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2일(금)~3일(토)
동서울터미날 9시 고속버스 출발.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 오후 1시 도착
점심 먹고 2시 산행 시작.
다이렉트로 장터목이 아니라 한신계곡 따라 세석대피소(1박) 거쳐 연하봉~장터목~천왕봉으로.
백무동(百巫洞)
백명의 무당이란 뜻이 아니고 여기서 백은 많다는 뜻.
조선 무당의 본향 백무동은 무당 집성촌으로 이후 전국으로 확산.삼국시대 이래 백무동은 지리산 천왕봉에 있는 성모사의 성모를 주신으로 모시는 무당들의 베이스 캠프.
한신계곡.
조선시대 남아있는 유람기(산행기)는 1200여편.
당시 산수유람 일번지는 당연 금강산. 가장 많이 남겨진 유람기도 금강산.다음이 지리산으로 약 100여편.
그럼 조선 최초의 유람기는??
바로 지리산에 올라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쓴 유두류록(遊頭流錄).
그는 42세 지리산 북사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중추절을 맞아 5박 6일간 지리산을 올랐고..
그 등정 출발 코스는 함양 관아를 나귀 타고 출발 후,
용유담~영랑대~하봉~중봉을 거쳐 정상 천왕봉에.
그리고 제석봉~장터목~연하봉~촛대봉~세석평전 거쳐 바로 이곳 영신봉에 이른 후 영신사에서 1박.
하산은 한신능선~한신계곡 따라 백무동으로.
이후 김종직의 유두류록은 지리산 산행의 길라잡이 필독서.그래서 이후 조선 후기 산행기를 보면 김종직 관련 언급이 많고.당연히 15,16세기 인기있는 지리산 등정 코스는 북사면인 김종직 코스.
나는 지금 그 김종직의 하산길을 거스러오르고 있고.
아래가 백무동.우측 능선 너머가 김종직이 군수로 있었던 함양군.
너머가 세석
5시간만에 7시 즈음 세석대피소 도착해 1박.
세석대피소
세석 평전.
이해를 위해 예전 사진 소환!
세석평전(細石平田)
한자에 뜻이 다 들어있네요.예전엔 마을이 있있고.
덕유산의 덕유평전과 함께 1500m 이상의 고지대에
이처럼 아름답고 넉넉한 평원이 있어 지리산을 더욱 사랑하겠죠.
남효온 (南孝溫,1454~1492)이 쓴 지리산 일과(智異山日課)에는 이리~~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다.5,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도 놓아져 있다.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이렇게 세석평원에 매잡는 관청도 있었다는.
해동청(海東靑)... 조선 매를 일컷는 말.
조선매는 몽고에도 널리 알려져 원나라 지배기 때는 주요 조공품.그 전통이 이어져 조선 때도 왕궁,돈 많은 사대부들에겐 인기.이중 가장 뛰어난 매가 지리산 천왕봉 일대서 포획한 매.그래서 지리산 세석평전에 내상군(內廂軍)이라는 매잡이 관청을 두었다는.
당연 주민들의 고생은 이루말할수 없었을 터.
유몽인의 <유두루산기>에는 이리~
(최초의 야담집 어우야담의 그 유몽인.)
/사당 밑에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잣나무 잎을 엮어 비바람을 가리게 해 놓았다.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매를 잡는 사람들이 사는 움막입니다”라고 하였다.
매년 8,9월이 되면 매를 잡는 자들이 봉우리 꼭대기에 그물을 쳐 놓고 매가 걸려들길 기다린다고 한다.
매 가운데 잘 나는 놈은 천왕봉까지 능히 오르기 때문에 이 봉우리에서 잡는 매는 재주가 빼어난 것들이다.
관청에서 쓰는 매가 대부분 이 봉우리에서 잡힌 것들이다.매잡이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치니,어찌 단지 관청의 위엄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 뿐이랴.백성의 온갖 고통이 이와 같은 줄 누가 알겠는가/
앞 봉우리가 영신봉(靈神峰)
한자에서 영적인게 느껴지죠? 예전엔 영신사라는 절이 있었고.아래로 흐르는 능선이 남부능선으로 대성골,빗점골을 거쳐 화개천 거쳐 섬진강으로.
