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2일(금)~3일(토)
백무동(함양군 마천면) 버스정류장 오후 1시 도착
산채 정식으로 점심 먹고 2시 산행 시작.
다이렉트로 장터목~천왕봉이 아니라 한신계곡 따라 세석대피소(1박) 거쳐 연하봉~장터목~천왕봉으로.
세석 까진 6.5키로.
백무동(百巫洞)
백명의 무당이 살았다해서 백무(百巫)...가 아니라 '백'이란 많다는 의미.
백무동은 정상 천왕봉 성모사에 모셔둔 성모(聖母)를 주신으로 하는 무당들이 천왕봉 오르는 중간 기착지가 되면서 무당의 집성촌으로 발전된 것.천왕봉의 역사는 곧 무격의 역사.점차 백무동은 팔도 무당들의 본향이 되었고.지금 행정 지명은 백무(白武)로 바뀌었네요.
한신계곡 따라서~
한 스님의 득도 실패의 현장... '가내소(沼)'
한신계곡에서 10년 넘게 도를 닦는 스님이 있었답니다.이쯤이면 득도했다고 생각했고.그 검증현장은 가내소. 외줄 칡넝쿨을 설치하고 칠흙 야밤에 건너기로.드디여 그믐에 외줄을 탔고,다 건넜다 했는데 한 여인이 소 안에서 그렇고 그런 자태로 응시하더라는.순간 스님은 억눌렀던 본능이 꽃을 피웠고...풍덩.
다음날.스님은 혼이 빠진채 '나는 가내! 나는 가내!' 헛소리 해대며 환속했다는.이후 사람들은 이곳은 '가내소'라 불렀고.
조선시대 남아있는 유산기,유람기(산행기)는 1200여편.당시 산수유람 일번지는 당연 금강산.가장 많이 남겨진 유람기도 금강산.다음이 지리산으로 1백편.
그럼 조선 최초의 유람기는??
바로 지리산에 올라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쓴 유두류록(遊頭流錄).그는 42세 지리산 북사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중추절을 맞아 5박 6일 유람.
그 등정 출발 코스는 함양 관아를 나귀 타고 출발 후,용유담~영랑대~하봉~중봉을 거쳐 정상 천왕봉에.그리고 제석봉~장터목~연하봉~촛대봉~세석평전 거쳐 영신봉에 이른 후 영신사에서 1박.하산은 한신능선~한신계곡 따라 백무동으로.이후 김종직의 유두류록은 지리산 산행의 길라잡이 필독서.그래서 이후 조선 후기 산행기를 보면 김종직 관련 언급이 많고.당연히 15,16세기 인기있는 지리산 등정 코스는 북사면인 김종직 코스.
나는 지금 그 김종직 하산길을 거슬러 오르고 있어요.
아래가 백무동.우측 능선 너머가 김종직이 군수로 있었던 함양군.
너머가 세석
5시간만에 저녁 7시 세석대피소 도착해 1박.
세석대피소
아래로 세석의 우물.수량이 무한대로 풍부
이해를 위해 예전 사진 소환!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다.5,6리쯤 넓게 탁 트여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만하였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지리산 일과(智異山日課)-
세석평전(細石平田)
한자에 뜻이 다 들어있네요.예전엔 화전민 마을이 있있고.덕유산의 덕유평전과 함께 1500m 이상의 고지대에 이처럼 아름답고 넉넉한 평원이 있어 지리산을 더욱 좋아하겠죠.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쓴 지리산 일과(智異山日課)에 나온 세석 묘사~~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다.5,6리쯤 넓게 탁 트여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도 놓아져 있다.이것은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마을은 물론,세석평원에 매잡는 관청도 있었다는.
해동청(海東靑)은 조선 매를 일컷는 말.조선매는 몽고에도 널리 알려져 원나라 지배기 때는 주요 조공품.그 전통이 이어져 조선 때도 왕궁,돈 많은 사대부들에겐 인기.이중 가장 뛰어난 매가 지리산 천왕봉 일대서 포획한 매.그래서 지리산 세석평전에 내상군(內廂軍)이라는 매잡이 관청을 두었다는.당연 주민들의 고생은 이루말할수 없었을 터.
저간의 사정을 유몽인은 <유두류산기>에는 이리~
/사당 밑에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잣나무 잎을 엮어 비바람을 가리게 해 놓았다.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매를 잡는 사람들이 사는 움막입니다”라 하였다.
매년 8,9월이 되면 매를 잡는 자들이 봉우리 꼭대기에 그물을 쳐 놓고 매가 걸려들길 기다린다고 한다.
매 가운데 잘 나는 놈은 천왕봉까지 능히 오르기 때문에 이 봉우리에서 잡는 매는 재주가 빼어난 것들이다.
관청에서 쓰는 매가 대부분 이 봉우리에서 잡힌 것들이다.매잡이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치니,어찌 단지 관청의 위엄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 뿐이랴.백성의 온갖 고통이 이와 같은 줄 누가 알겠는가/
앞 봉우리가 영신봉(靈神峰)
한자에서 영적인 게 느껴지죠? 예전엔 영신사라는 절이 있었고.아래로 흐르는 능선이 남부능선으로 청학동,쌍계사에 이릅니다.능선의 골은 대성골,이어 빗점골을 만나 화계천을 만들고 섬진강으로.멀리 노고단 ~반야봉이 보이고.남부능선은 섬진강과 낙동강을 가르는 수계이기도.
