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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할머니와 동치미를~!

| 조회수 : 2,653 | 추천수 : 5
작성일 : 2004-01-05 23:09:17
먹는 얘기는 하나도 못해왔던 인우둥, 오늘은 잠깐이나마 먹는 얘기를 해보려합니다. ^^
낮에 방에서 우풍 때문에 장갑을 끼고 컴을 좀 만지고 있었는데
밖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요.
또 뭔 일을 벌이시나 나가봤더니 커다란 고무통을 죄 뒤집어 썩은 배추를 골라내고 계신 인우둥의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가 살림을 못하시고부터 간신히 밥만 끓여먹고 개밥이나 챙겨줄 줄 알았지 어디에 뭐가 있고 무엇을 정리해야하는지 전혀 몰랐는데, 가을에 거둬들인 배추가 거반 다 썩어서 그냥 밭으로 갖다버렸답니다. 두어 개 좀 성한 것은 속고갱이를 씻어 쌈싸먹으려고 두고 좀 시들해지려는 무는 동치미를 담그기로 의견일치!
이렇게하야 방안에서 동치미 담그기에 돌입했지요.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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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절이기만 하고 양념은 내일 하는 거래요. ^^


할머니와 마주 앉아 칼을 맞잡고(?) 동치미무를 써는데
"칼 쓰는 솜씨가 좋구나."
칭찬 한 마디에 어깨가 으쓱!
"너무 얇게 써는 건 아닐까요?"
확인사살!
"아냐, 얇아야 간이 잘 배고 아작아작하지."
크흐흐흐~ ^^

무 하나는 남겨서 채를 쳐서 채짠지(무생채)를 했습니다.
벌겋게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만든 무생채 나물로 점심도 저녁도 써억썩 비벼 먹었답니다.
부엌이 아닌 방안에서 할머니랑 마주 앉아 칼질(?)을 하니까
새록새록 따뜻하고 행복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카가 있어서 그 정겨움을 담아봤으면 좋으련만
요새 디카를 하나 알아보고는 있는데
시골이라 인터넷만으로 정보를 모으고 실물을 못 보니 도대체 진전이 없군요.
중고라도 하나 살까 하는데 자꾸 미루게 됩니다.

맞칼질(?)을 하고난 오후에는 할머니께 동화책을 읽어드렸습니다.
할머니는 아침에 꼭 보시는 드라마 '찔레꽃'보다 더 재밌다 하십니다.
아무렴, 얼마나 좋은 책인데요. 저는 할머니가 좋아하실 줄 알았다니까요.
임길택 선생님의 '산골 마을 아이들',
권정생 선생님의 '점득이네'와 '몽실언니'를 갖다놓고
고르시라고 했더니
'몽실언니'부터 고르셨습니다.
저도 그거부터 읽어드리고 싶었는데 제 맘을 아셨나봐요.
한참 전에 인우둥이 중학생일 때
'오싱'을 읽어드린 적이 있는데 조금만 읽어드리면 조시는 바람에 1권도 다 못 읽어드렸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눈물까지 글썽이시고 북촌댁이 죽거나 새아버지 김씨가 돌아오는 대목에서는
"아아구, 저걸 어째."
"이런! 백발웬수가 있나?"
하시며 추임새를 넣어주시는데
시골장터에서 영화를 돌리며 대사를 읊는 변사 아저씨가 된 듯,
관객들 호흡에 힘을 실어가며 판소리 완창을 하는 명창이 된 듯,
신나게 세 시간을 읽어제꼈습니다.
웬만해서는
"그만 하고 내일 하자, 목 아프겠다."하실 분인데
그런 말씀 없이 내쳐 듣고 계시니
역시 권정생 할아버지의 '몽실언니'는 대단한 작품입니다.
저 역시 혼자 눈으로 읽을 때하고 소리내어 읽을 때하고 다가오는 것이 달라서
몇번을 목구멍이 메어 힘이 들었는지 몰라요.
전에는 줄거리만 들어왔는데 이제는 글 한 줄, 한 줄, 표현 하나 하나, 밥 씹어 넘기듯 꼭꼭 씹어 읽으니
어찌나 맛이 나고 감동이 밀려오는지 꼭 처음 읽는 기분이었어요.

동치미는 지금 소금옷을 살짝 걸치고 부엌에 나가 있습니다.
내일 배와 사과를 씻어 껍질을 벗긴 후 마늘과 함께 베주머니에 넣어
슴슴한 소금물을 부으면 시원한 국물이 된다 하십니다. (그러니까 과일은 껍질만 들어가는 셈이지요)
갓과 파로 잔뜩 우거지 삼아 위에 덮어주면 동치미는 끝!
다행히 인우둥네는 밖으로만 나가면 발에 채이는 게 갓이에요.
돌산 갓김치의 갓하고는 완전히 다른, 억센 무청 같기도 하고 날 잎을 먹으면 겨자향이 나기도 하는,
그런 갓인데 어찌나 번식력이 좋은지 따로 심지 않아도 막 자라요.
겨울에도 잘 얼지 않아요.
집앞 잔디 위에서 돼지고기 숯불구이를 할 때, 이 갓 어린 잎을 쌈싸먹으면
알싸하면서도 입안을 청량하게 해주는 그 향에
자꾸자꾸 손이 가지요.
먹어본 사람만 안다니까요.

지난 주말, 인우둥이 파병반대하는 모임에서 하는 '일일주점'에서
주방일을 돕느라 집을 비웠었어요.
서울서 동생이 내려와 할머니를 돌봐드렸는데
제가 전화를 자주 안해서 살짝 할머니가 삐지셨거든요.
오늘 동치미 무를 같이 썰면서 그게 다 날아갔어요.
더불어 동화읽기까지 덤으로 해드렸더니 아주 기분 좋아하셨습니다.
내일 낮에 어딜 잠깐 외출해야하는데
미리 작업(?) 좀 해놓은 셈이지요. 히히 ^^
* 김혜경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1-05 23:13)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jasmine
    '04.1.5 11:22 PM

    정말 그렇게 하면 맛난 동치미가 되나요?
    좀 더 정확한 레시피 좀 올려주세요. 요즘 김치에 필이 꽂혀 정보 모으고 있거든요.....

  • 2. 꾸득꾸득
    '04.1.5 11:22 PM

    할머니한테 옛날얘기 듣기가 아니라 동화책 읽어드리기라,,,,,,
    너무 정겨운 장면이 떠오르네요..
    몽실언니 안읽어 봤는데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드는군요.-.-
    동치미...너무 좋아하지만 할 수 없는것....흑흑..핟그릇 얻어먹고 싶어라......

    글구 정말 3시간은 대단하십니다. 전 30분도 해주기가 힘든데...

  • 3. 사과국수
    '04.1.7 6:50 AM

    우리할머니 취미도 동화책읽기, 또 동양화그리기^^ 동화책은 읽고 또 읽고... 그러데요..
    정말 나이가 들면 어린애로 돌아가는것 같아요. 하는행동이 어린아이 같이 보이거든요..^^

  • 4. 정원사
    '04.1.7 3:08 PM

    에고..인우둥님 할머니님이 부럽네요^^
    글이 그림처럼 선하네요..몽실언니를 들으며 에이 나쁜 놈! 하시는 할머님
    울먹울먹 읽어드리는 인우둥님..
    보기 좋습니다~

  • 5. 나혜경
    '04.1.7 4:00 PM

    인우둥님 글이 바로 '동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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