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정도 된 유기 그릇입니다. 젊은 시절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입니다. 갓태어난 아들에게 젖 한번 못 물려주셨습니다. 주인 없는 그릇들은 녹 슬어 버려졌고, 그 중 남은 시커먼 그릇 몇 개를 아들은 집으로 가져왔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이 흘렀습니다. 그릇은 손자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수소문끝에 유기 공방 한 곳에서 기계로 80년 녹을 닦아내었습니다.
80년만에 그릇에 음식이 담깁니다.
할머니의 그릇에 손자가 밥상을 차려봤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서프라이즈입니다. 동죽, 바지락, 아욱을 넣고 된장국을 끓였습니다. 집된장과 백된장을 섞어서 풀어낸 국입니다. 메인은 돼지 불고기과 상추쌈입니다. 살짝 얼린 앞다리살을 샤브용 소고기처럼 얇게 썰어야 맛있는데, 아쉬습니다. 돼지 불고기 양념에도 백된장 한 숟가락을 넣습니다. 제 나름의 양념 비법입니다.
반찬 하나, 오징어를 볶았습니다. 물 안나오게 살짝 데쳐서, 야채와 함께 무쇠웍으로 불 맛을 살려봅니다.반찬 둘, 감자 조림입니다. 반찬 셋, 두부 조림입니다. 반찬 넷, 어묵 볶음. 반찬 다섯, 멸치 볶음. 헉헉헉. 그럼에도 반찬 그릇이 세 개가 더 남아 있습니다. 더 이상은 못 만들겠습니다. 이래서 한식은 어렵습니다. 꼼수를 부립니다. 반찬 여섯, 아내가 담근 김치를 담습니다. 반찬 일곱. 양장 소세지를 삶습니다. 반찬 일곱. 피클을 담습니다.
차례도 모시고, 제사도 지냅니다. 아버지에겐 중요한 일입니다. 기억할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고,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의리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그래서 작년부터 제가 모시기로 했습니다. 걱정하는 아내에게 말합니다. '시장은 내가 본다. 음식도 내가 한다. 내 부모에 대한 의리는 내가 지킨다.' 아내의 눈에서 리스펙트가 떨어집니다. 옹산의 노규태가 저를 만났으면 이혼 당하지 않았을텐데. 안타깝습니다.
대신 아주 간소하게 상차림을 합니다. 고기전은 우둔살을 얇게 저며 부친 육전과 동그랑땡 중 하나만, 생선전은 동태전 아니면 부추를 썰어 넣은 새우전 중 하나. 육류는 돼지 갈비와 소갈비찜 중 하나. 생선은 도미가 사이즈가 좋으면 하고, 아니면 생략합니다. 제가 간장 양념의 소고기 산적을 좋아해서 동그랑땡을 올리면 소고기 산적을 추가하기도 합니다. 나물은 고사리와 시금치, 숙주까지는 합니다. 여기에 탕국 끓이면 끝입니다. 과일도 배와 사과만 올립니다. 만들어서 잘 먹지 않고 냉장고 자리 차지하는 것들은 다 없앴습니다.
막 부쳐낸 전과 칭따오는 예술입니다. 전을 부치는 중간에 맥주 한 잔 정도는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다 식혀서 맛없게 먹는 비합리적 상차림이 차례와 제사 음식이긴 합니다. 타자의 가치관과 나의 합리성의 조율은 항상 어렵습니다.
세월이 또 흘러 우리 부부가 늙었을 때 딸과 아들에게 바람이 있습니다. 통장 하나를 만들어 줄테니 명절에는 남매가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비싸고 좋은 식당에서 맛있게 식사하면서 엄마 아빠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엄마는 따뜻하게, 아빠는 아이스로 산미 좋은 커피 한 잔만 올려주면 충분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