김종직 이후 사대부들이 지리산 정상에 오르면 꼭 들르는 코스가 둘 있으니~~
1.화개 쌍계사 뒷 능선 불일암 어드메에 있을 거라고 여긴 청학동.
2.신라말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있는 쌍계사(최치원이 쓴 진감선사 비가 있음).기본코스는 천왕봉을 찍은 후 장터목~연하봉~촛대봉~세석평원 거쳐 이곳 영신사에서 일박.곧 영신사는 청학동 찾아가는 중간 기착지.그 쌍계사로 인도하는 능선길이 영신봉 아래로 흐르는 남부능선이요,그 끝자락에 쌍계사가 있고.
그들은 이곳 영신사에서 일박한 후,어떤이는 주능선 타고 서쪽인 칠선봉,덕청봉,삼각고지로 더 향하다 적당 시점서 빗점골 타고 의신사로 내려갔음.그러나 이 구간은 주능선 코스가 좀 험준해 소수만이 이용.그래서 대다수는 남부능선을 타고 내려오다 아랫 대성골을 걸었고.
쌍계사 도달 이전 중간 기착지로 의신사,신흥사에서 다시 1박 .그래서 영신사,의신사,신흥사를 합하여 삼신(三神)이라 불렀습니다.모두 '神'가 들어가기에.이렇듯 영신사,의신사,신흥사,쌍계사는 지리산 유람 사대부들의 주요 숙식처.
당시 지리산 내 사찰과 암자는 이렇듯 사대부 유람시 숙박시설로,승려들은 가이드가 되었고.심지여 승려들은 사대부들을 실어나르는 가마꾼에, 피리 불고 비파 켜는 악공에,춤추는 무희 역할까지.그래서 등정기가 아니라 유람기,유산기라는.
저 능선이 남부능선.
이쪽은 낙동강,너머는 섬진강으로 흘러감.
세석에 오면 생각나는 '토지'와 '태백산맥'~~~
둘다 지리산이 주무대.태백산맥에는 인물들이 활동하는 지리산의 지명들이 명확히 나오지만 토지에선 언급된 실제 지명이라곤 최참판댁 뒷산에 있는 '고소산성' 하나.저자는 완간 이전까진 평사리를 직접 가본 적이 없었다는 데 하물며 지리산을 올랐을 리는 더더욱 없고(저자의 유,청소년기 생활공간이였던 진주나 통영은 실 지명이 나옴).
그렇다면 김환(구천)이 서희의 엄마 별당아씨와 지리산으로 야반도주할 때 걸었던 루트는? 당연 고소산성~형제봉~삼신봉~영신봉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그리고 그들의 짧은 생활 공간은 남부능선의 끝,이곳 세석평전이 아녔을까 하는 그림도 그려보고.
만약 저자가 조정래처럼 지리산을 오른 경험이 있었으면 당연 세석이 언급 되었을 것이고, 이후 세석은 또하나의 서사를 얻었겠네요.남부능선의 정상이 세석이요,마지막 봉우리가 섬진강으로 빠지는 고소산성.
영신봉
영신봉 축대 흔적들
많은 지리산 산행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인물이 점필재 김종직.
그리고 김종직 하면 곧 조의제문(弔義帝文).
사후 그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 많은 문도들이 죽임을 당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결국 그는 영남사림의 종조가 되었고.김종직의 대표 문도가 김일손,정여창,남효원,김굉필.이들은 스승 자취를 찾고자 하는 열망까지 더해져 지리산을 올랐고.
그리고 김일손(1464~1498)은 속두류록(續頭流錄,1489년)을,남효온(1454~1492)은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1487)를 남깁니다.
이 또한 후대 지리산 유람의 참고 문헌으로 인기.남효온,김일손은 김종직 아래서 동문 수학. 김일손은 26세 때 친구 이기도 한 일두 정여창(1450∼1504)과 함께 등정.남효원은 생육신 한명으로 김시습과 친구로 무려 16일간 지리산을 누볐는데 그는 첫 지리산 종주자!
지금 나에게 지리산 유산기 알파가 김종직이라면 오메가는 유몽인.어우야담의 그 유몽인.
남원부사로 있을 때 지리산 유람 후 유몽인(柳夢寅,1559~1623)은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을.남효원,김일손,유몽인 모두 다 천왕봉 오른 후 이곳 영신사에서 하루밤을.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셋 모두 남부능선,대성골을 타고 화개로 내려갔고.중간 숙소는 당연 의신사 & 신흥사에서,그리고 쌍계사 거쳐 청학동 찾았고.
남부능선 9부에서 바라본 세석평전.
좌 영신봉,우 촛대봉.1500미터가 넘는 고산이여도
물 있고,땅 있고,땔감 풍부하고,움푹 패여 바람 막아주고,관의 수탈서 자유롭고...살만한 곳 맞죠?
