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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짭짤 고소한 김혜경의 사는 이야기, 요리이야기.

내 인생의 음식- 무탕

| 조회수 : 10,883 | 추천수 : 72
작성일 : 2006-10-01 09:07:34
그 어느 주제보다, 응모작의 양이나 질에서 월등히 뛰어난 9월의 이벤트 주제..내가 사랑하는 살림살이...
저를 비롯한 관리자들이 예심을 보고 있는데...이거 참 큰일입니다요, 우열을 가리기가 너무 힘이 들어요...ㅠㅠ

추억을 간직한다는 일은..그리고 그 추억을 살그머니 꺼내서 되새겨본다는 일은...
때로는 아프기도 하지만, 참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9월의 주제가 살림에 대한 것이었다면..10월은 음식에 관한 것이 어떨까 싶어요..

우선 제가 예전에 쓴 글을 하나 풀어놓을게요.
저의 첫 책, '일하면서 밥해먹기'의 감자탕 부분에도 같은 주제의 글이 있습니다. 그만큼...잊지못한다는 뜻이겠죠?

지난 2003년 6월 주간조선에 실렸던 글입니다. 저 글을 써놓고도 아직 무탕을 하지 않았다는..


         내 인생의 음식- 무탕

                                                                            김혜경 (일하면서 밥해먹기 저자)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당시 육군 대령이던 아버지가 연대장으로 발령받아 경기도 북부로 떠나셨다.
지금은 갈비촌으로 이름이 나 번화해졌지만 당시는 도로 포장도 안 된 아주 외진 곳이었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아버지를 따라가고, 연년생인 오빠와 나는 외할머니댁에 맡겨졌다.

외할머니는 집안일을 모두 바지런한 며느리에게 맡겨두고 계셨는데 외손주라는 혹(?)을 달게 됐음에도 늘 당당하셨다.
그런 외할머니가 초겨울이 되면 특별한 의식을 치르듯 어김없이 손수 하시는 일이 있었다.
부뚜막에 걸려있는 커다란 가마솥을 손수 공들여 닦는 일로 시작되는 그 일은,
푸줏간으로 가 부탁해둔 돼지등뼈를 들여다 솥에 고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 날은 온 집안에 구수한 냄새가 가득했고 학교를 다녀온 나는 숙제를 하면서도 저녁 먹을 시간만을 기다렸다.
돼지등뼈가 어지간히 고아지면 큼직큼직하게 자른 무와 매콤한 양념장을 넣어 조금 더 끓였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 음식의 熟手는 외숙모가 아니라 외할머니셨다.

감자탕과 요리법은 같지만 감자 대신 무를 넣었던 외할머니의 별식.
따로 이름도 없는 이 별식이 상에 오르면 나는 정말 맹렬히 먹었다.
요새 돼지등뼈는 감자탕 재료가 될 걸 염두에 두고 살을 넉넉히 붙여놓지만,
그때는 고기를 하도 알뜰살뜰 발라내 별로 뜯어 먹을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남매는 아랑곳하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큰 덩어리를 집어 들곤,
마치 마라푼다가 지나간 자리처럼 백골만 선연하게 드러낼 때까지 뜯고 빨고 핥았다.

“무도 좀 먹어봐”
외할머니는 무를 권하셨지만 난 절대로 먹지 않았다. 흐물흐물 풀어진, 들척지근한 무가 너무 싫어서였다.
건성으로 대답하곤 눈길은 여전히 더 큰 뼈를 찾고 있었다.

그 후 어머니가 해주신 감자탕 때문에 외할머니의 무탕은 아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외할머니의 무탕이 너무나 그리워지는 건.
12년전 돌아가실 무렵 그렇게 나를 찾으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도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한 죄책감 때문일까?

책을 쓰면서 거의 40년전에 맛보았던 외할머니의 무탕과 김치김밥이 그리워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당신 외손녀가 요리책을 썼고, 그 요리책 안에 당신의 이름이랑 당신의 요리법이 실려있는 걸 아시면 좋아하셨을 텐데….

나도 나이를 먹어간다는 증거일까, 나날이 외할머니가 그리워지는 건.
그리고 문득 올 가을 무가 맛있어 지면 외할머니의 무탕을 재현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1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만년초보1
    '06.10.1 9:14 AM

    아, 혜경쌤 아버님도 육군이셨군요. 저희 아버지도 그랬어요. ^^
    그러고 보니, 저도 초등학교 1학년 때... 남동생은 심장 수술 때문에 엄마랑 서울에 있고,
    당시 아빠의 근무지였던 원주에서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던 적이 있죠.
    외할머니가 젊으시고, 저랑 너무 닮아서 같이 시장 가면 모녀지간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죠.
    흰머리 하나에 10원씩 받고 뽑아 드리던 기억도 나고... 정말 돈을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요. ^^;

    이제 외할머니도 뵐 수 없고, 엄마까지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나니.. 왜 이리 그리운 사람만 많아지는지..

