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도 철학도 없는 2009년 세제개편안
가정 살림이든 나라 살림이든 버는 것을 줄이고 쓰는 것을 늘리면 그 결과는 너무나도 뻔
하다. 돈 달리는 나무를 갖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적자 살림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4
대강 정비사업이다 뭐다 해서 재정지출을 천문학적 규모로 늘리면서 조자룡 헌 칼 쓰듯 세
금을 깎아주었으니 나라 살림에 큰 구멍이 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버는 것을
늘리든 쓰는 것을 줄이든 어느 한쪽에서라도 단속을 해야 할 텐데, 나 몰라라 손을 놓고 있
는 모습이 너무나도 걱정스럽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면 정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우리는 좋은 편이라는
변명만 늘어놓는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낫다
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심할 수 없는 일이다. 재정 건전성에 문제가 있는 나라들이 그것 때
문에 정책 수행에 얼마나 큰 제약을 받고 있는지를 똑똑히 보아야 한다. 국가채무의 수준이
OECD 평균치를 훨씬 더 밑돈다는 사실이 방만한 재정 운영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최근 우리가 겪은 두 번의 심각한 경제위기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은 건전한
재정이었다. 만약 재정 건전성에 문제가 있었다면 정부의 행동반경이 무척 좁아졌을 것이
고, 이에 따라 위기 극복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 문제만은 없었
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 신축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방만한 재정
운영이 지금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또 다른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손발을 꽁꽁 묶어놓는 결과를 빚을지 모른다.
정부도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곧 국회에 제출될 ‘2009년 세제개편안’을 통
해 세금을 더 걷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로 인한 세수 증가분이 앞으로 예상되는 재정적자
를 메우기에 턱없이 모자랄 뿐 아니라, 그 내용을 보면 ‘눈 가리고 아웅’이란 말을 연상케
한다. 보수 언론은 부자 증세로 세수 증대를 꾀한다고 대서특필하고 있지만, 마지못해 몇
푼의 세금 더 내게 하면서 부자 증세라고 말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다.
이번 세제개편안에서 부자들의 조세 부담을 높이는 대표적인 조치로 선전하고 있는 것은
1억원 이상 고소득자에 대한 근로소득공제 축소다. 이로 인해 연소득 1억원인 사람의 소득
세가 48만원 정도 늘어나지만, 2008년 세제개편안에 따라 세율이 2% 포인트 낮아진 것만
으로도 이미 2백만원 가량의 세금이 절약된 상황이다. 감세폭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세금
부담 증가를 갖고 부자 증세니 뭐니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빗발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부자 감세를 밀어붙이던 정부가 이 정도로나마 뒷걸음질 친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지나쳤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한
다. 그런데 아직도 부유층에 대한 소득세 경감이 우리 경제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 줄 것
이라고 믿는지 묻고 싶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슨 긍정적 효과가 나타날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경제이론을 모두 동원해 봐도 별다른 답이 나올 것 같지 않
다.
소득세를 깎아주면 사람들이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것은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 예
전의 스칸디나비아 국가처럼 최고 소득세율이 90%에 이를 경우에는 세율의 대폭 인하가
그런 효과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그러나 35%를 33%로 낮춰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분발해
더 열심히 일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고소득자 스스로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부유층에 대한 소득세 감세는 아무 효과 없이 세수만 축내
는 결과를 빚을 것이 너무나도 뻔하다.
법인세의 경우에도 거의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법인세율 인하로 인한 대규모 세수
결손을 임시투자세약공제 폐지와 최저한세 인상이라는 미봉책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정
부도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도록 유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감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법인세율을 몇 % 포인트 내려준다 해서 투자를 꺼리던 기
업이 갑자기 투자를 한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까? 이제는 정부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무언지 알만도 한데, 아는 척도 하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나 역시 장기적으로 법인세율 인하를 추진해야 한다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은 법인세율을 대폭 낮출 때가 아니다.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대규모 재정지출이 필요한 시
점에서 대규모 세수 결손을 가져올 정책은 삼가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
처럼 경제 전망이 지극히 불투명한 상황에서는 법인세율 인하가 이렇다 할 긍정적 효과를
내기가 더욱 어렵다. 별 긍정적 효과를 내지도 못하면서 재정 건전성만 해칠 정책이라면 깨
끗이 포기하는 것이 상책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형편없는 정
책이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3주택 이상 다주택자에 대한 전세보증금 과세방안 역시 실질적 의미에서의 부자 증세라
고 보기 힘들다. 임대사업과 관련해 발생한 이자를 비용으로 공제하고 나면 과세대상이 될
소득이 거의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주택자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만 할
뿐, 실질적으로 그들이 내는 세금은 아주 적은 금액일 것이다. 다주택자들이 양도소득세 중
과 한시 폐지로 인해 얻는 이득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서민친화
적 정책처럼 보이기 위한 ‘사탕발림’의 대표적 사례라고 생각한다.
2009년도 세제개편안에서는 조세정책에 대한 그 어떤 뚜렷한 비전이나 철학을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우선 감세 기조를 계속 끌고 나갈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에 대한 분
명한 입장을 읽을 수 없다. 감세 기조를 계속 밀어붙일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왜
부분적으로 후퇴라고 볼 수 있는 조치를 취했는지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없다. 예를 들어
정부가 소득 1억원 이상 고소득자에 대한 근로소득공제의 축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논리
적 근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디를 보아도 납득할 만한 답을 찾을 수 없다.
재정 건전성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볼 때도 2009년 세제개혁안 같은 땜질식 처방
은 결코 만족스러운 해법이 될 수 없다. 배 밑바닥에 큰 구멍을 뚫어 놓고 차오르는 물을
사발로 퍼내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다. 감세가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듯한 시대착오적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더군다나 경기 활성화를 구실
로 마음 놓고 돈 보따리를 풀어헤칠 태세라 걱정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정부는 4대강 정비사업으로 인해 다른 지역개발사업이 위축된다는 지적에 대해 그런 일
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다짐하고 있다. 재정지출을 크게 늘리지 않고서는 다
른 사업에 영향이 가지 않게 만들 방법이 없다. 결국 이 다짐은 재정지출을 크게 늘리겠다
는 의도를 에둘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수 감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껏 돈을
쓰겠다는 그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 정부는 출범 전부터 ‘작은 정부
가 좋은 정부’라는 구호를 줄기차게 부르짖어 오지 않았는가?
머지않은 장래에 재정 건전성 문제가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 심각한 문제로 떠오를지
모른다. 사실 건전한 재정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역대 정부가 애써 쌓아놓은 업적이다. 입
만 열면 ‘잃어버린 10년’을 말하는 사람조차 지난 두 정부가 재정 건전성만은 다치지 않았
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현 정부도 역대 정부가 공들여 쌓아놓은 탑을 일거에 무너뜨렸
다는 비난을 받고 싶지는 않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직은 괜찮다고 낙관하지 말고, 재정 건
전성을 해칠 만한 일은 스스로 삼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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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도 철학도 없는 2009년 세제개편안-이준구
솔이아빠 조회수 : 181
작성일 : 2009-09-03 23:45:55
IP : 121.162.xxx.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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