멀리 노고단 ~반야봉이 보이고
김종직 이후 사대부들이 지리산 정상에 오르면 꼭 들르는 코스가 둘 있으니~~
1.화개 쌍계사 뒷 능선 불일암 어드메에 있을 거라고 여긴 청학동.
2.신라말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있는 쌍계사.
기본코스는 천왕봉을 찍은 후 장터목~연하봉~촛대봉~세석평원 거쳐 이곳 영신사에서 일박.곧 영신사는 청학동 찾아가는 중간 기착지.그 쌍계사로 인도하는 능선길이 영신봉 아래로 흐르는 남부능선이요,그 끝자락에 쌍계사가 있고.
그들은 이곳 영신사에서 일박한 후,어떤이는 주능선 타고 서쪽인 칠선봉,덕청봉,삼각고지로 더 향하다
적당 시점서 빗점골 타고 의신사로 내려갔응 .
그러나 이 구간은 주능선 코스가 좀 험준해 소수만이 이용.그래서 대다수는 남부능선을 내려오다 아랫 대성골을 탔고.
쌍계사 도달 이전 중간 기착지로 의신사,신흥사에서 다시 1박 내지는 2박.그래서 영신사,의신사,신흥사를 합하여 삼신(三神)이라 불렀습니다.모 두 '神'가 들어가기에.이렇듯 영신사,의신사,신흥사,쌍계사는 지리산 유람 사대부들의 주요 숙식처.
당시 지리산 내 사찰과 암자는 이렇듯 사대부 유람시 숙박시설로,승려들은 가이드가 되었고.심지여 승려들은 사대부들을 실어나르는 가마꾼에, 피리 불고 비파 켜는 악공에,춤추는 무희 역할까지.그래서 등정기가 아니라 유람기,유산기라는.
영신봉
영신봉 축대 흔적들
김종직 하면 곧 조의제문(弔義帝文).
사후 그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 많은 문도들이 죽임을 당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를,결국 그는 영남사림의 종조가 되고. 김종직의 대표문도가 김일손,정여창,남효원,김굉필.
이들은 스승 자취를 찾고자 하는 열망까지 더해져 지리산을 올라요.
그리고 김일손(1464~1498)은 속두류록(續頭流錄,1489년)을,남효온(1454~1492)은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1487)를 남깁니다.이 또한 후대 지리산 유람 참고 문헌으로 인기.남효온,김일손은 김종직 아래서 동문 수학. 김일손은 26세 때 친구 이기도 한 일두 정여창(1450∼1504)과 함께 등정했습니다.
남효원은 생육신 한명으로 김시습과 친구로 무려 16일간 지리산을 누볐는데 그는 첫 지리산 종주자!
빼놀수 없는 게 남원부사로 있을 때 지리산을 유람한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어우야담의 그 유몽인.남효원,김일손,유몽인 모두 다 천왕봉 오른 후 이곳 영신사에서 하루밤을.
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셋 모두 남부능선,대성골을 타고 화개로 내려갔어요.중간 숙소는 당연 의신사,신흥사에서,그리고 쌍계사 거쳐 청학동 찾았고.
남부능선에서 바라본 세석평전.
좌 영신봉,우 촛대봉.1500미터가 넘는 고지대지.
물 있고,땅 있고,땔감 풍부하고,움푹 패여 바람 막아주고,관의 수탈서 자유롭고...살만하나요?
촛대봉
건너는 영신봉.
4시쯤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는데 비가 오고
동쪽을 보니 천왕봉이 보이고
3천원 짜리 우비를 입고 빗길을 걷습니다.
당연 오리가 무중.
얼레지
연하선경(烟霞仙境)
동쪽으로 연하봉 거쳐 천왕봉 가는 주능선.운무 낀 능선에 서쪽으로 노을이 지고.촛대봉~장터목까지 3키로 구간으로 지리 10경 중 으뜸으로 치는 이가 많습니다.
김종직도,김일손도,정여창도,남효원도,유몽인도 천왕봉 오른 후 이 연하선경을 지나 세석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여름 야생화 절정인 8월이면 능선길이 선경이라는.그럼 예전 사진(2019년 8월)으로 확인해보죠.
아래 5장.
일월비비추
조선조 가장 많은 산을 유람한 이는 누굴까?
어우당 유몽인(1559~1623)!!
호가 어우당이라 야담집 이름이 '어우야담'
유몽인이 산천을 주유하다 들었던 이야기를 자기 시각으로 재해석한 것.
