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짭짤 고소한 김혜경의 사는 이야기, 요리이야기.

생굴 멍게 해삼 행상을 보면서...

| 조회수 : 6,350 | 추천수 : 450
작성일 : 2003-01-07 21:01:57
오늘 어딜 가다보니 길가에 세워진 소형 트럭(그걸 픽업트럭이라고 하던가요...)에 아크릴 간판으로 생굴 멍게 해삼, 이렇게 쓰여있더라구요.
때마침 저도 신호대기에 걸려 유심히 살펴보니 연세가 지긋한 분이 푸른색 방한복과 방한모로 중무장한 채 조그만 스티로폼 상자가 가득 실린 트럭 앞에 서계시더라구요.
그걸 보면서 혼자 "푸핫핫"하고 웃고 말았어요.

제게 단 하나뿐인 저희 오빠와 저와는 딱 18개월 차이가 나요.
오빠도 아가이던 시절에 동생을 보게된 차~암 딱한 아가였죠. 그래도 얼마나 착했는지 자러가기 전만 해도 없던 아가가 새벽녁 엄마 옆에 누워있는데도 질투도 하지않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서 엄마에게 "아가야~~? 아가!!"하더래요.

저희 외할머니는 오빠가 엄마 젖을 더 먹어야하는데 제가 태어나서 졸지에 밥숟갈을 들어야만 했던 오빠를 매우 딱하게 여기면서 금이야 옥이야 하셨대요.

오빠랑은 생년으로는 2년 차이지만 제가 7살에 학교에 들어가는 바람에 초등학교 5년 내내, 함께 다녀야했고 대학 3년(오빠가 ROTC를 하는 바람에 꼬박 학교를 다녔거든요) 내내, 서로 누구의 오빠, 누구의 동생으로 살았죠.
특히 아버지가 지방으로 전근다니시고 엄마는 동생하나만 데리고 아버지따라 가시고, 외갓집에 남은 우리 둘은 때로는 친구처럼 다정하고, 때로는 원수처럼 싸우면서 자랐어요. 맞기도 참 많이 맞았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맞을 만도 했던 것 같아요. 우리 오빤 참 보드랍고 온순한 남자아이였는데 전 참 억척스럽고 오빠에게 지곤 못살았거든요.

그렇게 자라다보니 서로 공통적인 기억이 참 많은데 그중 하나가 해삼이에요.

옛날 초등학교 앞의 불량해삼은 어떤 모습인지 아세요??
호호호, 여러분들 상상이 안갈거에요.
리어카 위의 널판지에 해삼이 죽 진열돼있는데 그 해삼은 큰 옷핀을 펴서 포크처럼 만든 것에 의해 널판지에 고정되어있죠. 생각만해도 너무 지저분하죠?
"아저씨 해삼주세요"하면 해삼장수 아저씨는 "어떤걸로 줄까, 그건 얼마다"하는 식으로 흥정을 했죠. 물론 가끔은 값을 깎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도 해삼값이 비쌌는지, 제가 혼자 동전을 털어서 해삼을 사먹기는 어려워서 꼭 오빠랑 합자해서 사먹었어요. 집에서는 먹을 걸 가지고 그렇게 싸웠지만 나가서 사먹는 해삼으로는 둘이 적당히 타협을 해서 싸우지도 않고 잘도 사먹었죠.

그런데 바로 문제는 바로 그 해삼이 불량해삼이라는 거죠.
더운 여름 땡볕 아래 하루 종일 먼지 쏘이면서 축 늘어져있던 그 해삼을 대충 물(이것도 새물이 아니었지 싶어요)에 한번 흔들어서 숭숭 썰어주면 오빠랑 나랑은 스폰지에 꽂혀있던 누가 먹던 것이지도 모를, 그 편 옷핀으로 해삼을 꾹 찍어 초고추장에 한참이나 담갔다가 먹었어요.
"오빠 디게 맛있지?"
"엉"
"오빠 이 고추장도 디게 맛있지?"
"엉"

그러다가 한번은 우리 막내이모에게 걸렸는데 우리 막내이모, 엄마에게 곧장 일러바쳐 한동안 해삼장수 리어카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는 금족령까지 내렸지만 여전히 오빠랑 나랑은 한 사람은 먹고, 한 사람은 망을 보는 잔머리까지 굴리면서 그 해삼맛을 즐겼다는 거 아닙니까.