일대를 촛대봉에서 보면 아래 사진
창불대 윗봉이 영신봉.너머는 암릉구간.
멀리 지리산 제2봉 반야봉이 보이고.끝이 노고단.
1952년 이곳에서 엄청난 비극의 판이 벌어지는데.......
영원사골, 백무동골, 칠선골, 벽송사골, 조개골, 대원사골, 중산리골, 거림골, 삼점골 등 지리산 일대가 모두 빨치산의 근거지.국군 4개 사단이 지리산을 포위 후 토끼몰이식 공세에 들어 갔고.방식은 대성골 한 곳으로 몰이하는 것.미 B2 폭격기는 하늘에서 폭격을 가하니 대성골은 10여일 간 불바다.이때 사망자만 2천여명.일부 여성 빨치산들은 밀리고 밀리다 다다른게 저 창불대...막다른 길,막다른 인생....연이여 낭떨어지에 몸을 던지니 후대는 이를 자살바위라.
그리고,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9월 빗점골에서 최후.
칠선골,백무동,조개골에서 경남 유격대를 이끈 이영회는 11월 천왕봉 아래서 교전 중 사망.
54년 1월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는 비트가 발각되자 수류탄 자폭.
2월 경북 봉화 출신으로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한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은 반야봉의 한 동굴에서 동료 빨치산이 쏜 총에 의해 사망.
4월 전남 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는 백운산에서 군경에 의해 사살.
얼어 죽고,굶어 죽고,총에 맞아 죽고,마지막엔 불타 죽고....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그렇게 잘려 갔습니다.
세석은 사통팔달~~
정상 가려는 자 장터목으로,
북쪽 마천으로 하산하려는 자 백무동으로,
화개로 가려는 자 의신마을,청학동으로
중산리로 가려는 자 거림마을을 선택하면 됩니다.
난 정상이니 촛대봉으로~~
비 내리는 촛대봉(1703)
4시쯤 일어나 보니 비는 내리고.건너 보이는 봉우리가 영신봉.그러니까 세석평전은 두 봉우리 사이.
촛대봉서 동쪽을 보니 천왕봉이 보이고
대피소서 산 3천원 짜리 우비를 걸치고 빗길을 걷습니다.당연 오리가 무중.핸드폰으로 찍기도 힘들고.
촛대봉으로 이름이 굳혀진 과정을 보면 '언어의 사회성'이란 걸 생각하게 되는 데,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는....甑峰(증봉,증은 떡시루) ,
1487년 추강 남효온..... 賓鉢峰(빈발봉..밥그릇),
1611년 어우당 유몽인.....獅子峯( 사자봉 ),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에는.....중봉(中峰),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에는....燭峯(촛대봉).
송병선 이후 촉봉이 촛대봉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다음은,무명산이 작명되는 생생 현장으로 어떻게 이름을 얻는지 유추할수 있다는~~
/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었다.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천왕봉)과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그러자 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구름에 쌓인 천왕봉
연하봉 거쳐 천왕봉 가는 주능선.연하선경(烟霞仙境)은 촛대봉~장터목 까지 3키로.
|
바람난 여인 얼레지가 지천.
정말이지 세석서 천왕봉 까지 5키로 풀섶은 얼레지 카페트.
뒤돌아 보니~
중앙 봉우리가 영신봉.영신봉 앞 완만한 U자가 세석평전.왼쪽 끝이 촛대봉.우측 계곡이 어제 올라왔던 한신계곡.
예전 사진으로 보면 보다 명확
좌 촛대봉~세석~우 영신봉.
우측이 한신계곡.
연하선경(烟霞仙境)의 하일라이트
운무 덮힌 능선에 동에서 해가 떠오르던가,서쪽으로 노을이 지면 연하의 선경이 되겠죠.촛대봉~장터목까지 3키로 구간.지리 10경 중 으뜸으로 치는 이가 많습니다.김종직도,김일손도,정여창도,남효원도,유몽인도 천왕봉 오른 후 이 연하선경을 지나 세석으로 갔습니다.그런데 여름 야생화 절정인 8월이면 능선길이 야생화 화원으로 변신.
예전 사진(2019년 8월)으로 확인해보죠.
아래 6장.
일월비비추
주황은 동자꽃
조선 조 가장 많은 산을 유람한 이는 누굴까?
어우당 유몽인(1559~1623)!!
호가 어우당이라 야담집 이름도 '어우야담'
유몽인이 산천을 주유하다 들었던 이야기를 자기 버전으로 재해석한 것.먼저 유두루산록 도입부를 보죠.
