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종로, 할머니네는 광나루 건너였는데 어릴 때는 버스타고 할머니네 가는 길이 엄청 멀게 느껴졌어요. 버스타면 휘발유가 불연소 되면서 나는 냄새에 늘 멀미를 했었어요. 올해 91세이신 아버지는 멀미로 축 늘어진 저를 등에 업으셨었고 그 등이 참 따뜻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육남일녀 아버지 형제들이 다 모여서 수십 명이 북적였고 수틀리면 마당에서 떼쓰며 구르던 네째아버지네 딸, 밥먹다가 꾸벅꾸벅 졸던 순둥이 그 집 아들, 큰 눈에 겁이 많아 화장실 혼자 못가고 '언니, 언니' 부르던 세째아버지네 딸. 어느 해 명절이었나 열이 펄펄 끓어 어른들 애를 태웠던 다섯째아버지네 큰 딸, 그댁 작은어머니가 명절음식 하는데 투덜투덜 불평해서 동티가 난 거라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애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꿈을 꾸셨다고 허공에 대고 잘못했다고 대신 비셨던 울엄마도 기억 한 켠에 있네요. 울할머니 6남매 데리고 '국제시장'에 나온 배타고 흥남부두에서 월남하신 함경도또순이로 불같았던 성정으로 동네에서 탑찍으셨던 분.
할머니는 떡집을 해서 일곱 남매를 키우셨고 할아버지는 본인 내킬 때 돈을 벌어서 혼자 쓰셨던 반백수한량이셨어요. 할아버지 찬장이 따로 있었는데 미제통조림에 맛난 간식들을 거기에 두고 혼자만 드셨어요. 평생 가장이셨던 할머니는 환갑 전에 뇌졸증으로 쓰러지셔서 고생하시다가 일찍 돌아가셨고 한량할아버지는 94세까지 무병장수 하시며 자식들에게 돈걷어 온갖 나라를 유람하시다가 자는 듯이 돌아가셨습니다. 무슨 복이셨을까요!
떡집 사장님이셨던 할머니댁에는 오래 길들여진 돌판과 떡메가 있었어요. 명절이면 언제나 시루에 찹쌀을 쪄서 돌판에 올려넣고 남자어른들이 돌아가며 떡을 쳐서 인절미를 만들었어요. 만삭에 마당 한 구석에 연탄불을 피워 생선을 굽던 막내어머니도 떠오르고 이부자리 밑에 오래 감춰둔 사탕과 백원짜리 지폐를 다른 아이들 몰래 쥐어주시던 저한테는 선물상자 같으셨던 할머니도 그립습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추억하는 아이는 환갑이 되었고 어른들도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시고 늘 산같았던 아버지는 기력이 쇠하셔서 봄에는 걸어 올라가셨던 산소에 올라가지 못하셨습니다. 아주 긴 이야기 같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찰나 같기도 합니다. 여기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따뜻하고 넉넉한 명절이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