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바빠서, 아파서, 정신없어서, 밥 같은 걸 해먹을 수 있는 정도가 못됐었습니다.
짜장면 시켜먹거나, 김밥 사다먹거나, 빵 한조각 먹거나...
그런데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다 싶어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나갔지요.

찬 보리차 꺼내려고 냉장고의 홈바만 열었을 뿐, 냉장문을 열어본 건 또 얼마만인지...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냉장고가 비워진 적도 참 드문 일일거에요.
달걀도 없고, 두부도 없고, 샐러드 한접시할 수 있을 정도의 채소도 없고,
다용도실로 나가보니 양파도 없네요.
장을 보긴 해야겠는데, 아직은 아프기도 하지만, 아픈 것보다는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장을 보러갈 마음이 들질 않아요.
그래서 김치냉장고랑 열어보니, 얼마전 김장김치의 거죽 푸른잎만 떼어내 찬물에 우려서 꼭 짜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우거지를 꺼내, 송송 썰어서 된장과 들기름 듬뿍 넣고,
파 마늘도 넣고 볶아서 점심상에 올렸습니다.
반찬 아무 것도 없이,
명이장아찌, 간편장아찌, 이 우거지볶음, 그리고 고기도 없어서 캔참치를 넣고 끓인 김치찌개,
이렇게만 먹었는데도 너무 오랜만의 집밥인지라 정말 달게 먹었습니다.

저녁 반찬 한다고, 냉동고에서 럭셔리 재료들을 꺼냈습니다.
몇마리 남은 새우와,
어머니 해삼탕 해드린다고 불려뒀던 해삼과,
어머니 죽 끓여드린다고 두마리씩 팩에 담아 냉동했던 전복과,
이 재료들을 몽땅 꺼내서 해동해서 불린 표고버섯 넣고 굴소스에 볶다가 녹말물을 넣었습니다.
밥을 비며먹을 수 있을 정도의 농도로 완성해서, 그냥 먹기도 하고, 밥에 비벼먹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이렇게 한두가지 반찬만으로 상을 차리지는 않았을텐데...
어제 병원엘 갔었는데...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일단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고,
또 MRI를 찍어 실금을 확인한다고 해도, 어차피 뾰족한 치료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충분히 쉬면서 저절로 붙기를 기다려야하는건데, 지금은 참을 수 있을만큼 아픈 지라 하던대로 주사와 약으로 치료하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다치지자 마자 병원으로 가서 주사 맞고,
그 다음날 다시 가서 엉덩이주사와 30분 정도 맞아야하는 정맥주사 맞은 것이 꽤 효과를 본 것 같아요.
허리를 펼 수도, 한걸음 떼어내기도 어려웠는데, 그래도 지금은 걸을 수도 있고, 허리를 펼수도 있으니까요.
의사 선생님께서도, 제가 진료실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들어섰더라면 바로 MRI를 찍자했을텐데,
그렇지 않은 걸로 봐서 안찍어도 될 것 같다고 하시는 거에요.
이만하기가 얼마나 다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