그때 먹은 그 흐물흐물한 해삼이 얼마나 맛나던지, 집에서 엄마가 쌩쌩하고 탱탱한 해삼을 주면 한 입 먹어보고는 속으로 '이건 해삼이 아냐'하고 단정짓곤 했죠. 해삼이 싱싱하면 몸이 단단하다는 걸 아주 큰 다음에야 알았다니까요.

전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해삼의 기억을 저만 갖고 있는 줄 알았어요. 원래 남자들이 사소한 걸 기억 잘 못하니까...
그런데 지난 연말 친정가족 모임이 있어서 일식집에서 밥을 먹는데 해삼이 나오니까 오빠가 먼저 그러는 거예요."혜경아 너 그 흐물흐물한 해삼 기억나니?"


길가에 세워둔 해삼장수 아저씨의 해삼상자를 보면서 40년전 생각을 하니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르데요.
속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저, 실성했는 줄 알았겠죠?

나이가 들면 동성의 형제가 더 좋다는데 그래도 같이 자란 탓인지 오빠가 있는 것도 나쁘진 않네요. 오빠 결혼 이후 내 오빠라기보다는 '남의 남자'(올케의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별 관심을 안갖고 살았는데 이렇게 피붙이라고 살가워지는 걸 보니 저도 나이를 먹어가긴 먹어가나봐요.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김수연
    '03.1.7 11:37 PM

    울 아들두 혜경님같은 여동생 빨리 만들어줘야 할텐데..ㅎㅎㅎ

  • 2. mywoos
    '03.1.8 9:50 AM

    후에 쿠킹노트 글을 따로 묶어 책으로 내면 어떨까요?
    "노티를-"처럼 음식에 얽힌 추억을 모아서...
    출판계는 잘 모르지만 저라면 얼른 사겠는데..
    정말 잘 모르는 얘기라구요?^^
    글 읽으면서 혼자 웃기도하고 마음이 짠해지기도하고
    비슷한 나의 기억도 떠올리기도하고
    반성도하고 각오를 다지기도하고 그럽니다.
    돈도 안들이고 좋은글 읽게 해주셔서 고마을 따름이지요.

  • 3. 박정순
    '03.1.8 1:23 PM

    추억의 해삼?
    40대 후반인 나에게두 해삼은 학교가는길에 사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초등학교 시절에 그맛을 알았던거 보믄 먹거리에 특출난 재능이 보엿던것?
    참, 맛났던 해삼이었는데. 딱 한개 밖에 못 사먹었는데. 비쌌던 것 같기도.
    길에서 흐물거리는 맛간 모습이었지만 참 맛났었는데.
    요즘의 아무리 싱싱한 해삼이라도 그때 그맛은 아니더라구요.
    옷핀으로 초장에 찍어서 우물 우물 씹어 먹던. 추억이 방울 방울.........

  • 4. 이영미
    '03.1.8 1:46 PM

    정말이지 옛 생각나네요.
    추억의 해삼이랑 멍게... 어떤 친구들은 징그럽다고 못먹고 했었지요.
    가끔 옷핀을 보면 그거 펴서 해삼 찍어 먹던 생각이 나곤 했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상상도 못하더라구요
    국민학교 담벼락에 세워둔 리어카에서는 미제 풍선껌이랑 비스켓도 팔았었구
    그리고 얼음 갈아서 여러가지 모양의 틀에 넣고 식용색소 넣고 꾹 눌러서 빼주던거 하며
    마치 맥주통 같은 커다란 나무통을 돌리다 조그만 문을 열고 꺼내 알미늄틀에서 빼 주던 계란아이스케키하며...
    2년전에 처음으로 모이기 시작한 국민학교 동창들도 만나서 첨 하던 얘기가 바로 그 당시의 먹거리 얘기였답니다.
    얼마전 tv를 보니 추억의 간식을 파는곳이 아주 인기라고 하던데.
    정말이지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 5. 김혜경
    '03.1.8 9:42 PM

