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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도서관 자리 잡아주기

| 조회수 : 5,256 | 추천수 : 122
작성일 : 2010-06-28 12:15:54


이건 내가 한 밥 아니다.
완두와 밤에 잡곡 현미밥, 취나물 무침, 감자 샐러드와 양파 절임, 김치 H씨가 준비한 일요일 아침이다.

기말고사라고 주말에도 기숙사에 있던 K가 ‘의무 귀가일’이라며 집에 왔다.
기말고사는 아이 학교만 보는 게 아니니 동네 독서실은 만원이다.

할 수 없이 공공도서관에 간단다.
7시에 문 여는 도서관 데려다 주고 아침도 챙겨주려 토요일임에도 6시에 일어났으나 아이는 못 일어난다.
이럴 땐 참 난감하다. 잠에 취한 아이를 보면 ‘그냥 자라’ 놔두고 싶다.
하지만 못 일어난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꿀꿀한 기분으로 허둥댈게 뻔해 깨워보지만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내가 그랬다. 잠이 많기도 했지만 특히 아침잠이 많았다. 게다가 약골이었다.
이런 날 어머니는 열 번이고 백번이고 무던히도 깨우셨다. “아침 먹어야지” “학교가야지” 라고
그렇게 늦게 일어난 날은 어머니 탓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짜증을 부렸는지…….
오만 소가지 다 떨며 학교에 가곤 했었다.

나는 어머니처럼 무던히 아이를 깨우지 못한다.
“깨워달라는 시간이다.” “일어나라 기분만 나빠진다.” 말하는 정도다.
“좀 더 자겠다.”는 아이의 말에 H씨는 아침 준비하고 나는 6시 40분 쯤 도서관으로 자리 잡아주러 간다.
7시 문을 여는 도서관, 집에서 10분 거리다.
‘너무 이른 시간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도착한 도서관 입구 도로변에 차가 빼곡하다.
왠지 모를 불안이 몰려온다.

부지런히 주차하고 도서관 입구로 서자, 세상에! 100여 미터쯤 늘어 서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줄 맨 뒤에서 눈짐작으로 사람 수를 헤아려 본다. ‘건물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1m에 2~3사람쯤 서 있고 400석쯤 되니 자리는 잡겠다.’ 생각하는 동안 내 뒤로 10여 미터 줄이 늘었다.

아이 태워주고 돌아가는 사람, 나처럼 대신 자리잡아주려 나온 듯 보이는 부모들,
놀토인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기특하게도 가방매고 한손에 책까지 들고 서 있는
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다. 자다 깬 얼굴이 역력하니 누렇게 떠 보인다.

“아침이나 먹었니.” “내 새끼나 남의 새끼나 다 고생이다.”
“부모는 또 무슨 고생이냐.” “참 뭐 같은 교육이다.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마음들이 스쳐 가는데, 어디나 발 빠른 사람 있다고
“자리 없을 것 같아, 거기는?” 하는 전화를 하더니 남매인 듯 보이는 아이들을 데려 가는 아빠도 보이더라.
그런데 내 앞 줄이었다.
하긴 거리와 사람 수 어림잡아 보고 서 있는 나나 저 집이나 약삭빠른 건 다를 바 없다.
도서관 좌석수를 모르나 보다.

그렇게 K 대신 도서관 자리 잡고 들고 간 책 뒤적이는 데 8시 반쯤 전화가 왔다.
아침 먹고 K 머리 감고 있으니 오라고…….

‘도서관 자리 잡아 주기’ 연애할 때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결혼하고 H씨 임용준비 할 때 몇 번 있긴 했으나 출근길 도서관 들러 책 놓고 가는 정도였으니
새벽 줄 서 자리 잡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튼 연애할 때도 안하던 짓을 주말 이틀 동안 했다. 덕분에 주말 이틀 아침도 준비 안했다.
맛있었다. 역시 밥은 얻어먹는 밥이 최고다. 내 손보다 남의 손맛이 좋다.

“내가 안 한 밥이 왜 더 맛있는지 몰라” H씨에게 물으니 “밥하느라고 진 빼서 그렇지.” 한다.



*역시 * H씨가 한 가지 꽈리고추 졸임. 가지와 꽈리고추도 잘 어울린다.
고추는 매콤한 게 좋았는데 좀 달았다.


