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하루키는 길고 긴 마라톤 코스를 뛰면서 맥주 생각을 한다고 하더군요. 골인한 후에 마시는 맥주만큼 맛있는 것이 없다면서, 그 맛을 잊지 못해 마라톤을 뛴다고.
저야 도대체 산은 왜 올라가고 마라톤은 왜 뛰는지 영 이해가 안가는 사람이지만, 이런 건 조금 이해가 가네요.
다른 방법으로는 맛 볼 수 없는 기막힌 맥주를 위해서라면야.
제가 뛰는 마라톤은 주로 명절 및 시댁 행사. 김장이나 손님초대.
짧게는 1박2일, 길면 3박 4일의 풀코스입니다.
웬만하면 뛰기 전에 맥주도 미리미리 냉장고에.
이 경우에는 추리소설과 함께 즐기는 커피나 홍차, 케잌 한 조각.
이번 추석 전에도 소설 몇 권 주문해 받아놓고, 새 커피 사다놓고 부지런히 준비해 뒀습니다.
2. 열심히 뛴다.
남편 일 때문에 평소보다 늦게 출발하게 되었는지라, 추석 전날 오전에 갈비찜 열 근 재우는 틈틈이 골뱅이 양념장이랑 해물 샐러드 재료랑 드레싱 준비하는 김에 세탁기도 두 번 돌려놓고 출발.
일정대로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좋은 기록으로 완주했습니다.
3. 맥주를 들이킨다.
2박 3일 막바지에 집에 돌아와 청소기 돌리고 싸온 빨래 부랴부랴 해놓고, 다음날 남편 내보내고 아이 유치원 버스 태워보내고 나니 희희낙락.
손 씻고 커피 내려서 추리소설 읽으면서 뒹굴뒹굴. 케잌도 한 조각, 아니면 구워 놨던 쿠키라도 집어먹고.
베란다 창문 활짝 활짝 열어젖혀 놓았더니 바람이 시원합니다.
정말 맥주나 와인이라도 홀짝대고 싶은데 얼굴 벌게서 유치원 버스 마중 나갈 수 없으니 참지요.
정확히 5시간 10분의 자유입니다.
운이 좋아 푹 빠질만한 책을 골라잡은 거면 한 권 다 읽어치우기에도 충분한 시간이고,
시간 쓰기 아깝다 싶은 책이면 얼른 다른 걸로 바꿔 들어도 좋지요.



우리집 반경 30킬로 내에서는 최고로 꼽는 '라미띠에'의 쇼콜라 얼그레이나 레어치즈. 맞은편 Hans에는 미안하지만 맛 차이가 확연하네요.
나무랄 데 없는 맛을 즐기면서 술술 넘어가는 책장.
4. 여력이 되면 안주도 만든다.
넉넉히 만들어 둔 양념장으로 골뱅이 얹은 쟁반국수.
소면이 없어서 메밀국수 삶고 치커리나 상추가 없어서 있는대로 썰어놓고.

혼자서 대충 때우는 점심치고는 좀 시간투자를 해서 넉넉한 오전을 마무리합니다.
별다른 재주도 취미도 없는 심심한 인간으로서는 이정도면 완벽하게 달콤한 한나절이네요.
꼬박 3년을 아이와 한 몸으로 살다가 유치원 보내고 여유가 생기니,
이번에는 남편이 정신없이 바빠져서 아예 휴일없이 살게 되는 바람에 주말에도 아이와 둘이서만 보내며 교대가 없는지라 그것도 나름대로 고됩니다. 둘,셋씩 끼고 계시는 분들께는 엄살이겠지만요.
가끔 이렇게 보내는 한나절을 기대하면서 고단한 일상을 수월하게 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