    소영님 사실 제가 정말 내고 싶었던 책은 소영님 말씀처럼 노티같은 그런 책이었답니다. 그래서 한 5,6년전 몇꼭지 끄적이다가 말았드랬어요. 그런데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닌 관계로...
    그러다가 일 밥 원고를 준비하면서 사이사이 끼어집어넣었는데 원고가 너무 길다며 출판사에서 그 부분들을 추려냈죠. 전 그게 너무 아까와서 여기 쿠킹 노트에 살려냈고요.

    이런 옛날 먹거리 얘기 소재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요. 책으로 출판은 하지 못하더라도 이 쿠킹 노트를 통해 글을 올려볼까봐요...

  • 6. 이규원
    '04.7.7 11:27 PM

    해삼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답니다.

    돈암동에 살었는데 어느날 제가 먹고 싶다고 하여 해삼을 시장에서 사왔답니다.

    해삼이 딱딱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 흐물흐물한 해삼을 썰면서
    내가 딸 때문에 이거를 썰지만 죽겠다는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 7. 잠비
    '06.5.17 12:49 PM

    친구처럼 죽이 잘 맞는 오빠와의 추억이 재미있습니다.
    해삼이 너무 싱싱해서 씹기가 어려우면 맛이 없어요. 그쵸?

  • 8. henna
    '08.1.19 3:00 PM

    전 바로 위에 언니와 죽을동 살동 싸우며 자랐는데, 저도 그 언니와 가장 친하답니다.
    해삼은 탱탱한걸 씹어야 해삼맛을 즐기는게 아닌가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날짜 조회
3347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233 2013/12/22 32,991
3346 나물밥 한그릇 19 2013/12/13 22,605
3345 급하게 차린 저녁 밥상 [홍합찜] 32 2013/12/07 24,903
3344 평범한 집밥, 그런데... 24 2013/12/06 22,280
3343 차 한잔 같이 드세요 18 2013/12/05 14,903
3342 돈까스 카레야? 카레 돈까스야? 10 2013/12/04 10,918
3341 예상하지 못했던 맛의 [콩비지찌개] 41 2013/12/03 14,990
3340 과일 샐러드 한접시 8 2013/12/02 14,101
3339 월동준비중 16 2013/11/28 17,019
3338 조금은 색다른 멸치볶음 17 2013/11/27 16,725
3337 한접시로 끝나는 카레 돈까스 18 2013/11/26 12,481
3336 특별한 양념을 넣은 돼지고추장불고기와 닭모래집 볶음 11 2013/11/24 14,811
3335 유자청과 조개젓 15 2013/11/23 11,837
3334 유자 써는 중! 19 2013/11/22 9,714
3333 그날이 그날인 우리집 밥상 4 2013/11/21 11,218
3332 속쌈 없는 김장날 저녁밥상 20 2013/11/20 13,698
3331 첫눈 온 날 저녁 반찬 11 2013/11/18 16,488
3330 TV에서 본 방법으로 끓인 뭇국 18 2013/11/17 15,746
3329 또 감자탕~ 14 2013/11/16 10,501
3328 군밤,너 때문에 내가 운다 27 2013/11/15 11,567
3327 있는 반찬으로만 차려도 훌륭한 밥상 12 2013/11/14 12,920
3326 디지털시대의 미아(迷兒) 4 2013/11/13 10,957
3325 오늘 저녁 우리집 밥상 8 2013/11/11 16,526
3324 산책 14 2013/11/10 13,362
3323 유자청 대신 모과청 넣은 연근조림 9 2013/11/09 10,823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