오믈렛 먹어요 13 해리 2025.10.05 5,364 5
41113 은하수 인생이야기 ㅡ논술 첫수업 14 은하수 2025.10.05 3,300 3
41112 82님들 풍성하고 행복한 한가위 보내세요. 4 진현 2025.10.05 3,188 5
41111 키톡 글 올리는 날이 오다니! 7 웃음보 2025.10.04 3,654 5
41110 미리 해피 추석!(feat.바디실버님 녹두부침개) 20 솔이엄마 2025.09.29 8,390 5
41109 화과자를 만들어봤어요~ 15 화무 2025.09.29 5,220 3
41108 강원도여행 8 영도댁 2025.09.25 7,468 5
41107 은하수 인생이야기 ㅡ나의 대학입학기 18 은하수 2025.09.25 5,304 9
41106 마지막.. 16 수선화 2025.09.25 5,210 5
41105 수술을 곁들인 식단모음 7 ryumin 2025.09.23 6,305 5
41104 닭 요리 몇가지 17 수선화 2025.09.23 4,641 7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