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82에 처음 가입했을 때가 키톡에서 양갱이만들기가 한창이었어요.
요리에 관심은 많지만 실력은 ‘뷁’이었던 저는 다짐을 했지요.
나도 양갱이를 꼭 성공해서 인증샷과 함께 올려야지…
하지만 그때 산 양갱틀은 아직도 집에 고이 모셔져 있고
콩나물국에 고춧가루를 넣어야 하는지 고추장을 넣어야 하는지도 몰랐던 그 처자는
결혼을 해서 어느새 일곱살, 세살 공주님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
다행히도 아주아주 조금씩조금씩 눈에 띄지는 않게 요리실력도 나아졌어요.
물론 지금도 ‘짜면 찌개고 싱거우면 국이다’는 우리집 밥상머리의 명제긴 하지만요.^^
그러던 어느날,, 작년 봄과 여름쯤에
둘째아이의 아토피와 씨름하며 산후우울증에 빠져있었을 때,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속상한 일이 생겨 어린이집을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쯤이었던것 같아요.
마음이 상하니 몸에 병이 났고, 한달쯤 시름시름 아프면서 참 많이 힘들어했는데,
갑자기 여행이 가고 싶은거에요. 동해바다나 제주도가 아닌 아주아주 먼 곳으로 아주아주 오랫동안 하는 여행이 말이죠.
그래서 밤에 벌떡 일어나 비행기표를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여권번호가 있어야 비행기 표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음날 아침 10개월도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고 여권을 만들었답니다.
그때가 작년 8월쯤이었는데 마침 ‘에어아시아’라고 말레이시아 국적 저가항공사가 국내에 취항하는 프로모션을 할때였어요.
인천에서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프까지 3만원짜리 티켓을 선착순으로 판다는 거에요.
항공권이랑 기내식이랑 짐무게 다 포함해서 4인가족 표를 24만원에 결재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이 기뻤어요.
나도 떠날수 있구나…. 나도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옮겨갈수 있구나. 나는 식물이 아니었구나…..
아이들이 잠들은 깊은 밤, 퇴근해 돌아온 남편에게 “우리 여행가자”고 말했을 때 남편은 심드렁하게 대답했어요. “그러지뭐”.
그래서 그 앞에 비행기표 예약한 바우처를 내밀었어요.
“내년 3월부터 일년동안 하는 여행가자”.
그때 남편의 표정을 사진 찍어두었어야 하는건데 정말 아쉬워요.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은 자신이 육아휴직을 쓸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쓸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 어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그리고 연애 8년, 결혼해 8년을 살면서 익히 알아온 마누라의 정신상태가 요즘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도 알았기 때문에 어찌 해야할 바를 모르더라구요.
우여곡절 끝에 (자세한 내용을 쓰자니 눈물이 앞을 가려서..) 여행기간은 6개월로 하고,
우리가족은 2011년 3월 2일 밤에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답니다.
3월 2일, 그날은 개학날이었어요. 제가 표를 살 때 일부러 개학날에 샀어요.
남들 학교갈 때 우리는 여행가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건 비밀인데) 남편이 함께 안가더라도 저혼자 애들 둘 데리고 떠나기에 개학날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되게 비장한 각오였는데, 지금 보니 조금 웃기네요.
그래서 4개월간 말레이시아-캄보디아-베트남-말레이시아-싱가폴-인도네시아-호주를 여행하고
지금 스리랑카에 와있습니다.
앞으로 인도 아래에 눈물처럼 꽁! 하고 찍혀있는, 그 스리랑카말이에요.
수도 콜롬보에서 기차로 세시간반 거리에 있는 작은 호수마을 캔디라는 곳에 온지 열흘째 되었네요.
2주전에 호주에 열흘정도 머물렀는데, 21개월 된 둘째아이가 아토피가 심해져서 호주에 가선 엄청 고생했어요.
차고 건조해서 그런지 도착한 다음날부터 긁어대기 시작하는거에요.
그동안 더운 나라로만 여행해서 잊고 있었던, 지긋지긋한 아토피!!! 다 나은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거죠.
그래서 스리랑카에 와서는 일부러 촉촉한 곳을 찾았는데,
다행히도 기후가 잘 맞아 상태가 호전되었고, 아이 컨디션이 괜찮아지니 저도 한시름 덜게 되었습니다. (정말 아토피 이야기만도 열흘밤낮을 할 수 있어요)
아토피에서 눈을 떼니 세상이 보이고, 사람도 보이고, 시장도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이틀전에 시장에 가보니 총각무를 파는거에요!!!

