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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사랑을 잃고도 살아야 한다

여전히슬픈 조회수 : 242
작성일 : 2009-05-31 16:07:12
[노무현 前 대통령 영결식에 부쳐] 사랑을 잃고  




  

  

사랑을 잃고, 그래도 나는 산다. 아침이면 교육방송으로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듣고, 할인쿠폰을 챙겨 시장을 보고, 저녁 반찬을 고민하며 요리책을 뒤적인다. 아이의 중간고사 성적표를 들여다보며 걱정하고, 누군가를 흉보며 친구와 수다를 떨기도 한다.

스물 네 시간 그 생각만 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잃었어도 해는 뜨고 꽃은 피고 세상은 변한 게 없는 듯하다. 눈물은 내려가도 숟가락은 올라간다는 소설 속 말처럼, 사랑을 잃고도 배는 고프다. 꾸역꾸역 밥을 먹고 기신기신 일을 한다. 다만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자판을 치던 손가락을 멈추고, 설거지를 하다가 흐르는 수돗물을 끄지도 못한 채로, 아프다. 몸속 아주 깊은 곳에서 배어난 물기가 눈가로 치받친다. 사랑을 잃기 전에 고백할 걸 그랬다. 이렇게 맥없이 놓칠 거였다면 사랑한다고 귀에 닿도록 소리칠 걸 그랬다. 여전히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그중에서도 가장 당황스러운 일은, 내가 이만큼이나 사랑하는지를 여태껏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아침, 그때 각자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늦잠에 빠져 있다가, 일터로 향하다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다가, 우리는 갑자기 역사의 한 장면을 목도했다. 금강으로 철새를 보러 가는 아들에게 새벽밥을 지어주고 일찍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던 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랐고, 곧 불같은 분노에 사로잡혔다. 이건 배신이야! 아무리 고단할지라도 삶은 엄중한 의무이거늘, 왜 치욕을 곱씹으면서라도 버티지 못했는가?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끝까지 맞붙어 싸웠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그의 마지막 결단을 이해해 보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지만 언제나 당당했던 사람, 돈도 학벌도 `빽`도 없는 주제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겠노라 덤벼드는 바람에 바윗덩이처럼 단단했던 기득권 세력에 미운털이 박혀 물리고 뜯기고 만신창이가 된 사람. 내가 아는 정치인들은 자기애가 극대화된 지극한 욕망의 존재들이었다. 비리가 들통 나 망신을 당하고 똥통 같은 싸움판에서 뒹굴지언정 죄의식으로 자신을 괴롭힐 줄 모르는 강안(强顔)이었다. 고뇌의 궁극인 자살 같은 건 그들에게 아예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허를 찔렸다. 그의 투철한 자기애는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발휘되었다. 자신이 세운 원칙과 소신이 무너지고 자존이 훼손당하자 그는 스스로를 버리는 길을 택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정치적 존엄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는 가파른 바위 끝에서 뛰어내렸다기보다 날아올랐다. 죽음을 미화하거나 자살을 찬양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평생을 있는 힘껏 살아낸 사람만이 택할 수 있는 간결하고 깨끗한 탈출이었다. 온몸으로 온몸을 밀어, 그는 마침내 자신의 삶에 마지막 목격자가 된 것이다.

며칠 전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덕수궁 대한문 앞에 자리한 시민분향소에 다녀왔다. 뙤약볕은 쏟아졌고 기다림은 길었다.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지만 주위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고 차분했다. 나는 여태껏 이토록 무겁고, 깊고, 투명한 침묵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노여움과 미움까지를 모두 녹인 것이려니와 슬픔과 미안함이 뒤엉켜 가라앉은 것이었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부정과 분노, 타협과 우울과 수용의 과정을 모두 거쳐, 우리는 살아남은 채로 우리의 죽음을 겪어낸 것이다.

사랑을 잃고도, 살아야 한다. 때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렇게 울고 웃으며 한세상이 흘러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이 깊을수록 기억은 끈질기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 그는 여러 번 살아날 것이다. 잘 가요, 노무현 대통령님!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안녕히….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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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도 살아야 한다니...
부끄러워요.ㅠㅠ
IP : 124.50.xxx.80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여전히슬픈
    '09.5.31 4:07 PM (124.50.xxx.80)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303380
    원문 주소

  • 2. 사랑을
    '09.5.31 4:30 PM (221.142.xxx.145)

    잃어도
    사람을 잃어도 살아가야하는게, 살아갈수밖에 없는게 인간이지요.

    평상시처럼 살아간다고 해서, 기억속에서.가슴속에서도 잊혀지는건 아닙니다.

    새록새록, 문득문득 떠오르고 생각나고...하지요.

    어린날 아버지를 떠나보내고....지금껏 항상 가슴에 얹혀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내가 밥먹고 일상을 살아간다는게 부끄럽다고 생각한적은 없습니다. 강하게 살아가야지요.

  • 3. ▶◀ 웃음조각
    '09.5.31 5:13 PM (125.252.xxx.133)

    시댁쪽 관계된 가까운 이를 갑작스럽게 떠나 보낸 적이 있습니다.

    저와도 많이 친했고, 저보다도 젊었고, 참 유쾌하고 밝은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을 밝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요.

    갑작스런 비보를 받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1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3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문득 문득 떠오르더군요.


    그 사람에 대한 영상은 시간이 지나면 약간씩 흐려지겠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추억은 아무도 막을 수 없지요.

    제게 노무현 대통령도 그런 존재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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