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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응모> 현이 할머님의 오이지

| 조회수 : 1,270 | 추천수 : 7
작성일 : 2006-10-09 20:02:47
정말 외로웠던 시간이었다.

스물 일곱...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이지만, 처음으로 가족들과 떨어져서 생활하는 외로움.

미국에서도 아주 외진 곳에 있는 연구소 파견이었고,

한국 사람들도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닌데다 나 말고는 대부분 가족이 있어서

주말이면 연구소 내 기숙사에서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지냈던 시간.

서울에 계신 지도 교수님과는 너무 다른 스타일의 내 보스인 박사님과의 마찰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한번도 시험에 떨어져 본 적 없고 공부하는 면에서는 남 부러워해 본 적 없었던 내가

기본적인 영어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의사 소통을 거의 못하는 반 벙어리 반 귀머거리 상태로 지내던 그 때.

너무 시골이어서 대중 교통도 없고, 차가 없던 나는 기숙사에서 혼자 세 끼 밥을 해먹어야 했다.

집에서는 설거지 한번 안 할 정도로 부엌일에 관심이 없었던 내가

그저 생존을 위해서 해 먹었던 음식들은 당연히 별 맛이 없었고

솜씨도 없는 주제에 입맛만 까다롭던 나는 미국 생활 한달 만에 가져갔던 바지가 흘러내려서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살이 빠졌었다.

지독한 향수병에 빠져서 밤마다 울면서 잠이 들고

잠들면 서울 우리집 계단에 화분까지 선명하게 보이곤 했던 때

같은 연구소 박사님 부부로부터 같이 한인 교회에 나가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미션 스쿨을 졸업한 까닭에 교회에 별 거부감이 없던 나는

일요일마다 아주 작고 허름한 한인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이들 한글을 가르치는 보조 교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몇 명 안 되는 아이들이지만, 알고 있는 한글의 수준 차이가 너무 커서

한 선생님이 두 명을 가르치는 반에 내가 보조 교사가 되었다.

뭐 별다른 애정이 있다기 보다

그저 내가 서울로 돌아 가기전까지 숫자를 한글로 읽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일주일에 한번씩 수업을 했다.

더운 어느날, 예배를 끝내고 한글 학교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가르치는 학생 현이 할머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작은 지퍼백을 하나 주셨다.

현이 할아버님이 좋아하셔서 매년 오이지를 담그시는데

당신 손자를 가르쳐주는 내게 감사의 표시로 나눠 주고 싶으시다고…

오이지를 담을 수 있는 품종의 작은 조선 오이를 구하기가 힘들어

모종을 구해서 심으시고, 그렇게 농사지은 오이로 담근 오이지.

너무 귀해서 당신 며느님도 나눠주지 않았다는 그 오이지 두 개를 나를 주시려고 일부러 가져오신거였다.

현이가 집과 학교과 너무 멀어서 주중에는 학교에서 더 가까운 할머니 댁에 머무르는데

요즘 부쩍 한국말이 늘었다고 감사하는 인사와 함께.

어린 사람이 공부하느라 이 먼곳까지 와서 고생이 많다는 말씀과 함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어서 그저 고맙다고 인사하고 받아왔던 그 오이지.

그 오이지를 반찬으로 무쳐도 먹고, 생수에 띄워서도 먹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집에 계신, 유치원을 다니던 5살부터 박사과정인 지금까지 내 아침 등교길을 배웅해주셨던 할머니의 마음도

손자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던 나에게 직접 만든 오이지를 나눠 주셨던 현이 할머니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그때 무사히 연구소 일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지 삼년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오이지를 보면 반백의 현이 할머님 생각이 난다.

늘 웃는 인자한 모습이였던 하집사님, 먼 곳에 있지만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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