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부모들이 딸들에게 원하는 '공감 능력'의 실체
부모가 남들이나 다른 가족 구성원한테는 그러지 않으면서 유독 딸에게만
일방적 '공감 능력'을 요구한다고 힘들어하는 딸들이 많다.
또한 남들한테 말할 때는 '공감 능력' 높은 딸이 좋다고 자랑하기 바쁜 부모가
왜 막상 자신을 만나면 함부로 대하고 늘 못마땅해하는지 의아스러워하는 딸들도 많다.
첫 번째로는 이 '공감'이 건강한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한 종류의 공감은 명백히 서로 독립성을 인정하는 두 개인이 상대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높은 딸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부모는 대개 강한 나르시시즘을 가지며,
나르시시스트가 원하는 공감이란 상대방이 자신의 부속품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상대방이 자신의 독립적 의견이나 관점은 모두 포기하고 그저 자신의 도구나 미니미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공감 능력' 때문에 딸을 선호하는 이들은 딸의 기능을 좋아할 뿐이지
딸의 존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기성세대 부모의 딸 상찬에는 대개 딸이 공감 능력이 높아 자신들을 잘 보살펴 준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현재 한국 중장년층 이상이 '딸이 좋다'고 말할 때,
그것은 딸의 '기능'이 좋다는 것이지 딸의 '존재'가 좋다는 것이 아니다.
기능은 존재와 달리 대체 가능한 것이며, 혹여나 대체가 쉽지 않다고
해도 존재에 대한 애정과 그 성질이 같을 수는 없다.
우리가 냉장고의 기능에만 관심이 있지 냉장고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는 것과 같다.
생략
결론
딸을 선호하는 이유는 딸의 존재를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좋아하는 것이다.
마치 냉장고의 기능에만 관심이 있지 냉장고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는 것과 같다.
어쨌든
여자라는 존재는
결혼해서는
남편도 여자를 전자제품으로 생각
남편의 능력이 좋으면 고성능 전자제품을 고를 수 있고
남편의 능력이 그저 그러면 보급형 전자제품을 고르는 것과 같다.
부모에게는
부모에게도 딸은 냉장고 같은 전자제품이다.
기능을 좋아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