/아, 나는 성품이 소탈하고 얽매임을 싫어하여 약관의 나이부터 산수를 유람하였다.벼슬길 전에는 삼각산(三角山)에 머물며 아침 저녁으로 백운대(白雲臺)를 오르내렸으며,청계산(淸溪山)∙보개산(寶盖山)∙천마산(天摩山)∙성거산(聖居山)에서 독서하였다.사명(使命)을 받들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팔도를 두루 돌아다녔다.청평산(淸平山),한계산(寒溪山),설악산(雪嶽山)을 유람하였다.봄∙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의 구룡연(九龍淵),비로봉을 구경하고 동해에 배를 띄우고 내려오며 영동(嶺東) 아홉 군의 산수를 두루 보았다.그리고 적유령을 넘어 압록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을 지나
험난한 장백산(長白山)을 넘어 파저강(波豬江),두만강(豆滿江)에 이르렀다가 북해에서 배를 타고 돌아왔다.또 삼수(三水),갑산(甲山)을 다 둘러보고, 혜산(惠山)의 장령(長嶺)에 앉아 저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았다.명천(明川)의 칠보산(七寶山)을 지나 관서의 묘향산(妙香山)에 올랐으며,발길을 돌려 서쪽으로 가서 바다를 건너 구월산에 올랐다가 백사정에 이르렀다.중국에 세 번 다녀왔다.요동부터 북경까지 그 사이의 아름다운 산과 물을 대략 보고 돌아왔다./
이 정도면 요즘 유행인 '블랙야크 100산' 첫 완등자는 어우당 유몽인.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건 북한산 백운대를 아침 저녁으로 올랐다는 구절.이게 바로 최초요 최고 야담집으로 평가받는 '어우야담'이 탄생하게된 밑바탕이였겠죠.발로 쓴 어우야담이라는.
그런 산 사나이 유몽인에게 지리산의 의미는?
/나는 일찍이 땅의 형세가 동남쪽이 낮고 서북쪽이 높으니,남쪽 지방산의 정상이 북쪽지역 산의 발꿈치보다 낮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또한 두류산이 아무리 명산이라도 우리나라 산을 통틀어 볼 때 풍악산(금강산)에 집대성이 되니,바다를 본 사람에게 다른 강은 대단찮게 보이듯 이 두류산도 단지 한주먹 돌덩이로 보였을 뿐이었다.그런데 이제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보니 그 웅장하고 걸출한 것이 우리나라 모든 산의 으뜸이었다./
그동안 모든 식자들이 그랬듯 금강산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지리산 정상에 올라보니 지리산이야 말로 최고란 것.심지여 중국 대 문장가들을 소환하며 지리산 위대함을 설파합니다.
/......지리산은 문장의 사마천이요, 시의 두보다/
김종직에 있어 지리산도 어우당과 같았어요.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옥검(玉牒玉檢)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 하였을 것이고,아니면 의당 무이산,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
지리산을 황제가 재를 올린다는 오악 중 하나인 숭산,태산의 반열에 지리산을 올려놓고 있다는.
여기서 중요 포인트.이들에겐 왜 두류산(頭流山) 이었을까?
조선시대엔 지리산을 주로 두류산으로 불렸어요.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조선의 최고봉은 백두산.김정호 대동여지도엔 백두산을 아예 지존이 사는 하늘 처럼 그려놓았고.그 백두산(頭)이 흘러흘러(流) 최종착지가 바로 頭.流.山.이렇게 두류산이라는 이름에서 조선시대 식자층들이 같고 있던 조선 산수에 대한 인문지리적 사고를 엿볼수 있다는.한반도 산들은 할아버지 산인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그 맥들의 총합.
이러한 지리관은 조선 후기 여암 신경(1712~1781)이 쓴 산경표(山經表)에 집약.그는 한반도를 1개의 대간과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조선의 산줄기를 분류.그리고 그 대간(백두대간)의 대단원이 바로 지리산이라는 것.
뫼재비꽃
고산서 자라고.높은 산에 자라는 제비꽃이라는 뜻
진범
한여름 이렇게 꽃을 피웁니다
운탄고도 두위봉에서
연하봉
그럼 지금까지 빗속을 힘들게 걸었던 촛대봉에서 이곳 영신봉 까지....나아가 천왕봉까지...우주정거장(영신봉 직전 칠선봉)에서 지구를 내려다 보듯 그런 뷰는 없을까?
아래 사진~~
멀리서 보면 인생은 희극이라는 데 촛대봉~연하봉(가운데 뽀쪽)~장터목(V홈,장터목 대피소가 보이고)~제석봉~천왕봉 라인이 참 평화롭고 낭만이 넘치네요.
소나무 보이는 우측 하단 골이 어제 올랐던 한신계곡.
장터목이 가까워지고.
아래로 거림골,왼쪽이 중산리,너머가 진주시.
넘으면 장터목
유몽인(柳夢寅,1559~1623)하면 어우야담(於于野談).어우당은 유몽인 호.최초 설화집 어우야담에는 귀신부터 사대부,장삼이사들의 삶이 있는 그대로 담겨져 있고.황진이와 이사종의 3년+3년 계약결혼 이야기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의 지리산 유람기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도 그런 자유분방한 성향이 잘 드러나고.당대 최고 문장가 답게 유려한 필치의 지리산 묘사(최남선의 심춘순례처럼)와 감상이 압권.시 짓고 술마시고 기생들과 유희를 즐기는 풍류도 고스란히.김종직,김일손,남효원의 유람기에는 성리학적인 사고가 유람 내내 드러나지만 유몽인은 훨 자유인이라는.풍류를 넘어 엇나간 인생을 내비치는데 무었보다도 특히 지리산의 위대함을 간파합니다.