(딸아이가 들고 있는 수박은 덤으로 얻은 것이랍니다)
우리는 여행하는 사람들이지만, 아이들 데리고 달팽이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여행자라,
거의 생활자에 가깝다고 할수 있지요.
숙소를 정할때도. 백패커보다는 좀 나은 게스트하우스 수준의 ‘이름만’ 호텔 중에서,
아이 아토피 때문에 음식도 가려먹어야 하기 때문에 부엌을 쓸수 있는 곳으로 결정을 해요
그러다보니 어느 곳에 가건 시장이 가장 재미있고 중요한 나들이 장소가 되는거죠.
시장에서 총각무를 보니 그동안 잊고 지냈던 김치생각이 번뜩 나는 거에요.
이곳에 일주일정도 더 있다 이동할거니까 한번 담가먹어도 되겠구나 싶더라구요.
총각무를 2키로 사가지고 오면서, 김치재료가 있는거보다 없는게 더 많은거에요.
가진건 넉달동안 짊어지고 다닌 고춧가루 밖에 없는데 어떡하지..
액젓도 필요하고 천일염은 또 어디서 구한다…
시장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물어물어 마을에 단 하나 있는 마트에 가서 태국산 ‘피시소스’를 사고,
소금가게에 가서 ‘암염’을 구했어요.

쪽파는 없어서 못사고 대신 마늘을 샀지요.
커다란 배낭에 가득 담아 짊어지고 돌아오는데 마음이, 참, 멜랑꼴리 해졌어요.
이런 엄마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는 것이 아이들인지라,
일곱살인 큰딸아이는 깡총거리며 “엄마, 한국 안가도 김치 먹을수 있는거야?” 하네요.
여행하면서 가장 가고 싶지만 마음대로 가지 못한 곳이 바로 한국식당이거든요.
김치찌개, 된장찌개.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돌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식당은 대부분, 조미료를 너무 많이 쓰는거에요.
찌게는 그렇다치고 하다못해 나물이나 생선구이의 표면에까지 조미료가 범벅이라…
아마도 타지에서,, 물도 다르고 재료맛도 다른 외국에서 한국음식의 맛을 내려니 어쩔수 없이 조미료를 쓸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다시다나 미원이 들어가야 한국음식이라고 혀가 느낄정도로 우리는 조미료에 과다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어쨌든,,
한국식당에 가서 먹은날엔 저도 입안이 가끌거리고 몸이 가라앉아 컨디션이 엉망이 되어요.
아토피에다 우유계란 알러지가 있는 둘째아이는 그 덕분에 아직도 엄마젖을 먹고 있는데,
한국 식당에서 밥 먹은날엔 밤새 긁느라 잠을 못자는 비극이 벌어진답니다.
하긴 여기 스리랑카에선 한국식당은 커녕 한국사람도 한명 못 만났네요.
하여튼, 김치를 담그려고 총각무와 재료들을 사오긴 했는데,,
절일통도 없고 물기를 뺄 채반도 없고, 버무릴 통도 없고..
가진거라곤 캄보디아 여행할 때 샀던 연두색 세수대야 하나 밖에 없어서,,
어휴. 갈수록 태산인거에요. 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해결한다고.
비닐봉지에 물을 받아 소금을 녹였습니다.
이게 암염이라, 천일염처럼 슥쓱 뿌리면 스르륵 녹는게 아닌 돌덩이 소금이라 물에 오래오래 비벼가며 일단 소금물을 만들었습니다.
소금물 만들면서, 목표를 수정했어요.
처음엔 ‘맛있는 김치’가 만들고 싶었는데, ‘그냥 김치’로 하향조정 했지요.
큰 비닐봉지에 슴슴하게 녹인 소금물을 담고 거기에 총각무를 다듬어서 넣었어요.
오래 절이면 단맛이 빠질텐데,, 걱정되었지만, 뭐 어쩌겠어요.
소금에 절이는게 아니라 소금물에 절이는 것이니 푹, 오래담궈두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비닐봉지를 주둥이를 꽁꽁 묶어 행여 침투할지 모르는 벌레-주로 바퀴-를 미연에 방지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찍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절여지긴 제대로 절여졌는데, 무도 잎사귀도 엄청 쓰고 매운거에요.
아린맛이 나더라구요.