  • 2. 루디공주
    '06.10.1 12:02 PM

    2등이네요 ㅎㅎ
    감자대신 무가 들었다니까 저도 함 먹어보고 싶네요

  • 3. 라일락
    '06.10.1 12:34 PM

    가슴이 찡~~~~하네요..
    외갓집에 방학때 놀러가면 외할머니께서 해주신 가마솥밥맛이 그리워지네요

  • 4. 미소천사
    '06.10.1 2:54 PM

    나도 분명 외할머니가 있었는데.. 아무런 추억이 없다니..
    하지만, 할머니가 해주시던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다는건 확실해요.
    늘, 할머니 집에서 먹는 밥은 꿀맛이었거든요.

  • 5. 어설프니
    '06.10.1 3:46 PM

    무남독녀신 울엄니를 키워내신 울 외할머니도 생각나네요....
    외할머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얼마 전 엄마의 일기를 한 페이지 보고 저혼자 펑펑 울었드랬죠...
    엄마가 떡을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더라구요...
    그 날 하루 종일 울었지만도 지금도 그 일기를 다 욀정도로 머리 속에 남아요...

    쌤님 글을 보니, 저도 외할머니가 보고 싶네요...

  • 6. 이창희
    '06.10.1 7:29 PM

    제딸은 이제 백일된 아이를두었는데요
    추석에 외할머니댁밥 먹고 싶다고
    시댁에서 빨리 끝내고 나올 생각에-----
    이래도 되는건지

  • 7. 둥이둥이
    '06.10.2 10:00 AM

    저도 언젠가부터 음식에 들어 있는 무가 너무 맛있어졌어요...
    추석이라고..이쁘게 포장된 한과를 사다먹으며...
    시골서 올라오던 외할머니의 한과도 생각나궁...

    ....내 인생의 음식..기대됩니다..^^

  • 8. lorie
    '06.10.2 11:11 AM

    책의 일하면서 밥해먹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 였어요...
    광산김씨시라는 외할머니....

  • 9. 감자
    '06.10.2 11:44 AM

    저도 일밥에서 읽고 가슴 찡했던 기억이 나네요 ^^
    저희 외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세요...
    어제 친정에 갔다가 외할머니 뵈었는데..좀 더 따뜻하게 대해드리지못해서
    맘에 걸려요..전 왜 꼭 후회할짓을 잘 할까요?? ㅠ.ㅜ

    울 외할머니는 몸이 아파지시니까 저보다 손주사위를 더 좋아하신다죠..
    울 남편만 보면 어찌나 반가워하시며 손을 잡고 긴 얘기를 풀어놓으시는지...
    울 남편은 어릴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우리 외할머니 얘기를 잘 들어드려요..

  • 10. 커피향기
    '06.10.2 12:00 PM

    외할머니는 따뜻한 정을 맛있는 음식과 함께 손녀들의 가슴에 남겨놓으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저의 외할머니도 방학때면 올 손녀를 위해 낡은 책상 아래 무화과 예쁜 녀석으로 따로 담아놓으시곤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도 할머니 뵈러 들어서는 저에게 호박죽 어서 먹으라 권하셨던...
    김혜경샘 덕분에 목젖까지 따뜻해지는 울 외할머니를 떠올리고 갑니다.

  • 11. 라일락향기
    '06.10.2 2:34 PM

    저도 제 생일이면 늘 떡이며 약식을 만들어 주시던 외할머니가 생각납니다.
    결혼하여 내 살림을 갖고 맞벌이 하면서 할머니댁 앞을 지나쳐 퇴근하면서도
    정작 할머니는 찾아뵙지 못하고 엄마를 통해 소식을 들었었지요.
    출가외인이라고, 저 살기 바쁘고 힘들다고 당신 차례는 아예 기대도 안 하셨던 할머니.

    친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외'자를 뺀 채로 내 할머니인줄로만 알고 살았었어요.
    유난히 할머니가 그립네요.

  • 12. 이규원
    '06.10.2 9:48 PM

    저는 외할머니 얼굴을 한 번도 못 뵈었습니다.
    우리 친정엄마는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셨고
    친정엄마는 18살인가 19살에 시집을 와서
    20년동안 아기 없이 지내다가 38살에 저를 낳으셨답니다.
    그래도 장수하셔서 늦게 낳은 딸이 낳은 딸도 만나고
    작년에 86세로 돌아가셨답니다.

    엄마이면서도 할머니 같았던 우리엄마
    내일 모레 엄마 만나러 산소에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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