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려 온 북한강과 강원도의 금대봉 기슭,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강 물줄기가 합류하는 지점을 말하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한자로는 《양수리兩水里》라고 말하는데 양수리에서도 옛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
장소를 가리키는 곳이지요.
한 줄기의 강물이 유장하게 흐르는 곳조차 아름답고 절절한 사연이 깊은 곳이거늘,
이곳에는 특별히 두 강물이 만나 하나로 합쳐져서 흐르기에, 자연미를 넘어 그
상징적인 의미와 생태학적으로도 더 말할 것이 없는 소중한 한국의 자연유산입니다.
그런데, 서울 근교 중 가장 아름다운 풍광이 있어 시민과 향토민들에게 사랑을 받아
온 이곳이 4대강 사업의 종결지, 마무리 공사를 앞두고 훼손될 급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네요. 대다수 의식 있는 국민들이 알고 있듯이 4대강 사업은 친환경적인
<국책사업>이 아니라 자연을 담보로 한, 특정인들과 거대한 토건세력의 <이권사업>
이기에 우리가 분노하고 있는 것이지요.
도대체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는, <나쁜 디자인>을 밀어붙이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두물머리> 새벽의 장관을 사진에 담는 사람들 ―
머지않아 사라질,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요.........
<두물머리>에서 바라본 강 건너 풍경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 중, 강물에 관한 이야기 ―
마침 우기雨期여서 강물이 불어나 무서운 소리를 내며 힘차게 흘러
가고 있을 때, 싯다르타가 이렇게 말했다.
“이보세요, 친구, 이 강은 아주 많은 소리를 갖고 있지요,
그렇지 않나요? 이 강은 왕의 소리,
전사戰士의 소리, 황소의 소리, 야조夜鳥의 소리,
임산부의 소리, 탄식하는 사람의 소리, 그리고 그밖에도 수 천 가지의
소리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요.
강의 소리 속에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소리들이 다 들어 있지요.”
이제 그들에게는 그것이 단순히 물소리가 아니라, 생명의 소리요,
현존하는 것의 소리이자 영원히 생성生成하는 것의 소리였다..........
(박병덕 옮김)
문명 이전의,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어느 부족에게 전승된 말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아니라
다음에 오는 자손으로부터 빌려 온 것이다.”
<두물머리> 앞에 예쁘게 떠 있는 아기섬
<두물머리>의 물안개
특히 늦가을이나 초겨울 아침에 이런 물안개의 장관이 펼쳐진다고 합니다!.........
한강물 흘러 흘러 그치지 않고
삼각산 높고 높아 끝이 없는 곳.
강산도 십 년이면 바뀐다지만
이 무리들 못된 짓은 그칠 날 없네.
정직한 자, 그 어느 곳에 몸 붙일 건가.
외로운 난새는 깃털이 연약해서
가시밭 험한 길을 견딜 수 없네.
돛단배 타고 바람 부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아득히 서울을 떠나려 하네.
...............
다산 <정약용 시선詩選>에서
<두물머리> 근처의 연꽃 공원: <세미원洗美園>
“물을 보면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 (觀水洗心 觀花美心)의 줄임말
양수리 인근 운길산 수종사의 다실
<삼정헌>
: 찻값은 무료입니다.
수종사
<삼정헌>
다실의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양수리 풍경
<두물머리> 인근의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택 <여유당與猶堂>: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1925년 대홍수 때, 큰 피해를 입어 원래의 집터에 1975년에 다시 복원한 집입니다.
개인적으로 일과 공부가 막혀 답답할 때마다 가끔씩 둘러보는 곳인데요, ‘고난의 삶’
속에 학문의 뜻을 이룬 다산 선생의 일생에서 위로를 받기도 한답니다.
여유당與猶堂은 <도덕경> 15장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가져온 것으로,
18년간의 긴 유배에서 돌아온 다산 선생은 여(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 하고>
유(猶)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와 당堂자를 붙여 생가에 <여유당>이라는
당호 현판을 걸었다고 하는군요.
1818년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스스로 자신을 살피고, 세상을 두려워하고 조심스럽게
살아가고자 하는 수신修身과 처세의 의미가 담겨있는 걸로 보입니다.
다산茶山 선생과 부인인 풍산 홍씨의 합장묘: <여유당> 뒷산에 모셔져 있습니다.
정약용(1762∼1836) 선생은 관직생활 18년, 유배생활 18년, 고향에 돌아오셔서 18년을
사시며 <실학> 완성에 온힘을 쏟으셨습니다. 만일 개혁군주 정조 임금이 장수하셔서
정약용을 비롯해 당시 남인계 인재들을 통한 ‘개혁정책’이 온전히 실현되어 성공했다면
한국 근대사는 확 달라졌겠지요.(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역사도 없었을 것임)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 중심권에는 온갖 탐욕의 무리들이 들끓어 나라의 곳간을
탕진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우리는 사물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깨어 있는 시각으로 시대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하고, 활짝 눈을 떠야합니다.
또한 맘몬(Mammon: 바이블에서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획득한 돈이나 부를 말함)에게
영혼을 내주지 않는, 그러한 <자기원칙>을 지킬 줄 아는 게 현대인의 덕목이 아닐까요?
“인간은 선하게 사는 것보다 ‘깨어 있는 정신’ 으로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평소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삶이 저에게 가르쳐 준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착함’보다는 ‘깨어 있는 정신’을 더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만일 대중이 깨어 있었더라면, 이 시대의 참혹한 ‘현실’은 없었거나 덜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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