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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묘비명 글을 읽고

하늘을 날자 조회수 : 660
작성일 : 2009-06-02 13:46:26
언제였던가요. 1999년이었던가요? 추운 겨울이었던 기억만 나는군요. 아내(당시엔 여자친구)와 함께 마석모란공원에 갔었습니다. 묘들을 둘러보면서 묘비의 비문들을 유심히 읽었습니다. 이름이 덜 알려진 민주열사의 묘비가 제 눈길을 확 잡아끌었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제가 그 정도 수준은 못되었습니다. 제 눈길을 잡아 끈 묘비는 역시 2개. 전태일과 조영래.

서로 가까운 거리에 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여기 한 덩이 돌을 일으켜 세우나니...' 지금은 비문 중에서 이 구절 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 전태일의 묘비. 조영래 변호사의 글과 장일순 선생님의 글씨로 이루어진 바로 그 묘비. 전태일의 고단하고도 불꽃 같았던 삶을 생생하게 되살려놓은 듯한 느낌의 그 비문. 가끔 삶이 고단할 때면, 이곳에 다시 와서 마음을 다잡아야지...하는 결심을 하게 한 바로 그 묘비인데, 그 이후에는 가보질 못했네요. 제 삶이 고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도요.

전태일의 묘비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조영래 변호사의 묘비였습니다. 아무런 비문도 없이 그저 '조영래지묘'라고 다섯 글자만 새겨져있던 그 묘비. 아무런 비문 없는 단촐한 묘라는 것은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직접 보니 또 느낌이 다르더군요. 장기표 선생님의 추도사에서처럼 생의 마지막까지 '한줌 흙으로 돌아가' '절대겸손'을 실천하시고자 하시던 그 모습이 묘비에 잘 투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기 전엔 눈물이 날 줄 알았었는데, 막상 눈물은 나질 않고 그저 담담하더군요. 언젠가 조영래 변호사에 관한 글('평전'이든 '드라마 대본'이든)을 쓰기 시작하게 되면, 꼭 먼저 여기 와서 인사드리고 시작해야지...하고 결심했었는데, 지금은 다시 마석까지 가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군요.  

제 머리 속에서 묘비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위의 두 묘비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묘비입니다. (직접 가서 본 것은 아니지만요.;;) 정음문화사에서 나온 셰익스피어 전집 각 권 표지를 넘기면, 바로 셰익스피어의 묘비에 새겨져있다는 비문이 나옵니다. 영국 스트랫퍼드온에이븐이라는 곳에 있다고 하는군요. 비문은 아주 화려하고 멋집니다. 한 번 전체를 옮겨보겠습니다. (다행히 책이 근처에 있네요.;;;)

판단은 네스터와 같고, 천재는 소크라테스와 같고, 예술은 버질과 같은 사람을, 대지는 여기에 덮고, 사람들은 이를 곡하고, 오림퍼스는 이를 소유하다.

머물지어다, 지나가는 이여. 어찌 그리 빨리 가느뇨. 읽을 줄 알진대 읽을지어다, 심술궂은 죽음이 이 무덤 속에 넣어 놓은 그사람 셰익스피어를. 그가 죽을 때에 산[살아 있는] 대자연도 같이 죽었도다. 그의 이름은, 이에 든 비용 이상으로 더 [이를] 장식하고 있도다. 그가 쓴 모든 것은, 영원한 예술에 남겨 놓은, 그의 천재를 나타내기 위한 몇 페이지에 불과하거든.

셰익스피어야 '말로 먹고 사는' 작가이니 이렇게 화려한 비문이 오히려 제격일 것입니다. 전태일과 조영래의 묘와는 완전히 다르지요.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라면...?

소설가이신 현기영님의 비문이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는 -조영래 변호사처럼- 아주 소박한 비석을 더 바라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노무현지묘' 같은 굉장히 소박한 것은 혹시 어떨지요? 물론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전혀 아니지만요. (그래서 괜한 글인가 싶기도 합니다.;;;)

IP : 121.65.xxx.253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짧아도감동
    '09.6.2 1:51 PM (203.247.xxx.172)

    서버린 수레바퀴

    한 바보가 밀고 갔네 -정도상(소설가)

  • 2. 슬픔
    '09.6.2 2:49 PM (124.1.xxx.82)

    아주 작은 비석하나........
    저는 묘비명까지는 생각해보지는 못했는데...

