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두 명과 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심지혜( 45 )씨는 요즘 매일 아침 태국 환율을 확인한다.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태국 화폐 1바트당 37 원이었던 원화 가치가 비상계엄 사태를 겪으면서 1바트당 42 원까지 하락(환율은 상승)하더니 최근에는 45 원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초 자녀당 2000 만원 정도였던 학비가 원화 가치 하락만으로 올해에는 2250 만원이 됐다. 심씨는 “올해 학비만 연간 500 만원이 추가로 든 데다 생활비도 만만찮다”며 “최근에는 태국의 정치·경제 상황이 더 좋지 않은 데도 원화 가치가 오를 기미가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 내년 초 유럽 여행을 준비 중이던 대학생 김소연( 23 )씨는 최근 항공권 결제를 앞두고 여행지를 바꿔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유로당 원화 환율이 1700 원을 뚫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1유로가 1450 원 수준이었지만, 최근엔 1700 원대를 넘나들며 원화값이 16 년 만의 최저치를 찍었다. 김씨는 “유럽 물가도 비싼데 환율까지 이렇게 오르니, 감당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원화가 녹아내리고 있다. 달러 대비 약세가 지속하는 가운데 다른 나라 통화에 대해서도 원화 약세가 두드러지는 ‘고환율’이 고착화하는 흐름이다.
21 일 달러당 원화값이 1475 원대까지 떨어지며 약 7개월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미국의 관세전쟁이 본격화했던 지난 4월 9일( 1472 원)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월간 종가 기준 달러당 원화값의 연평균치는 1414.08 원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8 년( 1394.97 원)보다도 낮아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다.
특히 이달 들어 원화는 주요국 통화 중 가장 큰 약세를 나타냈다. 21 일 종가 기준 원화 가치는 달러 대비 3.29 % 떨어져(환율 상승) 새 정부의 확장재정 기대감으로 약세를 보인 일본 엔화( -2.11 %)보다 낙폭이 훨씬 컸다. 같은 기간 유로( 0.1 %), 파운드( 0.54 %)는 달러 대비 강세였다.
동남아 신흥국 통화인 말레이시아 링깃( 0.75 %) 역시 달러에 대해 강세를 보였고, 태국 바트( -0.11 %)·필리핀 페소( -0.44 %)는 약세였지만 원화보다 낙폭이 훨씬 작았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정치적 불확실성이 줄고 경상수지가 흑자를 이어가는 상황에서도 원화가 글로벌 ‘최약체’ 통화로 전락하면서, 시장에서는 ‘환율판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태국 유학 자녀 학비, 1년새 13 % 더 들어
달러당 원화값이 1450 원 아래로 무너진 경우는 올해를 제외하면 1998 년 IMF 외환위기, 2008 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4 년 비상계엄 사태까지 단 세 차례뿐이었다. ‘고환율=위기’의 신호였다. IMF 당시 원화는 800 원대에서 1900 원대로 폭락했고, 금융위기 때도 900 원대에서 1500 원대까지 급락하며 코스피가 반 토막 났다. 외환당국이 1400 원을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것도 환율 급등이 곧 디폴트 위험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원화가 급락하면 외화부채 상환 부담이 커졌고, 이는 국가 신용도 하락과 외국인 자금 이탈로 직결됐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수출이 호조를 이어가고 올해 경상수지는 사상 두 번째로 큰 흑자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경상수지 누적 흑자는 827 억 7000 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3 % 늘었다. 국가 신용 위험도 안정적이다. 21 일 기준 5년물 국채 신용부도스와프( CDS ) 프리미엄은 23.55bp 로 탄핵 정국 당시 45bp 대에서 크게 낮아졌고, 한국의 순대외금융자산도 2014 년 127 억 달러에서 올해 2분기 1조 304 억 달러로 80 배 넘게 확대됐다. 주식 시장은 새 정부 출범 후 불과 보름 만에 3000 선을 회복했고, 10 월 이후로는 4000 선 안팎에서 등락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원화 가치는 오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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