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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짭짤 고소한 김혜경의 사는 이야기, 요리이야기.

브로콜리의 추억

| 조회수 : 5,913 | 추천수 : 103
작성일 : 2003-07-25 21:13:19
비가 그치고 나니까 덥죠?
비올 때는 너무 꿀꿀해서, 해를 보면 좋겠다 싶었는데 막상 해가 나니까 덥네요.

더우니까 아무 것도 하기 싫으시죠?
오늘은 금요일, 저희집 고기 안먹는 날이에요, 게다가 내일 중복날 뭔 일이 좀 있어서, 그래서 오늘은 제 에너지를 비축하려고 간단하게, 아주 간단하게 먹었어요. 기본적인 밑반찬에다 조기만 굽고, 데친 브로콜리 정도....

오늘 초고추장에 찍어서 열심히 브로콜리를 집어먹다가 보니 문득 몇년전 뉴질랜드에서 먹었던 브로콜리 생각이 나네요.

97년 김장철 뉴질랜드에 출장가게 됐어요. 저희 친정어머니 제가 외국출장간다고 하니까 저 있을 때 한다고 김장날을 부랴부랴 잡았어요. 제가 야근한 다음날 김장을 들여서 고 담날 해넣는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죠.

당시 제가 하던 야근은 신문사의 야간국장으로, 그날 밤에 일어나는 일은 제가 책임지고 신문에 넣거나 빼거나 하는 그런 일이에요. 일이 일찍 끝나면 새벽 2시30분, 중요한 경기가 외국에서 있거나 무슨 사고가 터지면 새벽 5시에도 끝나는..., 노동량이 많다기 보다는 신경을 좀 많이 써야하는 일이죠. 스포츠 신문이다 보니까 대구에 내려가는 1면 야구기사랑 광주내려가는 1면 야구기사가 모두 달라, 사고 안나도록 눈이 빠져라 대장(신문찍기 전에 보는 것)보고.

야근을 하고 나면 그 담날은 휴일이에요.
보통 야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새벽 3시. 씻고 누우면 금방 잠이 안오고, 잠이 들어도 깊이 잠들 수 없고, 그리곤 kimys 출근 때문에 7시쯤 일어나고... , kimys 출근하고, 설거지며 집안일을 좀 하고 잠시 쉬어야 제 컨디션인데, 친정어머니가 김장 준비해야한다며 아침부터 호출을 하셨어요.

평소에는 동네 시장에서 사서 배달을 받으시곤 했는데 하필이면 그해는...
수산물 사러 노량진수산시장 들러 장을 봤는데 홍은동시장에서 가보자는 거에요. 거기서 배추까지 사서 제 차로 실어왔어요.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작은 조카랑 저랑 둘이서 차에서 배추를 풀어내고, 거기까지만도 숨이 턱에 닿았는데 배추를 빨리 절이자고 하셔서 절이는데 정말 죽을 것 같더라구요.
시어머니 저녁 핑계대고 어두워져서 집에 돌아오는데 차안에서 눈물이 나더라구요. 산다는게 너무 고달퍼서...

그담날은 출장전날이라 죽도록 기사를 썼어요.
저 없는 동안 제가 메꿔야할 지면은 몽땅 준비해놔야하거든요. 게다가 김치 속넣은 것도 좀 들여야다 봐야하고...어깨가 저려오고 눈이 붓도록 기사를 쓰고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해서 친정에 가보니 아직도 김장이 끝이 나지 않았더라구요, 사촌언니들이 속을 넣어놓은 김치를 양동이에 담아서 장독대 아래 김치광으로 나르는 일이 제 몫.  
늦도록 김장을 돕고 집에 와서 저녁해먹고 누웠는데 상태가 별로 좋지 않더라구요.

그담날이 바로 출장일.
저녁 비행기라 어지간하면 회사에 잠시 출근했다가 오면 좋으련만, 짐도 못싼데다가 몸이 너무 좋지않아서 집에 쉬었는데, 열이 펄펄나고, 도저히 출장을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더라구요.
간신히 몸을 일으켜서 택시 잡아타고 김포로 가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친정엄마가 너무 원망스럽고, 혹시 '계모가 아닌가'하는 어린애같은 의심이 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때부터 였어요.
공교롭게도 뉴질랜드 공항이 파업을 해서 호주의 시드니 공항에서 장시간 대기했다가 갔어요. 그것도 크라이스트 처치로 바로 못가고, 웰링턴에 들려서 크라이스트 처치로 갔어요. 크라이스트 처치 에서 남쪽 아래 인버 카길인가? 하여간 첫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전 거의 시체 수준이었어요. 열은 펄펄 나고, 먹지도 못하고, 먹기만 하면 토하고...
한 사흘인가 계속 그렇게 아픈데, 서울에도 못 돌아갈 것 같더라구요.