    그는 우공이산을 꿈꾸었듯 합니다.
    어리석인 노인이 산을 옮긴다.
    그는 바보로 살았지만 세상의 시스템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살전날 그 액자를 떼내었다고 하죠.
    그는 실패했다고 ... 혹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생을 포기한 듯 하네요.
    이제 우리는 그가 던진 화두에 대답을 해야 할 차례가 된 듯 합니다.
    묘비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저도 추이가 궁금하네요.

  • 3. 프리댄서
    '09.6.2 8:59 PM (218.235.xxx.134)

    셰익스피어 묘비명이 정말 정말 화려하네요.^^ 제 기억에 인상적이었던 묘비명은 (조지 버나드 쇼는 너무 유명해서 패스하고) 스탕달의 것이에요.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그리고 개그맨 김미화가 얼마 전에 그런 말을 했다고 들었어요. 나는 사람들을 웃기는 내 일이 너무 좋다, 내가 죽으면 묘비에 이렇게 써줬으면 좋겠다. "웃기고 자빠졌네."^^
    그거 듣고 김미화가 너무 멋져 보이더군요.

    저도 현기영 선생 비문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글쎄.. 노무현 전 대통령 묘비명으로는 별로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격정의 사내'는 노통을 한 마디로 잘 표현해준 것인 것 같아요) 짧지만 큰 울림을 가진 문장이 제격일 듯싶고요.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처럼...

    비석건립위원회에서 시민들이 써서 덕수궁 담벼락에 붙인 추모글들 중 하나를 골라서 비석에 새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던데, 참 기대돼요. 어떤 게 새겨질지...^^

  • 4. 하늘을 날자
    '09.6.3 12:52 PM (121.65.xxx.253)

    짧아도 감동/ 댓글 감사합니다.^^

    슬픔/ 그는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지만, 특히 그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수치심'에 관해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더 생각이 정리되면, 좀더 길게 생각을 밝혀보겠습니다.

    프리댄서/ 김미화님 정말 멋진데요.^^ 그 유연함, 유머러스함이 무척 부럽네요.^^
    스탕달의 비문도 무척 인상적이군요. (몰랐었어요.;;)

    근데, 갑자기 그의 <적과 흑>을 읽다가 짜증나서 내던졌던 기억이 나네요. 줄리앙 소렐인가? 아무튼 그 정말 찌질한 남자주인공. 으... 다시 생각해도 짜증이... 어찌 그런 찌질이가 있는지... 생각은 무지하게 많이 하고, 야망도 무척 큰 듯 한데-나폴레옹을 끝없이 동경할 정도로-, 하는 짓은 어떻게 하나하나가 그렇게 찌질한지... 가정교사로 있던 집에서 귀부인의 마음을 얻어내려고 애쓰던 그 모습에-그것이 마치 엄청난 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 귀부인의 손을 한 번 잡아보려고 용기를 쥐어짜내던 그 모습에 더이상 짜증을 참지 못하고 그냥 책을 던져버렸었어요.

    막상 이렇게 불평 글을 쓰다 보니 '좀더 참고 읽어볼 걸...'하는 후회도 잠깐 드는군요. 어쨌든 '고전'인데...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마르고 닳도록 읽은 게 다 이유가 있을텐데... 좀더 노력해 볼 걸... 하는 후회가 (잠깐) 드네요.

    저도 어떤 글이 노 전 대통령 묘비에 쓰여질지 무척 궁금하네요.

    버나드 쇼 비문은 다시 생각해도 재밌어요.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니... 하하. 꼭 한 번 버나드 쇼 묘비도 가보고 싶은데... 셰익스피어 묘비도 물론이고요. 에공. 언제나 기회가 되려나... ㅠ.ㅠ

  • 5. 아무나 작가
    '09.6.4 2:12 AM (82.23.xxx.15)

    감동이라 하시면 할말이 없지만, 정도상은 더러운 비화가 있기 땜시 패스.
    저도 공선옥이나 안도현의 글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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