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 가슴에 불을 당긴다!!', 동해 백주.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빼갈, 고량주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암튼 그 사나이 가슴에 불을 당긴다는 명카피로 인해서, 남학생들에게 인기있는 여학생을 백주라고 부르곤 했죠.
어제 jasmine님의 '도자기' 이야기에 댓글로 '동해 백주'를 언급했더니, 어느 틈에 그 걸 본 kimys,

"아냐"
"뭘 아냐, 당신 동해 백주였잖아!"
"아니라니까..."
동해 백주까지는 아니었지만, 문득 옛 생각이 나네요.
1975,6년도의 에피소드 한토막...
대학 1학년 겨울 방학, 제가 나온 E여고와 인접한, 큰 길 건너가면 있는 S고교, 반창회를 했습니다. 말이 반창회지, 미팅이죠. 방학 내내,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모처럼의 '껀수'라서 나름대로 칠보단장을 하고 반창회장으로 나섰습니다.
가보니 각각 20명 정도가 모였는데, 여학교 쪽은 19명이 몽땅 E여대 애들이었고 저희 학교는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허긴 저희 반에서 저랑 같은 대학을 간 친구들은 모두 공부벌레로 과 톱, 단과대 톱 하고 들어간 애들이니 미팅에 나올리가 만무죠.
주선한 친구가 얼핏 얘기하는 걸 들으니 상대 남학교에서도 20명중 19명은 S대고, 한 명만 저희 학교라고 하더군요.
순간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
'혹시 같은 학교 남학생이 걸린다면...'
'아무리, 내가 그렇게 박복할까'
'아냐, 그럴 지도 몰라. 그럼 어떡하지'
이러는 사이에 제비뽑기로 파트너가 정해졌는데, 그 예감이 어디 가겠습니까? 재수에 옴이라도 붙었는지, 바로 그 덜렁 한 명 있다는 우리 학교 남학생이 제 짝이 되었습니다.
그나마 키라도 좀 컸으면 좋았으련만 키는 또 왜 그리도 작은지...제가 전에 한번 쓴 적 있죠? 한때 키 작은 남자들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고,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요, kimys 키 그리 큰 편이 아니걸랑요!!
암튼 서로 다니는 학교를 파악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에 '으이구 지지리 복도 없지' '흐이구, 내 팔자야' 하는 표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으면서 시간만 때웠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골라입고 온 내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되던지...
맘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고 싶었으나 만만치 않은 회비를 냈으니 본전은 뽑아야겠기에 주는 거 먹고 마셔가며 시간을 때우는데... 속은 부글부글 끓고, 시간은 왜 이리 가질 않는 건지...
어찌어찌 하여 미팅은 끝나고, S대와 E대 애들은 애프터 날 잡느라고 난리인데, 저랑 제 짝, G라고 해두죠, 그 G는 미팅이 끝나서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 학교에서 만나도 모른 척 합시다" 이렇게 약조하고, 황망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당시 저와 제 친구들 사이에서 '캠퍼스 커플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는 풍조가 팽배해 있었거든요.
얼마후 2학년에 올라가면서, 그 일은 잊었어요.
그랬는데, 몇달 뒤, 학생회관의 학생식당엘 들어가는데 누군가 밥 먹다말고 젓가락을 휘둘러요.
그냥 지나치려는데 친구가, "너 보고 그러는 것 같다" 는 거에요.
누군지 몰라서 한참 빤히 보니까, 그 G 더군요.
"웬일이세요? 서로 모르는 척 하기로 한 것 같은데..."
이러고는 말았어요.
그랬는데 며칠 뒤 채플시간에 보니까, G가 제 근처에 앉아있는거에요.
저희 학교 채플은 같은 학년 전원이 대강당에서 봤는데 문과대, 상대, 이과대, 공과대, 이런 식으로 앉아요.출석이 곧 학점이므로, 꼭 지정석에 앉아야 했어요. 상대나 이과대 남학생들이 옆에 문과대 여학생이 앉게 되면 신나서 채플을 꼬박꼬박 들어가고, 채플시간에 '건수'를 올리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구 하구요.
전 몇번 정도 빼먹으면, 학점을 채울 수 있다는 사전 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들어갔다, 안들어갔다 하곤 했죠.
더 채플을 빼먹으면 리포트를 내야하거나 학점이 안나올 듯 하여 채플에 들어갔던건데...
"무슨 여학생이 이렇게 채플을 빼먹어요?"
"무슨 상관이에요?"
"부탁할 게 있으니까 그렇죠. ○○○개론, 선생님이 누구세요? ○○○ 아니죠? 그럼 리포트 쓴 것 좀 빌려줘요. 썼죠? 얼른 베끼고 줄테니까요"
이렇게 해서, 리포트를 빌려주게 됐어요. 리포트 돌려받던 날, 영화를 보여준다고 하더군요. 싫다고 괜찮다고. 몇번을 사양했는데 어찌나 질긴지...날 잡아서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그날 따라 덤벙거리다 안경을 안들고 나갔죠. 안경 없으면 영화관에서는 장님이나 마찬가진데... 영화를 못보겠다고 하니 자막을 읽어주겠다고 하더군요.
갔죠, 그 때 본 영화가 '미드나이트 카우보이'. 더스틴 호프만과, 안젤리나 졸리의 아버지인 존 보이트가 나오는 영화로, 현대인의 고독, 뭐 그런걸 주제로 다룬 영환데, 마약과 남창 얘기가 나와요. 그런 민감한 대사들이 나오는데, 뒷줄에 앉은 남자가 옆에 앉은 여자에게 자막을 읽어주니...앞줄 사람들에게 엄청 눈총을 받았습니다.
암튼 그 영화 한 편으로 셈은 다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채플때마다 나타나서 밥 먹으러 가자, 차 마시러 가자 하는데 성가셔 죽겠더라구요. 그래서 채플을 아예 안 들어갔어요.
그랬더니, 그담엔 강의실 밖에서 기다리더라구요.
그래서 찻집으로 데리고 가서 매몰차게 얘기했죠. "난 정말 너한테 관심없다" "귀찮아 죽겠다""너 이러지 말고 제발 공부 좀 해라, 너 본과에 못올라간다"
그후 눈에 띄지 않아 잊어버렸는데, G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저랑도 친구인 L이 하루는,
"너 G 사귀었냐?"
"사귀긴 뭘 사귀냐?"
"근데 이건 뭐냐"
하며 편지를 한장 쥐어주더군요.
'반창회날부터 너한테 끌렸다. 그런데 사귀자고 했다가 채이면 창피할 것 같아서 뻣댔거다. 그런데 학교에서 멀리서 널 보고 무지 흔들렸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학생식당에서 젓가락을 휘둘렀었다. 채플도 일부러 너땜에 자리까지 바꾸고 열심히 들어갔다. 니 얘기 우리 집에 가서 했다. 그래서 내 여동생이 채플시간에 와서 니 얼굴까지 보고 갔다. 우리 부모도 너 다 안다. 그런데 니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 니 마음 잘 알았다, 니가 싫다는데. 본과가 올라가면 학교 대문이 다르니, 니 얼굴 마주치지 않겠지. 잘 살아라'
뭐 이런 내용이었죠.
나중에 스치는 소문으로 듣자니, 아버지가 운영하던 의원을 물려받아, 잘 살고있다고 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