먼저 그의 <유두루산록> 도입부를 보죠.
/아, 나는 성품이 소탈하고 얽매임을 싫어하여 약관의 나이부터 산수를 유람하였다.벼슬길 전에는 삼각산(三角山)에 머물며 아침저녁으로 백운대(白雲臺)를 오르내렸으며,청계산(淸溪山)∙보개산(寶盖山)∙천마산(天摩山)∙성거산(聖居山)에서 독서하였다.사명(使命)을 받들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팔도를 두루 돌아다녔다.청평산(淸平山),한계산(寒溪山),설악산(雪嶽山)을 유람하였다.봄∙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의 구룡연(九龍淵),비로봉을 구경하고 동해에 배를 띄우고 내려오며영동(嶺東) 아홉 군의 산수를 두루 보았다.그리고 적유령을 넘어 압록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을 지나
험난한 장백산(長白山)을 넘어 파저강(波豬江),두만강(豆滿江)에 이르렀다가 북해에서 배를 타고 돌아왔다.또 삼수(三水),갑산(甲山)을 다 둘러보고, 혜산(惠山)의 장령(長嶺)에 앉아 저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았다.명천(明川)의 칠보산(七寶山)을 지나 관서의 묘향산(妙香山)에 올랐으며,발길을 돌려 서쪽으로 가서 바다를 건너 구월산에 올랐다가 백사정(白沙汀)에 이르렀다.
.중국에 세 번 다녀왔다.요동부터 북경까지 그 사이의 아름다운 산과 물을 대략 보고 돌아왔다./
이 정도면 요즘 대유행인 '블랙야크 100산' 첫 완등자는 어우당 유몽인.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건 북한산 백운대를 아침 저녁으로 올랐다는 구절.
이게 바로 최초요 최고 야담집으로 평가받는 '어우야담'이 탄생하게된 밑바탕이였겠죠
그런 산사나이 유몽인에게 지리산의 의미는?
/나는 일찍이 땅의 형세가 동남쪽이 낮고 서북쪽이 높으니,남쪽 지방산의 정상이 북쪽지역 산의 발꿈치보다 낮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또한 두류산이 아무리 명산이라도 우리나라 산을 통틀어 볼 때 풍악산(금강산)에 집대성이 되니,바다를 본 사람에게 다른 강은 대단찮게 보이듯 이 두류산도 단지 한주먹 돌덩이로 보였을 뿐이었다.그런데 이제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보니 그 웅장하고 걸출한 것이 우리나라 모든 산의 으뜸이었다./
그동안 모든 식자들이 그랬듯 금강산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지리산 정상에 올라보니 지리산이야 말로 최고란 것.심지여 중국 대 문장가들을 소환하며 지리산 위대함을 설파합니다.
/......지리산은 문장의 사마천이요, 시의 두보다/
김종직에 있어 지리산도 어우당과 같았네요.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中原)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
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옥검(玉牒玉檢)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 하였을 것이고,아니면 의당 무이산,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
지리산을 황제가 재를 올린다는 오악 중 하나인 숭산,태산의 반열에 지리산을 올려놓고 있다는.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이들에겐 왜 두류산(頭流山) 이었을까?
조선시대엔 주로 두류산으로 불렸어요.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조선의 최고봉은 백두산.김정호 대동여지도엔 백두산을 아예 지존이 사는 전각처럼 그려놓았고그 백두산이 흘러흘러 남해 최종착지라 頭流山.당대 인문지리적 산수관을 엿볼수 있는 두류산입니다.
뫼재비꽃
고산지대에 자랍니다.
높은산에 자라는 제비꽃이라는 뜻
진범
한여름 이렇게 꽃을 피웁니다
운탄고도 두위봉에서
연하봉
아래가 하산할 중산리,너머가 진주시.
넘으면 장터목
유몽인은 연하선경을 지나며 수능에 나올법한 문장 하나를 남기는데....
유몽인(柳夢寅,1559~1623)하면 어우야담(於于野談).어우당은 유몽인 호.최초 설화집 어우야담에는 귀신부터 사대부,장삼이사들의 삶이 있는 그대로 담겨져 있고.황진이와 이사종의 3년+3년 계약결혼 이야기도 여기서 나옵니다.