그러다가 퀸즈랜드(맞나요? 퀸즈타운인가?)로 와서 한국식당에 사슴고기를 먹으러 갔어요. 며칠 전 목장에서 본 사슴의 맑은 눈이 생각나서 로스구이 판에 놓인 사슴고기에 선뜻 젓가락이 가지질 않는데, 식탁위에 놓인 반찬 중 브로콜리가 보이더라구요, 초고추장에 버무린 브로콜리를 보는 순간 '이제부터 뭐든 먹을 수 있겠다' 싶더라구요.
아, 그 고추장 맛..., 그리고 그 신선한 브로콜리의 맛....

한국에 돌아와서 몇번이고 브로콜리를 데쳐서 초고추장에 무쳐서 상에 내보곤 했는데 그 맛이 안나네요.
그래서 오늘은 무쳐내지 않고 그냥 찍어 먹는 걸로...
그 브로콜리 맛 영원히 다시 못볼 것 같아요.

하여간, 돌아와서 엄마에게 농담반 진담반, "친엄마 맞어?" 하고 여쭤봤는데...
진짜 엄마 맞다네요. 허~.
1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아짱
    '03.7.25 10:16 PM

    일에 치여 심신이 괴로울때 만난 비타민 덩어리..브로콜리가
    선생님을 구해주었군요

    언제나 하염없이 퍼주고 뭐든 해주는 엄마 보면
    저는 편하고 좋지만
    한편은 몸 상해가면서도 참고 내색 않고 하는게
    속상할때도 많답니다
    (딸한테만 그러는게 아닌지라,,,)
    차라리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게
    젊은 내가 힘든게 나을거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말로만 또 이러지 뒤돌아 서면
    팔 걷고 나서서 일을 줄려 드리지는 못하죠(불효녀라)

  • 2. 카페라떼
    '03.7.25 10:31 PM

    저는 어릴적 부터 집안일을 거의 제가 다 하는 편이였거든요..
    그 힘든 일을 하면서 저도 사실 저의 엄마가 친엄마가 맞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팔 걷어부치고 제가 나서며
    일 많이 하는데 차라리 엄마가 힘든것 보단
    젊은 내가 힘든게 낫더라구요..

  • 3. engineer66
    '03.7.25 11:01 PM

    저도 초등학교때부터 밭일과 밥을 하는 등 엄청 일을 많이 했는데, 고등학교때까지 어머니를 얼마나 미워하고 싫어했던지....저도 친엄마가 아닌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일을 아주 많이 많이 시켜도 좋으니까 옆에 계셨으면... 하는 부질 없는 생각이 드네요.

    어머니 살아계실때 어머니 기쁘게 해드렸어야 되는데......많이 보고 싶지만, 불러 보기만 할뿐 만질수가 없네요. 어머니를....

  • 4. 나나
    '03.7.25 11:01 PM

    브로콜리,컬리 플라워, 양배추 같은 십자화과 채소 많이 드세요....
    비타민도 많고,,,항산화 작용을 해서,,,항암작용도 한답니다...
    내일,,,저도 브로콜리 데쳐서 초고추장 찍어 먹어야 겠네요...

  • 5. 경빈마마
    '03.7.26 7:57 AM

    일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많은 사람.
    친정어미가 장사를 하시기에 만만한 저를 엄청 불러 대셨지요.
    김장은 정말 우리집도 만만치 않게 했음.
    200 포기 이상한 것 같음.거기에 동치미,갓김치,파김치,알타리.
    무슨 김치에 귀신들렀나? 정말 많이 했어요,
    그거 절이고 다듬고........ 그리고 그 뒷 일.
    파 다듬기,갓 다듬기,마늘까기,무우씻기,채설기,생강씻기. 다지기.찹살 풀 끓이기...기타등등

    그런데...........
    시집와서 엄마처럼 살지 않겠노라 큰소리치고
    반대하는 결혼했더니 한 술 더 뜹니다.(왜?반대 했는지 알고 있어요.)
    대가족에 종가 맏며느리.
    남편이 결혼 후 3년만에 지금의 수빈가구 공장을 시작하니
    저 얼마나 죽어라 일했는지 아실라나 모르실라나....!
    아이낳고 집에 오니 남편 "나 사업한다." "뭐?" 허~어~억!"
    몸조리 저 당연히 못했어요.