그때 다시 목표를 하향 조정합니다.
‘그냥 김치’에서 ‘김치처럼 생긴 것’으로요^^.
그리고 절였던 비닐봉지를 풀어 총각무를 헹구고
다시 그 비닐봉지 바닥에 구멍을 뽕뽕뽕 뚫어 물기뺄 채반으로 재활용합니다.
딸아이는 엄마가 젓가락 들고 구멍을 뽕뽕뽕 내고 있으니,
저도 거들겠다고 포크를 들고 귀엽게 설쳐댑니다.
그러다가 비닐봉지를 쭈욱~ 찢어먹고 마네요.
여긴 다른 동남아국가보다 공산품이 귀해서 비닐봉지 하나도 두세번씩 재활용해서 써야 하는데,
으이구 차마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거다라는 말은 못하겠더라구요.
그건 우리엄마에게 들었던 제일 듣기 싫은 말이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아껴아껴 두었던 새 비닐봉지를 꺼내 조심조심 구멍을 뚫었습니다.

물기가 빠지는 동안 액젓에 고춧가루를 개고,
풀을 쒀야 하는데 밀가루가 없어서 그냥 남은 찬밥덩어리를 넣어 쓱쓱 비볐습니다.
그리곤 아차차차 싶은거에요. 여기 쌀이 동글동글 하니 완벽하게 찰기가 없거든요.
풀의 역할을 기대하고 찬밥을 넣었는데, 풀기는커녕 씹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오히려 걱정이 되는거에요.
다시 헹궈서 그냥 찌게나 끓여먹을까 하다가 이왕 늦은거 가던 길이나 가자 마음을 고쳐맵니다.

단걸 좀 넣고 싶은데, 설탕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산 팜슈거 밖에 없고,
이걸 넣으면 끈적끈적 해질텐데 싶지만 에라 모르겠다... 그냥 투하합니다.
그리고 쪽파대신 보라색양파 두개 체쳐서 넣고 막 버무렸어요.

고춧가루를 더 넣고 싶었지만, 가루가 얼마 없어서 아껴야 하거든요.
보기엔 대충 희멀건 김치 같아 보이는데,
맛은 엄청 맵고 씁니다. 일단 익혀보고 정 맛이 없으면
그냥 팍! 쉬어 꼬부라지게 해서 찌게나 끓여먹어야겠어요.

여행을 결정하고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충동적이었지만
제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분명해요.
일곱살, 세살 아이를 데리고 여행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저도 잘 몰랐어요.
아, 마흔살짜리 큰아이도 있네요.!!!
아마 몰랐으니까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해요.
아이들과 하는 여행이다보니 저절로 ‘착한여행, 공정여행’이 되었습니다..
공정여행을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더라구요.
로컬 교통수단을 타고, 지도보고 모르는길 물어물어 가며 걷고,
관광지나 유적지를 보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나 길에서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그들에게 받은 도움들을 다른 ‘그들’에게 나누고 돌려주는 것………...
때로는 너무 힘들어 당장이라도 비행기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고,
길에서 구걸하는 캄보디아 아이들을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쏟은 적도 있고,
무엇보다 가족과 24시간 온전히 함께 해야 하니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숨막혀 한 나날들도 많았습니다.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려면 한달 반이나 남았는데,, 용기를 내어 다시 또 한걸음 내딛어야 겠지요.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깨달으며 기다리는 동안, 스리랑카의 총각김치는 익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