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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억 있으신가요?

슬픕니다. 조회수 : 854
작성일 : 2011-03-17 02:19:45
저는 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추억이요.

할아버지는 참 키가 크신 분이셨어요. 엄마와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참 게으른 양반이셨다고 합니다.
제 기억속의 할아버지는 늘 빨간 모란꽃무늬 밍크담요를 덮으시고 파리채로 파리를 잡으시며
티비 리모컨을 돌리셨어요. 팔이 매우 기셨던 터라 누운 채로도 파리 잘 잡으셨습니다.;
일어서실 때라곤 화장실 가실 때 뿐이었는데 굉장히 어린 마음에 키가 크다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조금씩 이상해지셨어요. 치매가 오셨던 모양입니다. 먹을 걸루요.
아빠 공장 사택에 사셨는데 계속 거기서 밥 훔쳐 드시고 밥 드시고도 생쌀 씹으시고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치매였었죠. 그래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이살 하셨고
이사온 집에서도 많이 배가 고프셨던 할아버지는 언니가 설에 드렸던 용돈으로
과자를 사러 슈퍼로 가시다가 엉덩이뼈가 부러지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일어서지 못하셨어요.

그러고보니 언니가 용돈을 참 많이 드렸죠. 그래서 할아버지 기억속엔 언니만 있었어요.

엉덩이뼈가 부러진 할아버지는 5년이 넘게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결국엔 살이 썩어
패혈증이 오고, 폐에 물이 차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한테 저는 없는 사람었어요. 왜냐면
할아버지의 없어진 기억 속에 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데먼데먼하게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살 썩는 냄새가 싫어 도망을 갔죠. 그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달 전에 내려갔는데
병실에 혼자 남게 된 거에요. 할아버지 팔에 손을 댔는데 참 따뜻하더라구요. 패혈증이니까..

그래서 그때 인사를 했어요. 할아버지. 너무 힘드시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고.

그러고 할아버지는 한 달 뒤에 돌아가셨어요. 염을 하고 난 뒤에 입관했을 때
그 관이 너무 작아보여서 아무도 몰래 눈물이 핑 돌았죠. 할아버지 화장터에 보내드리고는
굴뚝으로 나가는 연기가 너무 하얗고 작아서 참 낯설었어요.

어째선지 별로 슬프지 않았어요. 왜냐면, 할아버지 기억 속엔 제가 없었고 제 생활 속에도
할아버지가 없었거든요. 우리는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으니까. 일방통행인 관계처럼요.
저는 할아버지와 오년동안 굉장히 천천히 헤어졌어요. 할아버지는 제 생각에는,
살아계시던게 아니라 죽어가시던 것이었거든요. 그 살 썩는 냄새는 요즘도 기억이 나요.
그 냄새 맡을 때마다 눈 앞에 아지랑이같은 무지개가 피는 기분이었어요.
그렇게 아주 오랜 이별을 했어요. 있던 정이 조금씩 말라가기엔 충분한 기간이었어요.
친구와 점점 연락이 뜸해지다가 어느 순간에 완전히 내  곁에서 사라지듯이.


그렇게 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오월이 됐어요. 두 달이 넘은 상황이었는데
학교 근처 뒷산을 오르다 풋밤을 봤어요. 그 풋밤 색깔이라니.
정말 눈이 선명하고 깨끗해질 것 같은 픽셀 와방 높인 것 같은 선명한 가시라니.
그 순간에 갑자기 머릿속에
아주 길고 긴 하얀 시멘트길이 생각이 났어요.

그 게으르고 게으른 할아버지는 어느날 갑자기
아빠 공장에 놀러온 저를 데리고 길고 긴 하얀 시멘트길을 걸었어요.
오월의 어느 날. 매우 맑고 햇빛이 밝던 날에요.
무슨 사막 고원지대같은 커다란 모래무더기를 양옆에 끼고
공사장이 드문드문 세워진 평지를 걸어갔어요.

