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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아르바이트 끝에 나홀로 일본여행 다녀왔어요.

벚꽃 조회수 : 996
작성일 : 2008-04-07 10:41:14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이 유치원 보내고, 남편은 볼일 보러 나가고
컴퓨터를 켜서 디카의 사진을 옮기다가
습관처럼 82에 들어와 몇 자 끄적여 봅니다.

작년 여름, 아이가 33개월이던 때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붙어 있는 나날이 힘도 들고 싫증도 나고
그러면서 "아, 나 혼자 3,4일만 혼자 여행가면 소원이 없겠다." 싶은데
남편 월급으로는 대출이자 갚고 생활비 하면 남는 게 없고 답답하더군요.

근처에 친구 언니가 사는데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제일 친한 친구 언니라서
중학교 때부터 봐온 사이거든요.
언니가 돈은 되지 않지만 평소 하고 싶어하던 일을 시작해서 집안이 정신없다고 푸념하길래.
며칠을 고민하다가
"언니, 내가 언니네 집안일 좀 도와줄테니까 아르바이트 시켜줄래?"
하고 말을 꺼냈습니다.
언니는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내기는 그렇지만 내심 바라고 있었다면서 흔쾌히 승락했구요,
막상 친구는 제 친정 엄마가 아시면 어떡하냐고, 그리고 친한 사이에 그런 일 하면 사이 망친다고 좀 걱정하면서도 둘이서 알아서 하라고 하구요.

일주일에 두 번, 오후에 4시간씩 하기로 하고 저는 일당 3만원을 불렀습니다만
언니는 월별로 계산해서 30만원으로 하는 게 편하다고 그렇게 하자고 고집하더군요.
7월부터 아이 데리고 다니면서
세탁소 옷 찾고 맡기고, 세탁기 돌리고 널고, 청소기 돌리고 스팀 청소기 하고, 설거지 하고 욕실 청소.
간단한 집안 정리에 가끔은 베란다 청소.
언니와 둘이서 할 일 목록을 만들면서 세탁기 헹굼 횟수같은 세세한 것까지 의논했기에
아이가 TV보면서 좀 심심해하는 거 말고는 할만 하더라구요.
그것도 우리집에서는 안 나오는 플레이하우스디즈니 채널이 나오니까 괜찮았구요.
평소에 TV를 잘 안 보여주니까 하고 위로하면서 넘어갔습니다.
처음에는 현관부터 욕실까지 갈 때마다 한 공간씩 대청소하느라 좀 힘들었지만
나중엔 반찬 한 가지 만들어서 있는 거랑 같이 저녁도 먹고 오고
언니네 아이들이 일찍 올 때는 같이 밥 먹고 저희 애랑 놀아 주기도 하고
언니가 일찍 들어올때는 저희 집에 차로 데려다 주기도 하고
그렇게 2월까지 8개월동안 아르바이트 아닌 아르바이트를 잘 했습니다.

뭐 아무리 친한 언니라고 해도 서로 마음 상할일이 생기려면 충분한 기간이었습니다만
언니가 워낙 일을 맡기면 믿어주고 격려만 하는 스타일인데다가
저 역시 이왕 하려면 잘 해야지 하는 마음이 강해서 끝까지 잘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주에 욕실 청소를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밤에 언니가 휴대폰 전화를 해서
"야, 너 이거 어떻게 한 거야? 내가 그렇게 닦았도 안 지워졌는데. 난 그동안 뭐 한 거니?" 했을 때
"그거야 뭐 전문가의 노하우지. 뭘 그런걸 알려고 해?" 했던 일.
재활용하는 날 아침에 언니한테 문자 보내서 이번 주에는 꼭 좀 치우라고 재촉하던 일.
언니네 큰 애가 비어있는 빨래통에 옷을 넣으면서 "죄송해요, 이모가 오늘 세탁기 돌렸는데 또 빨래가 생겨서."했던 날. (이제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이런 말을 하네요.)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가 열이 나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던 날
그래도 좋은 기억만 남을 것 같아요.

언니는 더 하라고 잡는데, 제가 직접 가사 도우미 사무실에 연락해서 마땅한 분 구해서 인수인계까지 하고 마무리 지었어요.
지금은 그 분이 잘 해주고 계세요.
집안에 다른 사람 들여서 일 시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집안일까지 혼자서 허덕이던 언니에게 숨통을 틔게 해주고,
아이랑 둘이서 답답해하던 저에게는 여행이라는 목표를 위한 실현자금을 벌게 해주고.
윈-윈 이었다고 자화자찬하면서 혼자서 기특해하고 있어요.

30*8=240만원에서
150만원은 여행비하고, 30만원은 전집 한 질 사고, 30만원은 남편 코트 사고 30만원은 저금해야지
하고 꿈에 부풀었습니다만은,
작년 말에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바람에 당분간 여행 생각을 하기는 어렵게 되었구나 포기했었죠.
직장을 그만두긴 했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일이 꼬이면서 힘들어지고
재취업을 하려면 여러가지로 조건을 낮춰야 하는 것이 맘에 안 들었던 남편이 작은 음식점을 인수했거든요.
아무 것도 확실치 않았던 작년 겨울이 저희 세 식구에게는 제일 막막했던 시간이었나 봐요.