유몽인은 천왕봉을 오른 후 장터목 인근 향적사에서 일박하고 바로 연하선경,지금 이 능선을 밟으며 촛대봉으로 향합니다.유몽인은 이때 수능에 나올법한 사변을 하나 하는데 다음은 그에게 있어 인생사란~~
/일찍 향적암을 떠났다.고목 밑으로 나와 빙판길을 밟으며 허공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고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앞서 가는 사람은 아래에 있고 뒤에 가는 사람은 위에 있다.즉 벼슬아치와 선비는 낮은 데 위치하고 종들은 높은 데 위치하게 되었다.그러니 선비는 공경할 만한 사람인데도 내 신발이 그의 상투를 밟고,
업신여길 만한 자(종)인데도 내 머리가 그의 발을 떠받들고 있으니, 세간의 일이 다 이 행차와 같구나./
인간사란게 높다고 하는 것이 늘 높은 것이 아니고,낮다고 하는 것이 항상 낮은 것이 아니며,경우에 따라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장터목 직전 석장승 둘.
하나는 몸채가 잘렸고.
장터목 대피소(1653m)
지리산서 가장 먼저 생긴 산장(대피소)
봄가을 장(場)이 섰기에 장터목.
제석봉 (1806m)과 연하봉 (1730m) 사이에 형성된 널찍한 고갯마루.산청의 덕산 주민들,그리고 함양의 마천, 남원의 산내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곳 .
산청 쪽 주민들은 중산리 계곡의 상류인 법천계곡을 따라, 함양이나 남원쪽 주민들은 백무동계곡을 따라 올라왔고.장터목의 해발 높이는 1653m. 당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선 장터.
장터목서 아점 해먹고 배낭은 그대로 놔둔채 천왕봉으로 향합니다.1.5키로.일대는 야생화 천국.강풍에 비까지 내려 산길은 한적 자체.
제석봉 일대.
5월 초인데도 영상 8도로 겨울 분위기
8월이면 이리 변합니다(예전 사진 4장)
아래는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서 재석봉 일대 묘사~~
/산등성이를 따라 천왕봉을 가리키며 동쪽으로 나아갔다.사나운 바람에 나무들이 모두 구부정하였다.
나뭇가지는 산 쪽으로 휘어있고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 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있는 것 같았다.껍질과 잎만 있는 소나무,잣나무는 속이 텅 빈 채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가지 끝은 아래로 휘어져 땅을 찌르고 있었다. 산이 높을수록 나무는 더욱 작달막하였다.산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푸른빛과 어우러져 있었다.이곳에 오니 꽃나무 가지에 아직 잎이 나지 않고, 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쫑긋 내밀고 있었다./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 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있는 것 같았다./
/가지에 아직 잎은 나지 않고,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쫑긋 내밀고 있었다/
익숙한 문장들인데 원작자는 유몽인인듯.실경 묘사가 타 유람기하곤 차원이 다릅니다.
뒤돌아 보니.
아래 V가 장터목.뒤로 연하봉.연하봉 뒤로 뾰쪽 촛대봉.우 멀리 운무 속 반야봉.좌 멀리 광양 백운산.노고단~반야봉~천왕봉 까진 25키로.
원래는 성삼재~노고단~세석~천왕봉~중봉~대원사까지 성대종주 예정이었으나 4월 말 영남지역 산불로
대피소 예약이 취소되었고 그 대안이 바로 어제 오늘 단축 산행.
정상.
우측 아래는 하산할 중산리.
중산리가 보이고
제석봉(1808m)은 천왕봉의 위성봉.제석단(帝釋壇)을 만들어 제를 올렸고.
베트멘 바위
머리 위까지 올라갈수 있는데 위에 서서 찍으면 사진은 예술이 됩니다.
중앙 멀리 보리암의 남해군 금산(700)이 보이고
통천문
각자 보이시죠?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등 옛 유산기에도 자주 등장하는 각자.
/의문∙일경 선사와 함께 향적암에서 상봉(上峰)으로 올라갔다.구름에 덮이고 바람에 깎여 나무는 온전한 가지가 없고 풀은 푸른 잎이 없었다.무서리가 내리고 땅이 얼어 날씨는 산 아래보다 곱절이나 추웠다.구름사다리와 석굴은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올 정도였다.
우리는 그곳을 지나 드디어 상봉에 올랐다./
-남효온 (1452~1492) 지리산 일과(智異山日課)-
저 위가 정상
여전히 비는 내리고 얼마나 바람이 드센지 난간을 두손으로 꽉 붙잡고.이런 강풍은 평생 처음.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사람은 바람에 날닐 정도
정상석을 두손으로 핸펀을 붙잡고 찍습니다.등산인의 속어 대로 시야는 완전 곰탕
請看千石鐘 ( 천간천석종 )
非大叩無聲 ( 대비고무성 )
萬古天王峰 ( 만고천왕봉 )
天鳴猶不鳴 ( 천명유불명 )
/천석이나 되는 종/
/크게 쳐야 소리 나는데/
/만고의 저 천왕봉/
/하늘이 쳐도 울리지 않는다네/
-남명 (南冥) 조식 (曺植, 1501~72)-
천왕봉...하늘이 쳐도 울리지 읺을 정도로 장대하답니다.조식은 지리산 남사면 덕산 산천재에 기거하면서 천왕봉을 12번 올랐다는 기록이 있고.
