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저편에 가라앉아 있던 울 딸의 에피소드가 떠올랐습니다.

울 딸 초등학교 사립 나왔습니다.
은평구가 집값도 안나가고, 편의시설도 많이 부족하고 한데,
단 하나 사립학교는 무지 많아요.
선일 예일 은혜 충암, 그리고 은평구는 아니지만 명지 등등...
이중 진짜 사립다운 사립, 말에 좀 어폐가 있네요, 그쵸?,
암튼 사립다운 사립도 있지만 저희 딸이 나온 선일은 공립같은 사립이에요.그만큼 소박했죠.
첨부터 사립 보내려 했던 건 아니고, 저보다 일찍 학부형이 된 친구가 그러네요. 사립 보내라고. 안그러면 학교에서 오라가라 해서 힘들다고, 아마 어머니회에 육성회에 매우 바쁠 거라고...
당시 신문사에서 간부도 아니고, 일 제일 많은 중견기자 시절이라 학비가 많이 드는 건 견딜 수 있어도, 아이 학교에 드나들 시간 내기는 참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선일을 보냈는데, 전 나름대로 참 만족스러웠어요.
아이들을 그냥 평범하게 가르치더라구요.
공립이랑 거의 비슷한 수준인데 다만 한 학급의 아이들이 적어서 선생님의 관심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초등학교 2학년때, 여름방학을 하고 돌아온 우리 딸,
"엄마, 선생님께서요, 산수 문제를 요, 엄마가 매일 10개씩 내서요, 그거 풀어오래요" 하는 거에요.
"방학숙제야?" 했더니 고개를 끄덕여요.
그날부터 퇴근해서 들어가면 열심히 산수 문제를 10개씩 냈어요.
고지식하기는 우리 딸이나 저나 마찬가지라, 미리 몇십개 문제를 내고 미리 풀어도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어요.
그날 그날 즉석에서 문제를 내면 즉석에서 풀고...틀리면 그 자리에서 가르치고...
초등학교 2학년의 산수, 낼 문제가 뭐가 있겠어요?
방학은 아직 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1학기 산수 복습문제는 더이상 낼게 없고...
하는 수 없이 2학기 책을 좀 보자고 했어요.
2학기 책에서 10문제씩 내다보니 방학이 끝나갈 무렵, 거의 2학기 책을 다 떼었더라구요.
물론 개학식에 그 숙제공책 보냈구요.그리곤 잊었어요.
아무리 사립이라도 전혀 학교에 안가볼 수는 없어서 한학기에 1번 정도 선생님 찾아뵙고 상담을 하곤 했는데...
추석을 앞두고 학교엘 가니, 선생님이 절 보고 깔깔 웃어요, 직장다니면서 언제 그렇게 아이 공부는 돌보냐고...
무슨 말인지 몰라서 눈이 휘둥그레 졌더니,
선생님 말씀이, 방학식날 "방학동안 할 수 있으면 엄마랑 산수 10문제씩 풀어보라" 하셨대요.
그런데 울 딸은 반드시 풀어와야 한다고 들은 거죠. 그것도 엄마가 문제를 내서..
그 반에서 딱 2명이 그 숙제를 해왔는데, 울 딸이 더 잘해왔더라는 선생님 말씀.
좀 허무하대요, 퇴근하면서 오늘은 들어가서 또 무슨 문제를 내나 얼마나 고민을 했는데...
걱정도 좀 됐구요, 울 딸 해독력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너무 고지식한건 아닌지...
암튼 그랬는데, 그 방학숙제를 계기로 우리 딸이 산수를 아주 잘하게 됐어요.
눈에 띄게 산수에 취미를 붙이더니, 산수를 좋아하더라구요.
그러더니 고등학교 때까지, 아니 지금도 수학이 제일 편하고 재밌대요.
아~~이게 1989년 일이니까 벌써 15년 전이네요...
"엄마, 민들레 뿌리까지 캐오래요"하면 해가 뉘엇뉘엇 져갈 무렵 차끌고 서오릉쪽으로 나가 민들레 캐오고,
"엄마 표본 만들어야 해요"하면 뭐든 잡으려고 애쓰고...
문방구에 가면 뭐든 살 수 있다는 걸 왜 몰랐나 몰라요.
이렇게 키운 딸, 저 혼자 컸는 줄 아는지, 저랑은 잘 안놀아줍니다...
시집가서 애 낳으면 엄마 생각 좀 해주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