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발자국 걸어가서 하얀밀가루를 꺼내오는 게 귀찮길래 바로 눈앞에 있는 통을 열어 시금치 밀가루를 꺼내고, 달걀물을 풀면서 혼자서 '히히' 하고 웃고 말았어요.
저희 kimys는 굴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해요, 저도 물론 좋아하긴 하는데 좋아하는 방법이 다르죠. 저는 초간장이나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굴회를 좋아하는데 kimys는 굴전, 굴튀김, 굴을 넣어 끓은 매생이국과 떡국, 굴무침, 채장아찌(저희 친정에서는 김치속에 넣는 버무린 무채를 이렇게 불러요)에 버무린 굴, 어리굴젓, 뭐 이런 걸 좋아해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인데 굴무침을 해달라는 거예요.
뭐뭐 넣고 하는 줄 알아야죠? 어느 요리책에서 보니까 실파와 다른 무슨 채소를 넣고 간장소스에 버무리는 굴무침을 소개했길래 따라 해봤더니 도리질을 치더라구요.
아직도 우리 kimys가 말하는 굴무침이 뭔지는 정확하게 파악이 되지않았는데 요새는 채장아찌 조금에 굴은 아주 많이 넣고 버무리는 성명미상의 굴요리로 불만을 잠재우고 있죠.

이런 kimys가 자주 먹고 싶어하는 요리중 하나가 굴전이에요. 오늘 제가 히히 웃은 것도 이 때문인데...
제가 연예부 차장시절이던 하여간 심신이 너무 고달퍼서 집에 돌아오면 손끝 하나 까닥할 힘이 없고 가족들을 향해 웃을 기운 조차 없던 시절이었어요.
제 평생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기가 한 다섯번쯤 있는데 이때가 바로 그중 하나죠.
이런 내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없는 남편 kimys는 "요즘 굴 먹을 때 아닌가? 아 굴전 먹어본지 얼마인지..." 하는 거예요.
제가 퇴근하기 전 저희 시어머니가 굴전이라도 한접시 부쳐주시면 좋으련만...
하여간 그래서 며칠뒤 굴을 사가지고 8시쯤 퇴근해서 들어갔어요.
그날은 당연히 30분만에 밥상 못차렸죠.
문제는 제가 머리를 잘못쓰는 바람에 자잘한 자연산 굴, 그걸 사가지고 간 거예요.
세척해서 봉지에 담아둔 큼직큼직한 양식굴을 사다 부쳤으면 금방 끝났을 걸 그 자잘한 굴을 씻는데 장난이 아니에요.
그래서 밀가루에 달걀을 깨넣고 대충 휘저은 다음 씻은 굴을 텀벙 집어넣고 굴 몇개가 올라오든 아랑곳하지않고 숟가락으로 떠서 대충대충 굴전을 부쳤어요.아 물론 불도 센불로 대충 부쳐서 모양이 얌전한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죠.
그래도 이걸 보더니 "아 굴전이구나!!"하며 좋아하는 남편, 양심이 켕겼지만 전 모른 척했어요. 하나하나 밀가루 무치고 달걀물에 담아 전을 지져야 하는 걸 알지만 도저히 그럴 기운도 없었고 기분도 아니었거든요.
굴전을 이렇게 한 두어번 부쳐줬나?
하루는 저희 친정어머니가 "지금 연신내역에서 지하철을 타니 녹번역 개찰구로 나와라"고 전화를 하셨어요.
표내고 나오고 또 표내고 들어가는게 번거롭다며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뭔가 밀폐용기를 싼 보자기를 제 손에 쥐어주곤 "김서방 줘라!!"하며 바로 계단을 내려가 버리셨어요.
집에 와 풀어보니 하나하나 정성껏 부친,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굴전이 제법 많이 담겨있어요. 그때 어찌나 울컥하던지...
딸 가진 엄마와 아들 가진 엄마의 차이가 느껴지기도 하고...하여간에 눈물 많은 제가 그냥 넘어갈 수 없이 한 두어방울 흘렸어요.
엄마가 정성껏 너무 예쁘게 부쳤길래 그 정성에 보답하는 의미로 예쁜 접시에 굴전을 담아내니,
먹기도 전에 벌써 kimys의 얼굴이 환해져요.
그러더니 한 개 집어먹더니 일성이 "진짜 굴전이다!!!"하는 거예요.
"그럼 그동안 내가 부쳐준 것 가짜 굴전이야?"하고 약간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더니 kimys왈, "왜 그런 지는 모르지만 그건 하여간 굴이 들어가긴 했지만 굴전은 아냐"하는 거예요.
전 그냥 웃고 말았어요, 재료는 같았지만 요리법이 다르면 요리가 아니다!?!
기막히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하여간 그후 굴전을 부칠 때마다 저 속으로 이렇게 말해요, '그래, 오늘 진짜 굴전 부친다' 라고요.
정말 음식중에는 과정을 생략하거나 재료를 뺄 수 있는 음식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참 많아요.
사람사는 것도 꼭 마찬가지에요. 건너 뛰어도 되는 일이 있지만 꼭 그 시기에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도 참 많아요.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 저보다 더 연상이신 분도 계신데 죄송합니다)가 되다보니 자식된 도리, 아내된 도리, 부모된 도리대로 살고 싶고 그러내요, 마치 깨끗이 씻은 굴을 얌전하게 밀가루에 굴리고, 달걀물에 담근 다음 약한불로 느긋하게 지져낸 굴전처럼 그렇게 정갈하고 향긋하게 살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