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0년 되었고 애 낳고 키우고 어쩌고 하는 동안
1년, 6개월, 2년... 이런식으로 일을 하기는 했지만 남편에 비하자면 월등히 임금이 적고
대부분의 기간이 전업이었어요.
모든 지출을 남편 명의로 몰아주는 게 너무 당연해서
제 명의 카드는 제 소유의 계좌 체크카드 하나 있는 외에 남편 가족카드를 발급받아 살았죠.
(제가 전업을 하는 것은 남편과 합의된 사항이고, 여러 생장과정의 정황과 가정사의 이유로, 남편은 자신이 아내의 모든 지출을 전적으로 감당한다는 사실에서 자존감을 얻는 사람이기에 이 글이 전업 논쟁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중간에 일을 했던 것은 저나 제 남편을 포함한 사람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결혼 전 하던 일의 연장으로 했던 거였을 정도라, 제가 번 돈은 그냥 제 용돈 삼아 제 통장에 차곡차곡 적금하듯-차 사고 그럴 때 남편이 털어먹기도 합니다. 하하하)
가족카드의 장점은 주 소유주가 남편이지만 제 이름으로 된 카드도 발급이 되어서
각종 온라인 페이(네이버, 쿠팡 등등과 카드 간편결제 등등)에 등록할 수 있다는 거고
가족카드의 단점은 제가 사용을 해도 사용 내역이 주 소유주인 남편에게 메시지가 날아간다는 겁니다.
이 부분, 전혀 신경 안쓰였어요. 남편도 20년 내내 무슨 얘기를 한 적이 없고요.
그냥 낮에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띵똥띵똥 무슨 까페 얼마, 쿠팡 얼마 이런게 날아가면 남편은 음, 내 마누라가 지금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군, 쿠팡에서 뭘 샀군. 하고 끝.
사람이 돈 안쓰고 살 수 있나요. 제 일거수 일투족이 남편에게 다 보고가 되는 셈이지만 그게 뭐요.
친하게 지내는 동네 엄마는 이런 저를 신기해하더라고요. 신경쓰이지 않느냐고요.
사실 제일 친한 고등학교 친구도 전업인데, 이 친구는 그 띵똥띵똥이 신경 쓰여 자기 카드를 쓴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연말정산할 때 신고하면 된다고. 여기도 남편이 월급 전액을 주면 그냥 자기 계좌로 일정 금액을 옮겨놓고 쓰다가, 계좌가 좀 비면 채워넣고 하는 식이라 기본적으로 저와 비슷하죠.
여튼. 이렇게 살아왔는데.
아파트너 앱이 있잖습니까? 이 앱은 차가 들어가고 나가고를 다 메시지로 보내줘요. (그 앱을 설치해 둔 남편과 저 둘 다에게)
요즘 저는 다시 일을 잠시 하는 중인데, 한대 있는 차를 제가 쓰다보니 남편은 제가 집에서 몇시에 나가는지 몇 시에 귀가하는지를 손바닥위에서 보는 거죠. 저는 그 앱을 아파트 이사온 직후부터 써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남편은 최근에 그 앱을 깔아서(저희 부부는 카드 발급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게 신규 앱을 까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메시지를 받는 게 그렇게 신기한가봐요. 며칠 전엔 야 너 오늘 퇴근 빨랐다? 하더군요.
게다가, 이번에 차를 제네시스로 바꿨더니 제네시스 전용 앱이 있드만요.
운전 점수가 뜨고 블라블라블라....
남편이 지금 차를 바꾼 직후라, 아주 신이나서 맨날 이 제네시스 앱만 들여다보고 있나 봅니다.
제가 퇴근이 빨랐던 그날 아주 제네시스 앱으로 공회전 시간까지 체크해 가며 오늘 차가 안막혀서 공회전 시간이 엄청 짧아. 이러지 않나
어제 남편이 스크린 샷 하나를 톡으로 보내주는데, 제 운전 점수(네, 차는 제가 쓰거든요.)를 찍어서, 운전 점수 좋네. 이러고 보내는데,
으아.... 처음으로 손바닥 위 손오공 된 기분이 들면서,
기술의 발달이라는 게 정말 인간친화적인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처럼 무디고 투명하게 사는 인간조차, 남편이 카드 알림을 통해 저의 행방을 아는 것이 오히려 안전에는 도움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던 불안장애 인간인 저조차
남편에게 감시당하는 기분이라 답답함을 느꼈어요.
결혼 20년만에 처음입니다.
물론, 남편도 기본적으로 이런 부분에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지금 아파트너 앱도, 제네시스 앱도 신기해서(그리고 제네시스 사랑해서 ㅎㅎㅎ) 잠깐 그런다는 거 압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안들여다 볼 거예요. 차 사고 초기에는 블랙박스도 자기 폰으로 실시간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하던데(아이나비) 이거 어떻게 하는거지 고민하다 그거까지는 안하더라고요. 그게 감시의 의미가 아니라는 건 저도 압니다. 남편도 그냥 신기하고 내사랑 제네시스 잘 있나 보고 싶을 뿐이었고 결정적으로 귀찮아서 안했다는 것도 압니다.
제가 말하는 건... 앞으로 아파트너 말고, 제네시스 앱 말고도 다른 각종 첨단 기술이 등장하겠죠.
20년 전의 사람들이 자동차 블랙박스로 불륜을 잡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겠나요. (물론 이건 기술의 순기능에 해당하겠지만요.)
빅 브라더의 세상이 오고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