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화가친燈火可親’
책을 좋아해서 신간 인문 분야 도서를 구입할 때에는 항상 번역의 질과 번역자의
경력을 확인하고 출판사와 도서의 디자인, 그리고 제본 상태 등을 꼼꼼히 살펴
본 후 ‘구입 결정’을 하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인문 고전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오거나 원전原典으로부터 처음 번역돼 출간
된다는 언론매체의 소식을 들으면, 서점에 들러서 ‘생물’을 직접 확인해보고
구입하곤 하지요.
그런데요, 오래 전에 문을 닫은 과거 명문출판사의 도서들 중에서 아직도 그러한
번역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최고의 <명 번역 고전문학> 작품들이 있다는 것
을 알고 계시나요?
지난 세기 국내에는 문학 위주의 <정음사>와 <을유문화사>라는 두 대형출판사가
양대 산맥을 이루어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었는데요, <을유문화사>는
다행히도 살아남았지만 경쟁 관계였던 <정음사>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
폐업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출판사만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게 아니라 그 출판사에서 발행했던
좋은 책들까지 더 이상 인쇄되지 못하고 모두 사장돼버리고 만 것이지요.
부모님을 비롯한 중년 세대가 즐겨 읽었던 불멸의 문학으로 서가에 꽂힌 책들 중
<세계문학전집> 100권을 비롯해 <도스또옙스끼전집>, <셰익스피어전집>,
그리고 <아라비안나이트> 등인데요, 지금도 헌책방에서 간혹 낱권으로 어쩌다가
보게 되는 추억의 고전문학 책들입니다.
몇 년 전 국내의 전공교수들로부터 <교수신문>을 통해 국내에서 지금까지 번역,
출간된 문학작품들 가운데 가장 높은 『번역 평점』을 받은 서양 고전문학
작품들을 소개한 적이 있었고, 또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명 번역으로 평가되었던
고전문학들인데 대부분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번역된 작품들이지요.
비록 서양 언어로 된 인류 공통의 가치인 보편성을 획득해 세계인들이 애독하는
도서들이지만, 국내의 1세대 서양 언어 전공자들에 의해 혼신이 담긴 각고어린
작업 끝에 ‘한글’로 재탄생해서, 모국어의 혈통이 흐르고 있는 이 땅의 번역 유산
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은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현대에도 왜 구시대 지식인
들의 ‘번역’을, 신세대의 지식인들이 뛰어넘지 못하는 걸까요?...... 당시 열악한
제반 사회 환경과 경제적인 궁핍이 선연하게 연상되는데도 말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아마도 서양 언어 1세대들의 장점은 <한문 세대>이면서 우리말의
어휘력이 폭넓고 감정의 표현력에 있어 탁월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한문과 우리말을 조화롭고 적시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어휘의 선택에
자유로웠고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으로서 일어 번역본들도 참조해 더 좋은 표현력
을 채굴해내어 다듬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겠지요.
‘모든 고전은 시대마다 새로이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이 현대의 후세대 번역가들
에게는 시대적 소명임을 늘 깨어 되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돈 끼호떼》는 1964년 초판본, 작년 봄 전북 전주의 한 헌책방에서 인터넷으로 양질의
상태로 된 걸 구입했지요. (예전에 이 책을 2번 읽은 추억이 있어 다시 구입함)
원래 이 책은 1,2권으로 되어 있지만 <정음사>에서는 1권만 번역돼 출간되었습니다.
◆ 절판된 명 번역의 『 서양 고전문학 』 작품들 ―
<정음사> 발행 『세계문학전집 100권』: (1959년 ~ 1980년대)
햄릿: 셰익스피어 작 / 최재서 번역
캔터베리 이야기: 쵸오서 작 / 김진만 번역
안나 까례니나1,2: 톨스토이 작 / 동완 번역
돈 끼호떼1: 세르반테스 작 / 최민순 번역
<을유문화사> 발행 『세계문학전집 100권』: (1959년 ∼ 1975년)
신곡: 단테 작 / 최민순 번역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작 / 김학수 번역
1960년대 초에 나온 국내 최초 <을유문화사> 판
《신곡》번역본 표지, 세로쓰기
1950년대 말 천주교에서 발행하던 <경향잡지>에
연재했던 《신곡》번역을 <을유문화사>에서 다시
세계문학전집으로 펴낸 것입니다.