    일은 친정에서 엄마 돕다 선수 되었으니...
    알아서 척척 해대니 우리신랑 저는 늘 아프지도 않고 움직이는 슈퍼우먼인 줄 안다니까요.
    딸 중에 엄마 닮는 딸이 있다더니 그게 저 인듯 싶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지금도 날 불러요.
    내가 정말 만만 한건지...알아서 잘 해서 그런지....

  • 6. 싱아
    '03.7.26 10:12 AM

    제 지론 하나...........
    딸은 공주처럼!!!!!!!!!!!!!!!
    어릴때 저도 맏딸 노릇에 정말 일 많이 했어요.(엄마가 장사하는 관계로)
    근데 시집오니 맏며느리.일복 터지더라구요.
    그래서 전 어릴때 귀하게 크면 시집가서두 여전히 공주로 살더라구요.(친구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 딸이 없어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
    혜경행님은 어릴때 공주셨을껏 같은데여................

  • 7. 김혜경
    '03.7.26 10:18 AM

    공주였죠. 초등학교 다니는 조카 저더러 맨날 그러는데요, "고몬 공주병"해요.

    정말 자랄 때는 손가락에 물 한번 안묻혔어요. 엄마 말씀이 시집가면 다 하니까 지금부터 안해도 된다고. 오빠랑 남동생 아무 것도 안하는데 딸이라고 해서 집안일 안 시킨다고.
    엄만 그랬는데 아버지는 아무 것도 안한다고 좀....

    그랬는데 울 엄마, 며느리 얻으시더니 며느리들은 아끼시고, 만만한 딸만 부려먹네요, 제가 너무 효년가요?? 킥킥.

    울 딸도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데...이담에 사돈댁에 원망이나 안 들으려는지...

  • 8. 체리
    '03.7.26 12:01 PM

    맞아요.귀하게 크면 시집 가서도 여전히 우아하게 살더군요.

    어제 속도 아프고 체한것 같기도 하고 머리도 너무 아파
    약은 먹었지만 괴로워서
    82쿡에 들어가면 덜 할려나 해서
    선생님 브로콜리 얘기
    오늘 보니 지워졌지만 자유게시판 글을 보니
    눈물이 줄줄 흐르더군요.
    모두 제 얘기인 것 같아서요.
    참는 사람은 인내력이 무한대인 줄 아나 봐요.

  • 9. june
    '03.7.26 4:16 PM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브로콜리를 당장 데쳐야 겠네요... 전 엄마랑 같이 살때 남 동생때문에 많이 속상했는데.. 맨날 계모 아냐 라고 하고.. 떨어져 사니까 그게 다 엄마의 표현 방식이라는걸 알것 같아요,.

  • 10. 마마
    '03.7.26 8:10 PM

    귀하게 크면 시집가서 편하게 산다?
    딴엔 일 안 시키고 귀하게 키운 시어머니 딸 우리 시누 시집가서 사는 거보면 그 말
    별로 안 맞는 거같고요.
    전 시집오기 전 손님오시면 커피 과일 내오기 엄마 적어주는 대로 장봐오기..등등
    나이 들어 일하기 싫어 지신 엄마가 그런 저런 잡일로 절 엄청 부려먹었어요
    그래도 대학 졸업하고 백수하다가 시집왔으니 찍 소리못하고 .
    그런 나는 시집와서 엄청 일하고 살아야 하는데....
    멀리 시집와서 종가집 맏며느리인데도 제사에도 안가고 명절에만- 겨우 생색 내며
    손님같이 다녀오고,
    결혼 13년에 아직 김장 한 번 안 해보고 시댁 친정 교대로 김치 받아먹고
    어쩌다가 집에서 김치 담은 날은 외식하고- 너무 힘 들어서 밥을 못하니까
    정말 사주팔자가 따로 있나봐요.
    저랑 신랑이랑 다 맏이 인데도 팔자가 늘어진거보면요.
    일은 안 하고 대접만 받지요.

  • 11. 이정아
    '03.8.9 11:55 AM

    울 신랑은 야채 안좋아하거든요. 특히 씨래기, 김치, 배추 등등...
    그러나 딱 하나 좋아하는 것이 브로콜리라서 브로콜리 살짝 데치고 양상치랑 과일이랑 샐러드 만들어서 반강제로 먹입니다.^^ 그나마 샐러드는 소스 맛으로 먹는 사람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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