그리고 아주 높고 높은 산을 쉬엄쉬엄 올라가서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고서는 능선을 걸어 밤나무 밑으로 갔죠.
아직 덜 익은 풋밤이었는데도 제가 그 밤 신기해하니까
돌로 그 밤을 내리치고 발로 밟아 새파란 풋밤을 까 주셨어요.
할아버진 가시에 찔려 피가 나는 손으로 제게 풋밤을 건넸는데
그 순간의 풍경이 한장의 사진처럼
붉은 피와 하얗고 혈관이 돋아나온 할아버지의 혈관과 푸른 풋밤이
기억속에 굉장히 생생히 떠올랐어요.

그렇게 풋밤을 세 개 주머니에 넣고
말이 없는 할아버지와 다시 그 기나긴 길을 건너 집에 오다가
할아버지가 근처 슈퍼에서 흰 강엿을 사 주셔서 줄줄 빨면서 집에 왔어요.
왠지 할아버지의 등이 그날은 커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나네요.
올 때의 그 길은 갈 때보다 멀지 않았어요.
이상하게 따뜻하고 하얗고 선명한 기억인데
왜 그게 그때까지 떠오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날 처음으로 울었어요.
아, 할아버지 죄송해요 하고.
날은 오월이라 바람은 따뜻하고 온 나무는 초록색인데
그 초록색 보고 할아버지 까주신 풋밤이 생각이 나서
하늘은 파랗고 날은 좋은데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할 데가 없어서
제게 선물 하나 안 준 나쁜 할아비라고 할머닌 웃으셨지만
그 기억은 참 따뜻한 선물이었어요.


방사능 낙진에 폭파네
조용히 손톱을 물어뜯다가
문득 그 날 생각이 나서 한번 썼어요.
글을 쓰는 동안은 불안하지 않았어요.



IP : 59.9.xxx.111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따뜻함
    '11.3.17 2:24 AM (116.45.xxx.171)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잘 읽고 갑니다.ㅋㅋ
    잠이 조금은 편할거 같아여. 감사해여 ㅋㅋ

  • 2. ^^
    '11.3.17 2:29 AM (218.38.xxx.228)

    글을 참 잘쓰세요^^
    풋밤과 할아버지 손의 피 부분 묘사는 꼭 눈에 보이는듯한 느낌까지 있어요..

    저는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요..
    이렇게 쌀쌀한 밤이면 제 이불속을 파고들던 몽실몽실한 멍멍이었어요.. 근데 사악한 저는..^^;;; 멍멍이가 따뜻하게 데워놓은 자리를 발로 밀어내고 거기에 차가운 제 발을 대고.. 다시 차가워지면 또 멍멍이 살짝 밀어내고 다시 발대고..ㅎㅎㅎ
    그래도 제가 좋다고 꾸역꾸역 제 이불속으로 들어오던 멍멍이가 생각나네요..

    이상하게 사소한 기억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지더라구요..

  • 3. 대한민국당원
    '11.3.17 2:29 AM (58.226.xxx.213)

    누군들 아프지 않은 얘기가 있겠는가.
    입장이 되지 않으면 모를 일

    안다고 말을 하여도 앉아서 볼일 보는 사람과
    서서 볼 일 보는 사람은 180도라 (정 반대니)

    (서로)얘기만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람은 속이 좁다. ㅋㅋㅋ;;

  • 4. 궁금
    '11.3.17 2:41 AM (222.238.xxx.180)

    미소님 강아지가 너무 불쌍해요.ㅋㅋ

  • 5. ,,
    '11.3.17 2:45 AM (216.40.xxx.232)

    그러게요. 저도 개 키우는데..그 몽실몽실한 털복숭이를 발로 밀어내본적은 한번도 없어요. ㅋㅋ

  • 6. 슬픕니다.
    '11.3.17 2:47 AM (59.9.xxx.111)

    저는 고양이 발로 밀어요 ㅋㅋ
    저희집 고양이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사람이 걸어갈 때마다 양발에 머리를 부비려고 들거든요.
    그래서 빨리 걸어갈 때는 정말 바빠요. 왼발 오른발에 다 부벼야 되니까.
    가만히 두면 정말 끝도 없이 발에 머리를 부비고 있는데
    그 표정이 세상에서 젤 행복해 보여요.

    저도 가끔 추우면 댓글님처럼 발치에 묻어놨다가 밀쳐요 ㅎㅎ

  • 7. 원글님
    '11.3.17 2:51 AM (121.162.xxx.218)

    글을 참 잘 쓰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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