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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교수의 '선배 김근태 회고'

^0^ 조회수 : 2,456
작성일 : 2011-12-30 16:39:24
http://jkl123.com/sub5_1.htm?table=board1&st=view&page=1&id=12960&limit=&keyk... ..
 
김근태 선배님의 추억(1)

대학 2학년인가 3학년 때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얼굴이 유달리 하얀 자그마한 체구의 복학생 한 사람이 강의실로 들어섰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등학교 3년 선배님이신데, 민주화 데모에 연루되어 거의 끌려가다시피 해서 군대에 갔다 오신 분이었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김근태'라는 이름 석 자가 운동권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유명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데모를 열심히 했을 뿐이지 운동권의 핵심세력은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당시에는 운동권이라는 것 그 자체가 그리 조직화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기도 했구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통치가 점차 강화되면서 운동권도 차츰 조직화되어 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선배님은 세 살 정도 어린 우리들과 허물없이 잘 어울리셨습니다.
운동권이라는 인상을 전혀 풍기지 않고 그저 평범한 복학생 중의 하나이셨습니다.
우리 경제학과 학우들은 그때 틈만 나면 농구장으로 달려갔는데, 선배님도 늘 우리와 함께 뛰셨습니다.
선배님이 슛을 하려는데 내가 그 분 바짓가랑이를 잡고 반칙을 가했던 기억도 납니다. 

하루는 농구를 끝내고 강의실로 향하는데 목이 몹시 말랐습니다.
나는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늘 그러듯, "선배님 콜라 좀 사주세요."라고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선배님은 정색을 하시더니 "나 지금 돈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씀 하시더군요.

나는 그때의 선배님 얼굴 표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나중에 안 것이었지만 선배님은 용돈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절대빈곤의 상황에서 학교를 다니셨습니다.
주머니에 교통비조차 제대로 없는 터에 후배가 콜라 사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니 얼마나 곤혹스러우셨겠습니까?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어리광을 피워 선배님을 곤혹스럽게 만든 내가 몹시 부끄럽더군요.

십여 년 전 선배님, 정운찬 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함께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배님은 정운찬 선생님이 대학 다닐 때 장학금 양보해준 일을 기억하고 그때 너무나 고마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얼마나 형편이 어려웠으면 후배의 장학금을 양보 받아 학교에 다니셔야만 했을까요.

데모가 있거나 하면 선배님은 언제나 열심히 참여하는 기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데모에 참여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내가 전에 고백했듯이 학생 시절의 나는 변변히 데모에 참여해본 적이 없습니다.
겁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지요.
그런 내가 얄미울 만도 한 일인데, 선배님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언제나 친근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우리 둘은 그저 평범한 선배와 후배로 어울리고 다녔는데, 가끔씩은 무슨 책을 읽으면 좋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밀(J.S. Mill)의 『자유론』을 읽어 보라고 적극 권한 일이었습니다.
항간에 그 분은 좌파 인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걸핏하면 간첩 혐의로 피신해 다니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본 그때의 선배님은 결코 좌파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좌파 서적을 읽어 보기를 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셰익스피어의 『햄렛』 얘기가 나왔습니다.
자신은 그 책을 열 번이나 읽었는데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눈물까지 흘렸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많은 사람들은 김근태라는 이름에서 강인한 투사의 이미지를 떠올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본 선배님은 『햄렛』을 읽고 눈물을 흘릴 만큼 감수성이 예민하고 부드러운 분이셨습니다.

http://jkl123.com/sub5_1.htm?table=board1&st=view&page=1&id=12961&limit=&keyk...
IP : 119.66.xxx.13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마림바
    '11.12.30 4:55 PM (121.161.xxx.230)

    별세의 안타까움을 담아 이른 아침 어느 분이 트윗에 일화 한편을 올려 주셨는데 그 일화와 상통하네요. 김근태의장님이 훗날 이근안을 만났는데 용서해달라는 이근안의 눈물을 보면서도 그자리에서는 용서하시지를 못했대요. 그러나 용서하지 못한 자신의 옹졸함을 탓하면서 몇달을 괴로워 했노라는 고백을 듣고 울컥했습니다. 너무 이른 죽음이라 슬프기만 한것이 아니라 애닯고 원통하고 그렇습니다. 솔절없는 말이지만 고문없는 곳에서 따숩고 화통하신 모습 그대로 평안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 2. 경기고 동문
    '11.12.30 5:05 PM (124.54.xxx.17)

    저도 지금 60대 중반인 분에게 얘기 들은 적 있어요.
    그런 험한 일 겪으면 사람이 어딘가 그늘지고 모나기 쉬운데 큰 인물이라고.
    경기고 동문들이 다들 좋아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초중고 입시 있던 시절 경기고 동문회면 흔히 말하는 잘나가는 사람들 다 모여있는 곳이고
    보수적인 사람도 많은데 굉장히 온화한 성품이셨던 거 같아요.

  • 3. 서울대 경제학과라지만
    '11.12.30 6:42 PM (1.246.xxx.160)

    서울대에서도 경기고 서울대는 특별한 라인이 형성되듯 한다던데 그 기득권을 포기하시고 핍박받는 국민들을 위해서 나서주신 김근태님은 어떤 순교자보다 숭고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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