천왕봉에 올라 감회가 없는 자는 없겠죠
다음은 4백년 전 유몽인 토로한 소회~~~
/지금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면면이 4천리나 뻗어왔다.그리고 그 웅혼한 기상이 남해에 이르러 엉켜모이고 우뚝 솟아나 열두 고을이 주위에 둘러 있고, 사방의 둘레가 2천리나 된다.
1.안음(安陰)과 장수(長水)는 그 어깨를 메고,
2.산음(山陰)과 함양(咸陽)은 그 등을 짊어지고,
3.진주(晉州)와 남원(南原)은 배를 맡고,
4.운봉(雲峰)과 곡성(谷城)은 허리에 달려 있고,
5. 하동(河東)과 구례(求禮)는 그 무릎을 베고,
6.사천(泗川)과 곤양(昆陽,현 남해군)은 발을 물에 담그고 있다.그 뿌리에 서려 있는 영역이 영남과 호남의 반 이상이나 된다./
지리산 정상에서 발 아래로 펼쳐진 세상을 논하는 글 중 이보다 더 문학적이고 서사적인 글은 없을 듯.한발 더 나아가 중국 대륙에 비유해 두류산의 위대함을 칭송합니다.
/두류산은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두보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는 문구가 있는데,그 주석에 ‘방장산은 대방국(帶方國) 남쪽에 있다’고 되어있다.지금 살펴보건대, 용성(龍城)의 옛 이름이 ‘대방’이다.그렇다면 두류산은 곧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진시황과 한무제는 배 타고 바다 건너 삼신산을 찾게 하느라 쓸데없이 공력을 허비했는데,우리들은 앉아서 구경할 수 있다./
진시왕이 그리 찾으려 했던 방장산이 바로 지리산으로 우린 앉아서 구경하는 홍복을 누리고 있답니다.지리산은 동서 50㎞,남북 32㎞, 둘레 320 ㎞로 딱 제주도와 비슷한 규모.
/승려가 가리키며 이름을 대는 대로 따라 보았다.동쪽을 바라보니 대구의 팔공산과 현풍의 비파산(琵琶山,현 비슬산)과 의령의 자굴산과 밀양의 운문산(雲門山)과 산음(山陰)의 황산(黃山)과 덕산(德山)의 양당수(兩塘水)와 안동의 낙동강이 보였다.서쪽을 바라보니 무등산은 광주에 있고, 월출산은 영암에 있고, 내장산은 정읍에 있고,운주산(雲住山)은 담양(潭陽)에 있고, 변산(邊山)은 부안(扶安)에 있고,금성산(錦城山)과 용구산(龍龜山)은 나주에 있었다.
남쪽으로 소요산(逍遙山)을 바라보니 곤양(남해군)임을 알겠고,백운산(白雲山)을 바라보니 광양임을 알겠고,조계산(曺溪山),돌산도(突山島)를 바라보니 순천임을 알겠고,사천 와룡산(臥龍山)을 바라보니 동장군(董將軍)이 패한 것이 생각나고,남해(南海) 노량(露梁)을 바라보니 이순신이 순국한 것에 슬퍼졌다.
북쪽으로는 안음(安陰)의 덕유산과 전주의 모악산(母岳山)이 하나의 작은 개미집처럼 보일 뿐이었다.그 사이에 큰 아이처럼 조금 솟구친 것이 성주의 가야산이었다.삼면에 큰 바다가 둘러 있는데,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 큰 파도 속에 출몰하고 있었다.그리고 대마도의 여러 섬은 까마득히 하나의 탄환처럼 작게 보일 뿐이었다.
아, 이 세상에 사는 덧없는 삶이 가련하구나.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 죽는 초파리 떼는 다 긁어 보아도 한 움큼도 채 되지 않는다.인생도 이와 같거늘..../
산들을 꿰뚫고 있네요.남해 노량 앞바다를 보면서 이순신 전사를 애석해 하고(유몽인은 임진왜란 세대), 대마도도 언급.김종직도 정상에서 대마도를 얘기하는 데 당시 식자층에서는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는.
다음은 김종직이 언급한 대마도~~.
/아래 산들이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용호(龍虎) 같기도 하며,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그 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그리고 계립령(鷄立嶺)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 창공에 널리 퍼져 있고,대마도(對馬島) 이남으로는 신기루가 하늘에 닿아 있어,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정상의 각자들
天柱.. 천왕봉은 하늘의 기둥이라는.
일월대...천왕봉은 일출 명소라는
성모상을 모시던 성모사(聖母祠) 터.
지리산을 이해하는데 있어 키워드가 몇 있는데 그 중 핵심은 성모사와 성모상.
성모는 석가의 어머니로 마야부인(摩耶夫人).그런데 성모는 시대 따라 바뀌고.고려 때는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신라 때는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지리산의 역사,문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모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천왕봉에 모셨던 성모상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지리산 산신(神)의 주인공은 시대적으로 마고,노고를 시작으로 선도성모,위숙왕후,마야부인으로 이어집니다.
