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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가난한 밥상이라 쓰면 어찌들 읽으실까?

| 조회수 : 12,163 | 추천수 : 145
작성일 : 2010-06-25 12:05:53
“비지찌개 어떻게 한 거야?”
“뭘 어떻게 해, 김치 넣고 끓인 거지. 김칫국물 좀 넣고.”
“맛이 달라. 깊은 맛이 안나.”
“맛이 안 나긴 뭘 안나, 어제 먹고 오늘 또 먹으니 그렇지…….”

H씨와 전화로 한 얘기다.
입 짧은 것에 대한 약간의 타박이 있었다.
어제 퇴근해 보니 문제의 비지찌개 고스란히 남아있다.
싱거운데다 국물도 없고 빡빡하고 거칠기만 하다.
다시마 한 장 씻어 물과 함께 더 끓였다.



‘냄새는 제법 그럴 듯한데…….’ ‘간만 맞추면 되겠구먼.’
몇 해 묵은 조선간장 꺼내 반 술 정도 넣으니 간이 대충 맞는다.
파 좀 넣어 단 맛 보태면 맞춤이겠다 싶은데 파가 없다.
아쉬운 대로 양파라도 넣을까 하다 말았다. 살짝 심통이 나서.

H씨 아침에도 먹고 도시락 싸간다고 도토리묵 쑨단다.
묵 가루와 물 계량해 넣고 불에 올리기에 옆에서 숟가락 들고 서 있다가 휘휘 저어주며  
얘기하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아이로 이어졌다.

“어제 전화 왔는데 울더라고.”
“왜”
“자퇴하고 싶데, 힘들다고”
“그러라고 해.”
“걔가 그럴 애가 아니잖아, 저녁 때 좀 잤나봐 그게 성질나서 하는 소리지.”
“어쩌겠어! 체력이 안 되는 걸 잘 땐 자야지.”




젓는 숟가락이 묵직해지고 폭폭거리며 작은 오름 모양으로 터졌다 꺼졌다는 반복하기에
소금으로 간하고 “들기름 넣을까?” 물으니 “그냥 올리브요.” 하기에
올리브유 넣어 몇 번 저어주다 적당한 크기의 볼에 따라 식혔다.
밤새 식고 굳어 아침이면 탱글탱글하니 쌉싸름한 도토리 맛을 내리라.

묵도 있고 재탕한 비지찌개도 있는 오늘 아침은 여유롭다.
하품하며 냉장고 여니 오이지무침도 있다. 오이지무침 미리 꺼내 놨다.
H씨는 냉장고서 바로 나온 찬 음식 싫어한다. 그래도 뭐 한 가지 더 해야지 싶어 호박 꺼냈다.
찬밥과 비지찌개 데우는 동안 채 썬 호박 후라이팬에 다진 마늘 넣고 소금 간해서 한소끔 볶아 냈다.




도마에 밤새 굳은 도토리 묵 엎으니, 탱글탱글 하니 반들반들 윤기 흐르는 게 잘 하면 얼굴 비치겠다.
도토리 묵 네 쪽으로 뚝 잘라 그 중 한 쪽 만 양념장에 야채 찢어 넣고 무쳤다.  
나머지 묵은 주말에 먹고 그래도 남으면 말려야겠다.

“아침 괜찮았냐.” 대전에 내려 전화하니 “맛있었다.” 답하더라.
역시 젤 맛있는 밥은 해주는 밥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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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이에게 싸다준 도시락, 단호박 샐러드와 샌드위치
얼굴 좀 보러 갔더니 할 것 많다며 받아가며 정말 얼굴만 보여주고 가더라. ㅠ.ㅠ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미주
    '10.6.25 12:16 PM

    학기초에 저희 부부도 저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나네요.
    담담하게 읽히지만 마음이 심난스런 한때였지요.
    오후에님 글을 읽다보면 전 왜이렇게 안해본 요리가 많은지 ㅎㅎㅎㅎ
    두부에 이어 묵도 써보고싶은 아짐입니다.

  • 2. 꿀아가
    '10.6.25 12:20 PM

    어쩜 이리 남자분이 손끝도 야무지신지..볼때마다 감탄하고 놀라고 갑니다.

  • 3. 오후에
    '10.6.25 12:57 PM

    미주님//그러게요. 심란한 대화긴 한데 어쩔수 없다는 게 담담하게 만드나봐요.
    그저 먹는 거나 부지런히 만들어 주고 "잘한다." "하고 싶은대로 하렴" 말해주는 것 밖에 없어서...
    꿀아가님//손 끝 야무지지 않은데... 사실 덜렁마왕인데요

  • 4. 맑은샘
    '10.6.25 1:05 PM

    ㅎㅎ 얼굴 보러 가셨으니 얼굴만 보여주죠~ 자식 사랑은 해바라기... 참 다양한 요리 솜씨를 지니셨어요. 묵도, 두부도, 죄 사다 먹는 음식으로만 알고 있는데 82쿡은 너무 요리 신공이 뛰어나신 분들이 많아서 구경만 해도 숨이 차요.ㅋㅋ

  • 5. 영이
    '10.6.25 1:35 PM

    자녀에 대한 부모님의 한없는 사랑이 보여서.. 잠깐 뭉클..하기도...

    근데....
    아, 대체ㅔㅔㅔㅔ H님은 전생에 무슨 복을 지으신 거래요??

  • 6. 오후에
    '10.6.25 5:04 PM

    맑은샘님//그러게요 담엔 얼굴도 보고 얘기도 하고 이왕이면 도시락도 같이 먹으러 가야겠어요
    영이님//H씨 버전으로 답하면 "이게 전생의 나라를 구하거나 복지은 거면 대한민국 남자들 죄다 나라 구했남!" ㅎㅎ

  • 7. 완이
    '10.6.25 9:53 PM

    저희 남편에게 이런 맛깔 스런 한국 음식 전수를 시켜 주시면 감솨하겠슴다~
    언제 보내면 가능할까요? 꾸벅~

  • 8. 쎄뇨라팍
    '10.6.28 10:41 AM

    ^^

    잔잔한 수필 한 편 보고갑니다 ㅎㅎ
    제가 식탐이 좀 있는데 오후님의 일상 밥상을 보고
    반성하려 합니다
    커진 자식들은 정말 딱 얼굴만 간결한 목소리만 들려줍니다 ㅠㅠ
    혹..
    도토리까정 추수한 것은 아니시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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