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 중후반, 데이트 하면서 먹는 음식중 돈까스는 거의 고급 음식에 속했었습니다.
허긴, 제 친구 중 하나는 그때도 남자친구와 곱창전골이니 징기스칸이니 하는 걸 먹으러 다녔지만, 그건 있는 집 애들 얘기고...
보통 아르바이트(과외 선생)를 해서 번 돈으로 데이트하는 경우 고작해야, 돈까스, 조금 더 쓰면 함박스텍...
옛날 먹던 돈까스는 지금의 도톰한 것이 아니라, 아주 얇고 아주 넓은 것,
곁들임으로는 채썬 양배추가 나오고, 밥은 다른 접시에 따로 얇게 펴져서 나오고, 그리고 멀건 크림스프가 나왔었어요.
지금 돈까스에 미소된장국이 나오는 것과는 딴판이었죠.
암튼...이 얇은 돈까스에 추억이 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인지, 3학년 때인지..기억은 잘 안나는데..와..벌써 30년도 더 전의 일이군요...
누구가 주선했는지, 왜 소개팅을 했는 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소개팅에서 서울대 상대 다니던 남학생 하나를 만났습니다.
당시 제 이상형은,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177㎝ 이상),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얼굴은 총명해보이고, 말이나 행동이 시원시원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은 사투리없는 서울말을 써야 하고, 피부에는 여드름이나 여드름 자국이 없어야 하고, 또 곱슬머리가 아니어야 하고..^^;;
그런데 워낙 소개팅이나 미팅 복(福)은 없는 지라...
키는 제 키 정도에다가, 남자니까 아마도 165~168㎝ 였을 듯,
안경을 쓰기는 썼는데...얼굴이 좀 멀멀하게 생긴 남학생 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애가 서울대 사회계열에는 어떻게 합격했을까 싶을 정도로 좀 어벙하고...
절대로 제 이상형이 아니었습니다만, 주선자의 체면 때문에 소개팅 후 애프터를 한번 했었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을 맞게 됐는데...어찌나 끈질기게 연락을 해대는 지....
당시, 제가 어찌나 속물이었는지..키 작은 남자, 얼굴 못생긴 남자랑은 차도 한잔 마시면 안된다고 버틸 때였는데,
방학이라 좀 심심하기도 하고 또 끈질기게 전화하는 것도 귀찮고 해서, 만나 주기로 했습니다.
종로 2가의 한 경양식 집에서 만난 시간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였어요.
뭘 먹겠냐고 해서, '돈까스'를 주문했습니다. 그쪽은 맥주를 한병 시키대요.
"그쪽은 안먹냐"고 하니까, 집에서 점심을 먹고나와서 배가 안고프다는 거에요.
서먹서먹, 어색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어느덧 주문한 돈까스가 나왔습니다.
한쪽 베어 물었는데...거의 토할뻔했어요. 완전 돼지비계인거에요.
지금도 돼지비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때는 비계란 비계는 모두 떼어놓고 먹을 때였어요.
한면이 비계이면 그 반대편은 비계가 아닐거다 싶어서,
접시를 돌려 반대편을 잘라봤는데..이게 웬 일입니까? 거기도 비계인거에요.
어째 이럴 수가 있나 싶어서 또 다른 면을 잘랐는데도 비계.
결국 세점 잘라먹고 포크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는데..얘기는 지금부터입니다.
그 남학생, "돈까스 안먹을거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 앞으로 접시를 가져가더니, 그 완전비계 까스를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먹는 거에요.
지금 생각해보니...학생들 돈 없는 거는 당연하고, 돈이 없어서 돈까스를 하나만 시킬 수도 있는 건데...
그때는 그게 왜 그리 창피하고 싫던지...
그날 이후....방학이 끝날 때까지...저는 집에 항상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초절정 복고풍의 넓고 얇은 돈까스를 하고 싶었는데...맘에 드는 고기를 구하지 못했었어요.
등심 덩어리를 사면서 얇고 넓게 포를 떠달라고 했는데..제가 원하는 사이즈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부위가 등심인만큼, 아주 맛있었습니다.
요즘은 돈까스용 돼지고기를 우유에 담근다고도 하고, 양파를 묻히기도 한다고 하는데...
제 지론은..'돈까스가 돈까스 다워야 돈까스지~~'입니다.
돼지고기의 냄새를 100% 잡겠다고 이 방법 저 방법 쓰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찬동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오늘 돈까스도 돼지고기에 소금 후추 생강가루 뿌려서 1시간 정도 재워뒀다가 밀가루 → 달걀물 → 빵가루 입혀서,
170℃에서 튀겼습니다.
소스는 시판 돈까스 소스 썼구요, 가니시는 돈까스의 고전 사우전 아일랜드 드레싱을 얹은 양배추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