9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morning
    '10.6.28 12:28 PM

    음, 저도 동네 도서관 단골 출입자인데 학생들 시험 기간 끝날 때까지는 좀 기다렸다 가야겠네요. 언젠가 멋도 모르고 아침 일찍 갔다가 문 열기 기다리며 줄 서 있는 풍경을 본적 있습니다. 할 수 없이 저도 같은 줄에 서서 기다린 경험이 있지요.
    시험 기간이라도 의무귀가일은 지키는군요.
    오후에 님 글 재미있게 읽고 있답니다. 더구나 저와 가까운데 사신다니...^^

  • 2. 여인2
    '10.6.28 12:47 PM

    게다가 노가다입니다.
    실력있고 이름 난 번역가일 경우 책이나 영화 번역이라면 편당으로 계산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장당 매겨지기도 하고 단어숫자로 값이 매겨지기도 합니다.
    사전 한 번 들출 필요도 없이 외국어가 완벽하면 시간이 확 줄겠지만
    보통 그 정도 실력이 안 될 경우 단어의 표면적 뜻과 숨겨진 뜻 찾아내고 유려하게 문장 만드는데 시간 엄청 걸리지요.
    게다가 죽어도 해석 안 되는 단어 하나 딱 나왔는데 그게 하필 중요한 단어면 그거 하나 때문에 한 시간 넘기는건 예사...
    이건 일하는데 있는 사소한 애로사항이고요
    결정적으로 일이 적고 돈이 안 돼요. 전업은 힘들다고 봐요.

  • 3. 맑은샘
    '10.6.28 1:09 PM

    26.9%

  • 4. 캐시맘
    '10.6.28 1:45 PM

    그렇지않아도 주말에 독서실에 자리없어 속상했던차에, (저희아이는 집에서 푸~욱 쉬었다갔다지요) 오후에님 글을보고 혹시나 해서 지난글을 찾아 보았더니.. 저와 같은 학교 학부형이시네요. 어쩜 사시는 지역도 제가 얼마전까지 살았던곳인것 같고요..반갑습니다. *^^*

  • 5. 서초댁
    '10.6.28 3:29 PM

    어저께가 의무 귀가일이면...혹시 우리 애랑 같은 학교 아닌가 모르겠네요.
    얼마전에 자사고로 승인받은....현재는 외고인...
    어쩌다 아이가 오는 주말엔 아무래도 메뉴에 신경이 좀 쓰이죠.
    우리 딸은 집 근처 **유스센타 독서실 갔는데...다행히 자리는 있었는데..영 왔다갔다 하는 애들 때문에 집중이 안된다고 점심부터 그냥 집에서 하더군요.

  • 6. 소연
    '10.6.28 8:46 PM

    후후후~ 여유로운 웃음...
    저에 몇년전 모습이네요... 도서관 자리 잡기는 안해줫지만..
    의무귀가일이 다가오면. 식단 다시 짜고... 혹시 통화하면 먹고싶다는 메뉴 물어보고..
    몇년을 주말을 주말스럽지 못하게.. 가끔 왔다 가는 아이 ..먹고 픈거라도 다 챙겨 주리라..
    가끔은 학교앞으로 모시러가고...늘상 아이가 왓다 가는 휴일밤은... 아이아빠가 태워다주고...
    차타고 가면서 한숨이라도 눈 붙이라고.. 태워다주고.. 못먹은 과일 1시간 거리에 ...
    과일 도시락 만들어 들려 보내고...

    몇년을 주말밤을 기사로 보낸 아이아빠는 그래도 그때가 좋앗던듯 합니다..
    차안에 두 부자가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아빠가 아이한테 해주고 싶은 말도 해주고..

    좋은시간들.. 지나고 나면 행복한 시간 들입니다 ^^

  • 7. 천하
    '10.6.28 11:58 PM

    수고많으셨군요.
    그래도 밥은 안해 반본전은 뽑았군요..ㅎㅎ

  • 8. 열무김치
    '10.6.29 6:32 AM

    연애할 때도 안하던 짓을 주말 내내 ㅋㅋㅋㅋ하셨다니 감동이~~
    사모님 취나물도 맛깔나 보이는데요~

  • 9. candy
    '10.6.29 7:16 AM

    맞아요,,,,남의집 밥은 왜그리 맛난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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