통일신라 때는 노고단에 남악사를 짖고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산신으로 모시고 제사를.신라 말 송도의 한 여인이 천왕봉에 올라 재를 올리고 낳은 인물이 태조 왕건.이후 고려는 노고단을 떠나 천왕봉에 성모사를 짖고 관료를 파견해 매년 제를 지냈다는.
불교가 융성하면서 그 자리는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으로.이렇게 새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개국한 왕의 어머니는 지리산 산되으로 숭상될 정도로 지리산의 위상이 절대적이였다는.
마고,노고,선도성모,위숙왕후,마야부인 까지.이렇듯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요 여신의 산.모든이를 품어주는 지리산의 넉넉함이 여신을 상주시켰고.
당연 무속인들을 넘어 백성들에게도 천왕봉 성모사는 신성한 곳.천왕봉에 오른 이는 너나할거 없이 성모상에 진설하고 제문을 읽으며 소원을 빌었고. 아래 백무동은 천왕봉 성모를 친견하기 위한 베이스 캠프 역할의 집성촌이 되었다는.
성모사 터를 전체적으로 보면 아래(2010년 사진)
천왕봉에 오른 이는 너나할거 없이 성모상에 진설하고 제문을 읽으며 소원을 빌었습니다.5백년 전 천하의 김종직도 그랬네요.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이리~~~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맑게 해달라고 외쳤다.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그리고 성모사에 들어가 하루밤을 잡니다.
/네 사람이 사내(祠內)에서 서로 베개삼아 누웠노라니,한기가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중면(重綿)을 껴입었다.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그리고 몇년 뒤 제자 김일손이 성모사에 들어 오는데~~~
/저물녘에 정상에 올랐다.정상에는 한칸의 작은 판잣집(성모사)이 있었다.안에는 돌로 된 부인상(婦人像)이 있는데,이른바 천왕(天王)이었다.들보에는 지전(紙錢)이 어지러이 걸려있었다.또, 김종직(金宗直) 계온(季昷),유호인(兪好仁) 극기(克己), 하산(夏山) 조위(曺偉) 태허(太虛)가 임진년(1472) 중추일에 함께 오르다.” 라고 쓴 몇 글자가 있었다.차례로 훑어보니,당대 걸출한 사람들이 많았다./
성모사 대들보,기둥 등엔 다녀간 사대부들의 제명이 널려있었고,스승 김종직 이름도 확인하고는 감격해 한 것.당시 사대부들은 산수를 유람하면서 바위에는 각자하고,암자 대들보 등엔 제명(이름을 적음)하고,
정자,누각엔 자신의 시나 소회를 나무에 새겨 현판으로 걸어 놓은 걸 즐겼습니다.
그리고 김일손도 스승 김종직처럼 성모사에서 일박하는데~~~
/겹으로 된 솜옷과 두터운 이불을 덮어 몸을 따뜻하게 하였다.따라온 사람들은 사당 앞에 불을 지펴놓고 추위를 막았다.한밤중이 되자 천지가 맑게 개어 온 산하가 드러났다.골짜기의 흰구름이 마치 바다에서 조수가 밀려와 온 포구에 흰 물결이 눈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듯하였다.드러난 산봉우리들은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같았다.사방을 둘러보니 마음과 정신이 모두 늠름하고 몸은 아득한 태초에 있는 듯했다./
스승도 제자도 사당 안에서 자고 노비등은 밖에서 불피고 뜬눈으로 보냈다는.시절은 스승은 가을,제자는 봄.특이한 것은 김일손도 성모사에 들어가 재를 올리려고 제문까지 완성했으나 성리학자의 본분 운운하며 포기했다는 것.
그리고 아침에 해돋이를 보는데,
/맑은 하늘에 잘 닦은 구리 거울 같은 해가 솟아올랐다.사방으로 저 멀리 눈길 닿는 데까지 바라보니, 뭇 산은 모두 개미집처럼 보였다.산의 동남쪽은 옛 신라의 구역이고,산의 서북쪽은 옛 백제의 땅이다.앵앵거리며 날아다니는 모기들이 독 안에서 생겼다 사라지는 것같이,처음부터 꼽아보면 얼마나 많은 호걸들이 이곳에 뼈를 묻었겠는가?/
김일손도,유몽인도 독안에 든 파리의 삶을 들며 인생의 덧없음을 얘기했다는.
생육신의 한 사람 남효원(南孝溫) 어땠을까~?
