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와 무우 상자 옆에 얌전히 서 있던 그 책장은,
남편이 중학생때 구입한 것이라는데
1년후 우리가 분가할 때 새 아파트 책방 베란다에 서서 헌책들을 품어주었고
(비록 오랜 지하실 생활동안 책꽂이 한 칸을 잃어 합판을 얻어다 잘라서 넣어주긴 했지만)
다시 1년후 우리가 서울로 이사갈 때도 따라와
옷방 겸 책방에서 제일 큰 책들을 가득 이고 지고 해주었고
(이때는 나무목 시트지로 한 번 발라주어서 깔끔한 외관을 자랑)
다시 3년후 이곳으로 이사와서는
앞베란다 구석에서 낡은 책들과 안 쓰는 물건들이 잔뜩 고인채
동향집의 강한 아침 햇빛에 색이 바래고 있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기어 다니고 걷고 손닿는 높이가 높아지면서
거실에 아기 책이랑 자잘한 물건들을 수납할 가구가 절실해지더군요.
맘에 드는 가구는 분수에 안 맞게 비싸고,
벽지와 바닥재만 보면 한숨 나오는 낡은 아파트와도 당연히 안 어울렸죠.
여기 드나들면서 눈만 높아져서리^^.
책장의 책들을 목록 작성해서 인터넷 헌책방에 팔아버리고, 82장터에도 한 번 풀고 나머지는 재활용으로 버리고 앞베란다 창고 정리까지 하고 나서야 시댁 지하실의 낡고 낡은 책장은 거실에 입성했습니다.
빛바랜 모습이 안쓰럽죠?

너무나 심하게 바래서 도저히 그냥 볼 수가 없을 정도.
두 종류의 시트지와 데코타일을 붙여서 눈속임 리폼에 돌입했습니다.
아들녀석 등쌀에 낮에는 도저히 불가능.
녀석을 재워놓고 서너시간씩 이틀 밤에 걸쳐 했는데, 그냥 했어도 하루 종일 걸렸을 것 같아요.
나중엔 졸립고 하기 싫은데 다음날 또 벌려놓기 싫어서 대충했어요.

조명에 따라서 색이 많이 차이나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꼬질해진 소파와 잘 어울리는 색이에요.

접착식 데코타일은 가까이에서 봐도 상당히 나무와 흡사한 재질이에요. 바닥에 붙이는 거라서 어떨까 했는데 목공용 본드까지 써가며 붙였더니 떨어지지 않고 잘 붙어있을 거 같아요.



마지막 귀찮음을 견디지 못하고 엉성하게 잘라서 삐뚤어진 앞면.
그래도 다이소에서 서랍들 주문해서 대충 자잘한 것들 넣어놓고 아기 책 넣고 하니까 뿌듯했습니다.
재활용의 특성상 예산이 너무 많이 들면 안되니까 바탕 시트지를 좀 더 고급스러운 걸로 하지 못한 점, 타일과 시트지 색상이 안 맞는 점이 아쉽지만 보람있어요.
20년된 책장치고는 회춘한 셈이죠.
그닥 깔끔하지 못한 성격상 이런 식으로 대충 대충 정리하고 아기가 또 늘어놓는다고 핑계댈 수 있는 이런 상황도 좋고.
참, 시트지랑 데코타일, 접착제랑 배송료까지 29000원쯤 들었네요. 적어도 3년은 더 쓸 수 있겠죠.
만약 아기가 자라 자기 책장을 사달라고 떼쓸 즈음에도 이 책장이 지금처럼 튼튼하다면, 더 예쁘게 리폼해서 부엌 한 켠에 놓고 그릇들을 정리해도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