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간 화요일 오전에 그림을 보러다니자는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다보니, 벌써.. 석달째가 되었네요.
무엇이든지 꾸준한 놈은 당해낼 수 없다더니,
고작 석달 꾸준히 해보니, 나름대로 노하우도 생기고
그림보는 재미도 쏠쏠해집니다.
더군다나 그림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어르신들도 사귀게되고 ㅋㅋ
몇주째 그림도 같이 보고, 점심도 같이 나누었던 intotheself님이
지난 화요일에는 일이 생기셨는지, 몸이 아프셨는지,
시간이 임박해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제가 오늘은 못나가겠습니다. 그림 잘 보시고, 글 올려주세요."
'못나오신다'는 말도 섭섭했지만,
'글 올려주세요~'라는 말씀의 여운이 어찌나 길게 남던지요..
제일 안하고 노닥거리는 머슴마냥 맘이 갑갑한채로 며칠 지내다
드디어 오늘 자판을 또닥거리며 글이라는 것을 쓰게되었습니다.
택도 없이 부족한
artmania의 인사동 나들이 이야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언제나 '한국 현대 미술의 보물창고' 역할을 톡톡히하고 있는 인사동은 언제 찾아도 충분한 볼거리를 갖추고 있지요.
어느 전시장 문을 열어도 넘치는 그림들, 조각, 공예품들로 가득한 곳이지요.
그곳에서 제가 제일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이 '갤러리 상'이었습니다.
'영원의 초상'이라는 알듯 모를듯한 제목의 전시와 극도로 세밀하게 묘사된 노인의 얼굴이 그려진 입구의 포스터가 호기심을 자극하더군요.
전시장은 노인들의 초상화로 가득차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들은 한국의 노인이 아니라, 인도의 노인이랍니다.
칠순의 화가 이상원은 인도 바라나시 갠지즈 강을 여행하고 그곳에 만난 성자와도 같은 노인들의 초상을 그려냈습니다.
쭈글거리는 주름의 묘사도 그렇지만, 노인들이 뿜어내는 눈빛은 어느 성자의 눈빛을 연상시키에 충분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습니다.
1층과 2층의 전시를 다 돌아보고 나니, 미술 작품을 보았다기 보다는 종교적 숭고함을 경험한 듯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곳에는 예수의 모습이, 석가의 모습이, 어느 수도자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림을 다 보고나자, 화가 '이상원'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제도권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소위 '간판쟁이'로서 그림과 인연을 맺었던 화가가
이제 자신의 인생의 연륜을 걸고, 인물의 초상을 통해 그것을 얘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금,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력을 가지는 가에 대해서 확인했습니다.

비가 조금 내리는 인사동길을 걸어 다음 전시장인 '선 갤러리'로 향했습니다.
'선 갤러리'는 저에게는 '선화랑'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곳이지요.
정말 오랫만에 온건지, 예전의 아담한 화랑의 모습은 없어지고 5층정도의 규모를 갖춘 미술관으로 바뀌었더군요.
이곳에서 만난 작가는 '김명식'입니다.

화려하면서도 앙징맞은 색감이 돋보이는 작가 개인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이 전시되고 있었어요.
'여행'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그림들이었습니다.
화가는 미국을 여행한 후, 색이 더욱 밝아졌다고 합니다.
작품의 제목도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자신의 미국체류의 한 단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림들을 언뜻보면, 추상으로 보이지만,
전시장에 머무를수록, 그림의 형태들은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고,
촛점이 맞춰진 렌즈처럼 또렷하게 다가오는 생경한 경험을 했습니다.
밝은 색때문인지, 집에 한점 정도 걸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아직 그림값이 그리 비싸지 않다'는 전시관계자의 말을 듣고도
가격을 물어볼 엄두도 못내었어요.
사실.. 이런 그림이 나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 아닌가..
이렇게 눈에 꼭 담고 가서 기억으로 풀어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갤러리 선을 나왔습니다.
이제 빗줄기는 제법 굵어졌습니다.
급히 걸어서 '인사아트센터'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곳은 보통 5개 이상의 전시가 진행되지만,
오늘은 모든 것은 마다하고 오직 한 전시만을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박항률, 정호승 시화전'이었습니다.
'고요한 눈을 가진 화가'라고도 불리는 박항률의 그림들은 '정호승'의 시를 표현하는데 '딱'이었습니다.
시를 모두 읽을 수는 없었지만,
사랑을 노래한 정호승 시인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공감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시 하나를 이곳에 옮겨봅니다.
사랑 / 정호승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 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꼼꼼히 그림을 보고 나니, 이제 더이상 다른 그림을 볼 에너지가 없어졌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식욕'을 채울 시간이 되었던 것이지요 헤헤
멀리서 오신 '전선생님'과 함께 인사동에서 잘한다는 한식집에 가서 '된장찌게'를 먹었습니다.
비오는 날, 인사동에서 맛본 구수한 된장찌게 역시, 그림만큼 값지더군요.
이렇게 언제든지, 멋진 그림과 맛나 음식이 기다리고 있는 '인사동'.
그곳이 있어서 정말 좋다는 생각이 오늘도 들었습니다.
한동안 글이 안보이는 intotheself님, 별일 없으신진 궁금합니다.
행여 건강이 안좋으시다면, 어서 쾌차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