그의 지리산 유람기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도 그런 자유분방한 성향이 잘 드러나고.당대 최고 문장가 답게 유려한 필치의 지리산 묘사(최남선의 심춘순례처럼)와 감상이 압권.시 짓고 술마시고 .기생들과 유희를 즐기는 풍류도 고스란히 전하고.김종직,김일손,남효원의 유람기에는 성리학적인 사고가 유람 내내 드러나지만 유몽인은 훨 자유인이라는.풍류를 넘어 인생을 내비치는가 하면 무었보다도 특히 지리산의 위대함을 간파합니다.
다음은 지리산서 그가 터득한 인생사 단면~~
유몽인은 천왕봉을 오른 후 장터목 인근 향적사에서 일박하고 바로 연하선경,지금 이 능선을 밟으며 촛대봉으로 향합니다.
/일찍 향적암을 떠났다.고목 밑으로 나와 빙판길을 밟으며 허공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고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앞서 가는 사람은 아래에 있고 뒤에 가는 사람은 위에 있다.즉 벼슬아치와 선비는 낮은 데 위치하고 종들은 높은 데 위치하게 되었다.그러니 선비는 공경할 만한 사람인데도 내 신발이 그의 상투를 밟고,
업신여길 만한 자(종)인데도 내 머리가 그의 발을 떠받들고 있으니, 세간의 일이 다 이 행차와 같구나./
인간사란게 높다고 하는 것이 늘 높은 것이 아니고,낮다고 하는 것이 항상 낮은 것이 아니며,경우에 따라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장터목 직전 석장승 둘.
하나는 몸채가 잘렸고.
장터목 대피소(1653m)
봄가을 이곳에서 장(場)이 섰기에 장터목.
제석봉 (1806m) 과 연하봉 (1730m) 사이에 형성된 널찍한 고갯마루.산청의 덕산 주민들,그리고 함양의 마천, 남원의 산내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곳 .
산청 쪽 주민들은 중산리계곡의 상류인 법천계곡을 따라, 함양이나 남원쪽 주민들은 백무동계곡을 따라 올라왔고 .장터목의 해발 높이는 1653m. 당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선 장터.
장터목서 아점 해먹고 베낭은 그대로 놔두고 천왕봉 자매봉인 제석봉으로 향합니다.일대는 야생화 천국.
제석봉 일대.
5월 초인데도 영상 8도로 여전히 겨울 분위기
8월이면 이리 변합니다(사진 4장)
아래는 재석봉 일대 묘사~~
/산등성이를 따라 천왕봉을 가리키며 동쪽으로 나아갔다.사나운 바람에 나무들이 모두 구부정하였다.
나뭇가지는 산 쪽으로 휘어 있고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있는 것 같았다.껍질과 잎만 있는 소나무,잣나무는 속이 텅 빈 채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가지 끝은 아래로 휘어져 땅을 찌르고 있었다. 산이 높을수록 나무는 더욱 작달막하였다.산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푸른빛과 어우러져 있었다.이곳에 오니 꽃나무 가지에 아직 잎이 나지 않고, 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쫑긋 내밀고 있었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 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있는 것 같았다"
"가지에 아직 잎은 나지 않고,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쫑긋 내밀고 있었다"
익숙한 문장들인데 원작자는 유몽인인듯.실경 묘사가 타 유람기하곤 차원이 다릅니다.
뒤돌아 보니
아래 V가 장터목.뒤로 연하봉.
좌 멀리 촛대봉.우 멀리 운무 솝 반야봉.그옆으로 노고단.노고단~천왕봉 까진 25키로.
원래는 성상재~노고단~세석~천왕봉~중봉~대원사까지 성대종주 예정이었으나 4월말 영남지역 산불로
대피소 예약이 취소되었고 그 대안이 어제 오늘 산행.
정상이 보이고.아래는 하산할 중산리.
제석봉(1808m)은 천왕봉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이 위성봉으로 천신을 상징하는 제석(帝釋)이란 이름을 붙였고.그 자락에 제석단(帝釋壇)을 만들어 제를 올렸다는.
통천문
정상 천왕봉
중산리로 하산
다래와 교목의 생존 투쟁
다래는 가지 사이를 비집고 오르다
두 가지가 성장하면서 압사시킨 것.
확인해 보니 다래나무 전체가 말라죽었음
오후 3시 중산리 도착.
*게시물 수정중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