그는 김시습과 가깝게 지냈고.그의 유람기에서는 두류산이 아닌 지리산으로 지칭.다음은 남효원의 '지리산 일과(智異山日課)' 중 성모사 부분~~
/그리고 천왕상(天王像)을 보았다.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분은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倻夫人)입니다.이 산의 산신령이 되어 이 세상의 화복을 주관하다가,미래에 미륵불을 대신하여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그의 말이 어찌 황당하던지 문헌상의 근거가 없는 말이었다.나는 사당 모퉁이 석각(石角)에 앉았다.사방은 엷은 구름마저 다 걷혀 산과 바다를 두루 볼 수 있었고,전라도와 경상도가 내 발아래 있었다/
다음은 유몽인의 <유두루산록>에서 성모사 부분인데 성모사를 찾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는~~~
/드디어 지팡이를 내저으며 천왕봉에 올랐다.봉우리 위에 판잣집이 있었는데 바로 성모사였다.사당 안에 석상 한 구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흰옷을 입힌 여인상이었다.이 성모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고려 태조의 어머니가 왕을 낳아 길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제사를 지냈는데,그 의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당시 성모사는 민간신앙의 절대적 성지 같은 곳.이 높은 데 까지 신도들이 줄을 이어 여인숙 같은 숙박업이 있었으니.
유몽인 <유두루산록>엔 이리 묘사하고 있다는~~~.
/영남과 호남에 사는 사람들 중에 복을 비는 자들이 이곳에 와서 떠받들고 음사로 삼았다.그래서 옛날 초나라,월나라에서는 귀신을 숭상하던 풍습이 생겨났다.원근의 무당들이 이 성모에 의지해 먹고산다.이들은 산곡대기에 올라 유생이나 관원들이 오는 지를 내려다 보다가,관원이 오면 토끼나 꿩처럼 흩어져 숲 속에 몸을 숨긴다.유람하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가, 이들이 하산하면 다시 모여든다.봉우리 밑에 벌집 같은 판잣집을 빙 둘러 지어놓았는데,이는 기도하러 오는 자들을 맞이하여 묵게 하려는 것이다.짐승을 잡는 것은 불가에서 금하는 것이라 핑계하여,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소나 가축을 산 밑의 사당에 매어놓고 가는데,무당들이 그것을 취하여 생계의 밑천으로 삼는다.그러므로 성모사,백모당,용유담은 무당들의 3대 소굴이 되었으니,참으로 분개할 만한 일이다./
당시 천왕봉에서의 일상이 그림처럼 펼쳐지네요.
놀랍게도 천왕봉 주변으로 판자집 여인숙이 있었고.
나아가 천왕봉 아래 북사면에 백무동이라는 무당 집성촌이 탄생하게 된 저간의 상황을 알수있고.
강풍에 정상을 벗어나기 힘들어 한동안 암릉에 의지해 있다 장터목으로 하산 후 놔둔 배낭을 챙기고 중산리로 하산합니다.
여전히 안개비는 내리고
1시간 지나 비가 거치니 시야도 정신도 맑아지고
살구빛 피부가 너무나 고운 거제수나무
하산길은 법천계곡을 따라
5월 초임에도 겨울과 봄의 상존
자작나무 처럼 거제수도 표피가 쉽게 벗겨지는데 예
전에 연애편지지 용도로.등산로 변이라 손쉽게 손바닥 크기 정도의 표피를 뜯어내보니 질적으로 편지지와 별반 차이 없네요.질감도 촉감도 너무 좋고.
아랫쪽 더운 공기가 산위 찬공기를 만나니 수증기가 응결해 운무를 만들고는 빠르게 밀려오고.
향기 좋은 말채나무 꽃.
예전 줄기를 말의 채찍으로 사용했음.
함박꽃나무
비목나무 꽃
비목이 꿈을 꾸는지...꽃인듯 새싹인듯.
재질이 균질해 조각재로 많이 사용.
꽃과 연둣빛 새순이 구별되나요?
다래와 교목의 생존 투쟁 중 다래의 사망.
전체적으로 보면~
넝쿨식물인 다래는 교목의 가지 사이를 비집고 감아오르다 두 가지에 끼였고.교목이 더 성장하면서 압사.궁금해 계곡으로 내려가 확인해 봅니다.외형으로는 살아있는 모습인데...사망 진단서 발급.
다래와 키위는 친척.
살어리 살어리랏다.청산에 살어리랏다.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청산별곡>의 그 다래
설악 12선녀탕계곡의 다래
뉴질랜드 과일 키위는 다래 개량종으로 키위,다래 원산지가 동아시아.손마디 만한 대래를 잘라보면 단면이 키위와 똑같아요.
중산리 도착
지금은 도로가 뚫리고 위락시설이 들어서 그렇치 예전엔 심산유곡.중산리 고도만도 600미터.천왕봉서 발원한 법천계곡은 중산리 직전서 중산리계곡으로 불리다,중산리를 지나면서 시천이라는 이름을 얻음.
시천을 한자로 옮기면?? '矢川'
'화살같이 빨리 흐르는 하천'이라는.그래서 일대의 행정명도 시천면.천왕봉~중산리 코스가 워낙 경사가 심하다 보니 물의 흐름도 순식간이라는.그러니 중산리로 하산할 때는 반드시 무릅보호대를 차야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시천은 시천읍에서 대원사 계곡서 흘러오는 덕천강을 만나 진주 남강으로 빠집니다.
오후 3시 중산리 도착.
좌 정상 쪽은 구름에 쌓였으나 중산리는 해가 비취고.
2019년에는 5월,8월 두번 지리산 종주를 했어요.그때 남긴 산행기의 글, 특히 사진은 새버전으로 일부 재활용했고.우중 산행이라 사진을 별로 못찍었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