가게 중도금 치르고 재오픈 행사 준비하면서 남편이 "당신 아르바이트 한 돈 남았지?"하고 묻더군요.
사실 7,80만원은 생활비에 보탰습니다만 그동안 실업 수당이 120만원 가까이 나왔기에 생계는 끄떡없었죠.
퇴직금으로 아이 유치원 1분기 등록금을 내면서
나중에는 종일반으로 돌리고 뭐라도 해야겠다, 학습지 교사라도 하려면 일단 살을 빼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통장 잔고가 아슬아슬해지려는 무렵
남편이 가게를 계약한 거에요.

그동안 힘들었다면서 당신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계획했던 일본 여행 다녀오라면서 날짜를 잡아주더라구요.
4월 3일에서 6일까지.
부랴부랴 그날밤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호텔을 예약하고
정신없이 열흘쯤 준비해서 다녀왔어요.
작년 여름에 처음 여행을 가고 싶다 생각했을 때만큼 절실하지는 않았지만
(지난 달에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해서 이젠 덜 힘들구요.)
역시 혼자만의 시간은 달콤하더군요.
가고 싶던 곳 세 군데 정도 다니고, 먹고 싶던 것 서너가지 먹고 나니
금세 3박 4일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제 공항에 마중나온 남편과 아들을 만나면서
제 일상이 한층 고마워지더군요.

다음에, 한 5년쯤 후에나 해외여행을 꿈꿀 수 있겠지만
그때는 꼭 셋이서 같이 가야지 결심했어요.

도쿄는 벚꽃이 한창이더군요. 슬슬 지기 시작하는 곳, 이미 져버린 곳도 많이 보였구요.
오늘 아침 아파트 단지의 벚나무가 몇 그루 꽃망울을 틔운 것을 발견했어요.
아무래도 올 봄, 저는 꽃구경을 두 번 하려나 봅니다.

IP : 222.233.xxx.84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정말
    '08.4.7 10:50 AM (125.178.xxx.149)

    수고 많으셨어요.

    행복한 여행이었을 거 같아 부럽기도 하고 괜히 제가 더 기분이 좋네요.

    음식점도 잘 되시길 바래요~ ^^

  • 2. 미소
    '08.4.7 10:51 AM (129.67.xxx.201)

    댓글 달려고 로긴했어요.

    글을 읽는데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참 예쁘게 사신다 싶어요. 음식점 잘되셔서 5년이 아니라 3년만에 또 여행가실수 있으시길 바래요.

  • 3.
    '08.4.7 11:08 AM (222.106.xxx.245)

    저도..
    그렇게 남의 집 깨끗하게 해주는 책임감으로
    우리 집 안팎 쓸고 닦고
    음식 좀 잘 해먹이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누릴 자격이 있으시군요.
    그리고 좋은 관계있으신 거..부러워요.

  • 4. 토닥토닥
    '08.4.7 12:01 PM (220.117.xxx.22)

    원글님 너무 대견하고 기특해요~^^
    요렇게 이쁘고 야무진 동생있었음 좋겠네요 ㅎㅎ
    아무리 친한 관계라고 해도 돈이 왔다갔다 하다보면
    서로 감정 상할 일도 많고 차라리 아니함만 못하게 되던데...
    원글님과 그 언니되시는 분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컸나 봅니다
    좋은 기억으로 일끝내시고 목표하시던 여행까지 다녀오셨다니
    제가 다 뿌듯합니다~ 정말 애쓰셨어요~ 행복하세요~^^

  • 5. 벚꽃
    '08.4.7 1:03 PM (222.233.xxx.84)

    모두 감사드립니다.
    남편 가게 잘되길 빌어주신거, 생각도 못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뿌듯한 기분 나누고 싶었어요.
    밀린 집안일 정리하느라 오전 시간이 다 갔네요.
    그래도 남편이 저보다 자상하게 아이를 챙겨줬네요.
    서울대공원도 데리고 가고 했더라구요.
    토닥토닥님, 저 야무지지는 못해요.
    제가 생활력이 강했다면 남편도 의지가 많이 되었을텐데
    지금도 그냥 집에서 아이만 잘 키우고 책이나 읽으라면서 가게 일은 안 하는 게 돕는 거래요.
    그래도 모레랑 글피는 전단지라도 돌리려구요.
    모두 행복하세요.~

  • 6.
    '08.4.7 1:15 PM (210.180.xxx.126)

    오랜만에 보는 훈훈한 글이네요.
    원글님 같은 동생이나 올케가 있었음 좋겠어요.
    두 분 분명 잘 사실것 같은 예감이 팍 듭니다. (저 육감이 잘 맞아요 ㅎㅎ)

  • 7. 화이팅!
    '08.4.7 3:55 PM (218.54.xxx.234)

    아, 정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착한 원글님과 아내 챙기고 아이들 위해주는 남편 분을 보니
    금방 불 일듯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어려운 순간이었을 것 같은데 아내의 수고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따뜻하게 챙기는 원글님 남편분을 뵈니 음식점이 아주 아주 잘 될 것 같아요.

    늘 지금의 마음을 간직하고 사세요.
    음식점 대박 나시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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