▶ 최민순 번역 《신곡》 제1곡 지옥편 1절~9절
한뉘(한평생) 나그네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 잃고 헤매던 나
컴컴한 숲속에 서 있었노라.
아으, 호젓이 덧거칠고 억센 이 수풀
그 생각조차 새삼 몸서리쳐지거든
아으, 이를 들어 말함이 얼마나 대견하고!
죽음보다 못지않게 쓰거운 일 있어도
내 거기에서 얻어 본 행복을 아뢰려노니,
게서 익히 보아 둔 또 다른 것들도 나는 얘기하리라.
.................................
▶ 김운찬 번역 《신곡》 제1곡 지옥편 1절~9절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아, 얼마나 거칠고 황량하고 험한
숲이었는지 말하기 힘든 일이니,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되살아난다!
죽음 못지않게 쓰라린 일이지만,
거기에서 찾은 선을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거기서 본 다른 것들을 말하련다.
1987년 개정판 《신곡》
을유문화사:
현대 맞춤법으로 개정한 상‧하권, 가로쓰기
최민순(1912 ~ 1975) 신부님은 한국 가톨릭계에서 영성 신학자로 저명하신 분이신데요,
한국어를 비롯해 라틴어 등 7,8개 국어에 능통하셨다고 합니다. 시인이시기도 해서
시적 운율을 살린 유려한 문체와 순수 우리말을 적절하게 사용해 《신곡》을 번역하신
분으로 유명하고 《돈 끼호떼1》 도 번역.
현재도 《신곡 》 번역은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본을 참고 하는 등 최고의 ‘명 번역’으로
학계와 독서가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데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가 주관하는 제2회
<한국 번역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번역본입니다.
한편 구약 《시편》번역본은 <가톨릭 기도서>에 수록돼 지금도 미사 전례에서 사용되고
있지요.
최민순(1912 ~ 1975) 신부, 영성신학자. 전북 진안 태생
도스토예프스키의 <을유문화사> 초판본 《죄와 벌》표지,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의 <운동하는 죄수들>: 1890년 작
1980년
<을유문화사>
판 《죄와 벌》: 외형만 새롭게 바뀐 세로쓰기
이 책을 번역하신 김학수(1931 ~ 1989) 교수님은 러시아 문학 1세대로서 많은 작품들을
국내에 소개한 실력가이신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네요. 4,5년 전에도 인터넷을 통해
헌책방에서 간혹 검색되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번역에 대한 입소문 때문인지 근래에는 거의 구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 되었지요.
신촌의 한 숨어 있던 책방의 천정 아래 있는 걸 우연히 발견!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답니다.
교수님이 번역하신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1.2》 역시 좋은 번역본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현재 발행 중 ―
생전의 김학수(1931 ~ 1989) 외대 노어과 교수, 평양 출생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최고의 명 번역으로 평가받은 이 책들을, 시중은 물론 전국의 헌책방에서도 쉽게
구할 수가 어렵다는데 있겠습니다. 《신곡》의 경우, 현재 ‘교보문고 장터’와
‘알라딘 중고샵’에 책들이 올라와 있지만 1권당 15만원~45만원에 거래되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훌륭한 번역 작품들이 후세대 독서인들에게 전승되지 못하고 단절돼 일부
‘도서 소유자’들만이 읽게 된다는 것은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앞으로도 재출간이 쉽게 될 것 같지도 않아 이 책들의 희소가치는 더욱더 클 수
밖에 없겠지요.(도서관의 소장본 이용은 가능할 것임)
지난6월 《신곡》을 출간했던 출판사 편집부에 찾아가 담당자에게 이러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독서인들의 의견을 전하면서 재출판을 부탁했는데, 출판사 측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네요. 그동안의 상황이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찾아가서 알아볼 생각입니다.
혹시 부모님이나 중년 세대가 읽고 난 후, 서가의 한구석에 먼지 쌓여있을 이 책들
을 낡은 책, 혹은 작은 글씨로 된 세로쓰기의 구시대 책이라고 해서 버리지
마시고,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서 계속 읽게 하셨으면 합니다.
위의 <절판된 명 번역본> 책들은 우리 집에 모두 소장하고 있는 책들인데요,
독서의 계절 가을에 《햄릿》중에서 명대사만을 뽑아 게시판에 올려 보겠습니다.
깊어가는 가을과 독서, 그리고
인생이 무르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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