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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

J 조회수 : 1,226
작성일 : 2005-02-20 17:25:59
기억나시나요?   ^^
몇학년 때인지는 잊었지만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글인데...
제가 참 좋아하며 배우고 여태까지 좋아하고 있는 글 중 하나랍니다.  

그런데...오랜만에 읽어보니 뭐랄까 참 보수적(?)이고 엄청나게 진지한 문체에 적응이 잘 안되네요. ^^  한자어도 무지 많고요.  
그래도 뜻은 좋은 것 같아서, 혹시 저처럼 또 좋아하셨던 분들 계시지 않나 해서 올려봅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글들이 참 좋기는 한데 워낙 이리저리 뜯어발겨가며(--;;) 배우는지라 막상 배울 땐 음미할 여유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잠시나마 학창시절로 돌아가보시길... (저랑 세대가 비슷하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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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
              
                                                                                                                                                           김태길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整理)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姿勢)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有言無言)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約束)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充實)하게 실천(實踐)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整頓)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方法)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반성(反省)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想念)을 어떤 형식으로 거짓 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自己自身)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自畵像)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現在)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過去)와 현재를 기록(記錄)하고 장래(將來)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里程標)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作業)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感情)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妙方)이기도 하다. 만일 분노(憤怒)와 슬픔과 괴로움이 있거든 그것을 종이 위에 적어 보라. 다음 순간 그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客觀的)인 사실(事實)로 떠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餘裕)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整頓)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에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막거나 간섭(干涉)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被害)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商品)이나 매명(賣名)을 위한 수단(手段)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친한 가까운 벗을 독자로 예상(豫想)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低俗)한 이해(利害)와는 관계(關係)가 없는 풍류가(風流家)들의 예술(藝術)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高尙)한 취미(趣味)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眞實)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內面)을 속임 없이 솔직(率直)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감동(感動)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滿足)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稱讚)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發表)해도 손색(遜色)이 없겠다."

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稱讚)과 격려를 듣고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 용지(原稿用紙)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雜誌社)에 보내기로 용기(勇氣)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想像)하지 못하면서, 활자(活字)의 매력(魅力)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雜誌)나 신문(新聞)은 항상(恒常) 필자(筆者)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記者)들의 수첩에 등록(登錄)된다. 조만간(早晩間) 청탁(請託)서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訪問)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自進投稿者)로부터 청탁(請託)을 받는 신분(身分)으로의 변화(變化)는 결코 불쾌(不快)한 체험(體驗)이 아니다. 감사(監謝)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受諾)하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원고(原稿)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漸次)로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自我)가 안으로 정돈(整頓)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情熱)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記錄)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壓力)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質)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決心)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 길을 내 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人事)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며, 또는 청탁(請託)을 전문(專門)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 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債務者)의 위치(位置)에 서게 된다. 돈 빚에 몰려 본 경험(經驗)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心情)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趣味)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苦役)으로 전락(轉落)한다.

글이란, 체험(體驗)과 사색(思索)의 기록(記錄)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時間)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餘裕)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흐를 때, 그 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一旦) 붓을 들면 심혈(心血)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없이 성실(誠實)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一部)의 사실을 전체(全體)의 사실처럼 과장(誇張)해서도 안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人氣)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境遇)에서 흔히 발견(發見)된다. 자극(刺戟)을 갈망(渴望)하는 독자나 신기(神奇)한 것을 환영(歡迎)하는 독자의 심리(心理)에 영합(迎合)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墮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罪惡)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衒學)의 허세(虛勢)로써 자신을 과시(誇示)하는 일이다. 현학적(衒學的) 표현(表現)은 사상(思想)의 유치(幼稚)함을 입증(立證)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虛榮)스러움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稱讚)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表明)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自我)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成長)시키는 일이다.


IP : 211.207.xxx.207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헤르미온느
    '05.2.20 5:54 PM (218.153.xxx.174)

    윽.. 마지막 문장에서 발길이 멈춰지는데요... 자아가 깊고 크게 성장해야 한다는데,
    언제나 크고 깊게 성장해서 글을 즐겁게 쓸 수 있으려나...휴~...^^
    J님, 오늘도 회사에?

  • 2. J
    '05.2.20 6:09 PM (211.207.xxx.207)

    회사는요... ^^ 집이랍니다.
    지금 감자탕 레시피 화면에 띄워놓고 컴과 주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한 냄비 끓이고 있는 중이에요. 잘 돼야할텐데...

  • 3. 지성조아
    '05.2.20 9:42 PM (221.149.xxx.18)

    J님의 시원하고 깔끔한 글들이 괜히 나오는게 아니군요.
    진솔하고 꾸밈없는 J님의 글....늘 열심히 읽는 팬이에요~~^^
    맞아요.. 교과서에 이런 좋은글들 많았을텐데...글은 안보고 단어만 뜯어서 공부했던 기억만...
    J님 덕분에 어렴풋이 학창시절의 국어시간이 떠오르네요~~

  • 4. jongjin
    '05.2.20 10:43 PM (210.126.xxx.10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5. 장미정원
    '05.2.21 1:21 AM (221.155.xxx.20)

    새삼스러운 것 같아요.
    학창시절에는 시험때문에 글의 진가를 몰랐던 것 같아요.
    또 너무 어렸다고나 할까요..
    전 몇년전부터 정말 책다운 책을 읽어본 기억이 나질 않아요 ㅜ.ㅜ
    너무 좋습니다.
    머리속이 꽉 차는 느낌이예요.
    감사합니다 J님 ^^

  • 6. J
    '05.2.21 10:42 AM (211.207.xxx.83)

    지성조아님... ^^ 시원하고 깔끔한....ㅎㅎ 닭살돋아요. 허구헌날 스뎅 얘기구먼.... ㅋㅋ
    종진님... 좋은 글이 되었다니 감사해요~
    장미정원님... 저랑 같은 세대시군요~! 그렇죠? 그 나이에 글의 맛을 음미한다는 건 나이로 보나 교육현실로 보나 무리였었던 것 같아요.

    지나고 나서야 좋은 것을 느끼는 일들이 인생에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모든 지나가버린 것들이 다 아름답기만 하지요....

    혹시 그런 적 없으세요?
    내 눈으로 보기엔 무척 촌스럽고 안 이쁘게 찍힌 스냅사진을 어쩌다 몇 년 지나서 우연히 보게 되면...
    어머, 이게 나였어? 그땐 창피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는데...예뻤네....? ^^
    어리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예뻤던 시절이 나한테 있었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 같은 경험 말이죠.

    (이렇게 쓰고 보니...제가 무척이나 나이 많은 사람같네요. 안그래도 글로만 뵙다가 처음 만나는 분들이 저한테 잘 하시는 말씀이 중년 이상의 나이가 많은 주부인줄로 아셨다고 하시던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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