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년전, 서울에서 객지생활중이던 나는
작은 카세트라디오가 하숙방에서의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밤이면 하남석이 진행하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도 듣고,
일찍 들어온 날이면 `꽃순이를 아시나요?'라는 연속극도 어쩌다 한번씩 들으면서
엄마떠난 외로움을 달래곤 했었지요.
그때 자주 들었던 구성진 음성의 주제가가 `꽃순이를 아시나요?' 였더랬습니다.
훗날 타타타인가, 접시를 깨자 이던가 그런 노래가 유행하면서
위 주제가를 부른 가수가 김국환이라는 것도 알았지만요.
오늘 제가 일을 마친 후 집에서 기다리는 남편도 팽개치고 이렇게 컴퓨터앞에 앉은 이유는,
꽃순이를 아시나요라는 가요때문도 아니요 한국의 라디오연속극을 논하자는 것도 아니며
김국환이란 카수를 들먹거리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꽃순이가 아닌, 복순이를 아시냐고 묻고 싶어서입니다.
복순씨, 그것은 가명입니다.
살아온 세월이 저의 근 두배나 되어 머지않아 아흔을 바라보는 노할머니를
실명 그대로 부르기가 송구하여 제 맘대로 복순이라 칭하렵니다.
복순씨는 함경도 태생입니다.
일제시대 경성까지 유학와서 그 유명한 E여전을 졸업하고
친정집만큼이나 유복한 댁으로 시집을 갔었지요.
시어른도 남편도 의사였고 손에 물한방울 튀기지 않고도
일년 열두달 차려주는 밥상에 늘어진 팔자였다고 합니다.
결혼후 몇년이 지나고 아이가 태어나고 ...
남편은 아버지 슬하를 떠나 개원을 했는데
의사인 자신도 모르게 폐결핵에 걸려 투병 몇년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후의 세월을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제가 그분을 안 지가 5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약간의 치매기가 있어 그분의 말씀을 제가 정확히 이해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므로...
저의 일터에 그분이 정기적으로 오셨더랬지요.
저는 늙으신 친정어머니 생각이 나서 다른 손님보단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7월 하순에 뵙고 근 석달 얼굴 뵌 적이 없었습니다.
제 컴퓨터에 저장된 그분의 전화로 몇차례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었고
나이드신 분 오래 연락 없으면 돌아가신 건가 이런 생각으로 심란했었지요.
어느날 복순씨와 같은 교회 다니신다는 손님 한분이
복순씨가 지방 어느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고 알려 주었어요.
**암이라고 하더군요.
노인네라 돌아가실 거라고, 아마도 이곳에 다시 오시지는 못할 거라고...
그런데 오늘 오후 그분이 제 일터로 걸어 들어오셨지요.
색깔 고운 스웨터에 검정색 주름치마, 그리고 발편한 구두 얌전히 신고...
저는 달려가 복순씨를 부축했습니다.
-할머니, 저 할머니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나, 안 그래도 죽을 준비 하러 여기 왔어
-왜요? 이렇게 걸어오셨쟎아요?
-아냐, 나 많이 앓았다우. 아들 둘은 미국 가 있고
둘째 사는 곳 근처 양로원에 가 있었는데 돈이 필요할 것 같아
사는 집 뺄려고...
이런 저런 지나온 얘기 하시는데 눈앞에 다가온 그분의 죽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어요.
복순씨는 가면서 그랬지요.
- 잘 있수 , 늙지 말고...우리 엄니아버지 나 시집보낼 때 이렇게 될 줄 알기나 했간?
부축해서 저어 앞까지 모셔다 드리면서
이상하게 복순씨의 검정색 주름치마가 젖어있는 게 눈에 띄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지요.
일터로 돌아와 맨처음 제눈에 들어온 것은
복순씨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 축축히 젖어 있었습니다.
그분이 옛이야기 하면서 흘린 눈물때문이 아니라
복순씨는 그 자리에 오줌을 지리고 가신 겁니다.
82cook가족 여러분, 저는 착한 딸도 아니고
효심 지극한 며느리도 못되는, 어느 정도 세상의 때가 묻어버린 아줌마입니다.
그런데 저, 그자리를 급한 김에 페브리즈 스프레이로 해결하면서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사람 상대하는 직업이란 것도 잠시 잊고 눈두덩이 붓도록 울었습니다.
여러분, 복순씨를 아시나요 이름도 복이 넘치는 복순씨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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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순이를 아시나요?
김소영 조회수 : 868
작성일 : 2003-10-20 21:54:55
IP : 211.229.xxx.105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강바람
'03.10.20 10:03 PM (218.52.xxx.3)인생무상-
"우리 엄니 아버지 나 시집보낼 때 이렇게 될 줄 알기나 했간?"
이 말이 왜 그렇게 슬프게 느껴지죠?2. 정지문
'03.10.20 11:04 PM (211.215.xxx.127)..........
우리엄마아빠도 안늙으셨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제나이가 30대 후반이 되어버렸네요3. 김혜경
'03.10.20 11:21 PM (218.237.xxx.210)...
우리도 하루하루 늙어가는 거겠죠?4. 경빈마마
'03.10.21 7:40 AM (211.36.xxx.49)눈물이 주르르르ㅡㅡㅡㅡ~~~~~~(아무래도 난 수도꼭지가 고장이 난 듯,,영원히 못 고침)
내 한몸 다 던져서도 모자라 내 목숨까지 던져야 하는 인생.
나모 모르게 지려버린 의자위의 그 분비물 마저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아마도 먼 훗 날에 나의 모습이 아닐런가~~~~~~~~~~~~~!5. 치즈
'03.10.21 9:13 AM (211.169.xxx.14)죽을 준비하러.........
피 한 점 섞이지 않아도 마저 찾아볼 곳이 많아야 할 텐데요.
김소영님께서도 그런 곳이 되어 주셨군요.6. 푸우
'03.10.21 10:12 AM (219.241.xxx.37)너무 슬퍼요,,
저두 경빈마마님처럼 요즘 왜이렇게 수도꼭지가 잘 터지죠??7. peacemaker
'03.10.21 10:44 AM (218.155.xxx.91).... ㅠㅠ
8. 쭈니맘
'03.10.21 1:13 PM (210.124.xxx.124)....
눈물이 자꾸 나서....
맘이 저려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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