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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의 명상수필 ― ‘들길Der Feldweg’ 전문全文

| 조회수 : 2,506 | 추천수 : 1
작성일 : 2012-09-20 23:26:17

 

 


 

하이데거의 이 글은 1949년에 발표되었다. 그의 고향 메스키르히가 낳은 작곡가,

콘라딘 크로이처(Konradin Kreuzer, 1780-1849)의 백주기百周忌를 맞아 기념 문집을

낼 때 하이데거는 자기 고향을 회상하고, 고향의 풍토에 감사하는 뜻에서 『들길』

을 지어 <기념 문집>에 싣게 되었다고 한다.

 

이 『들길』은 현대 인간들에게 보내는 준엄한 경고의 소리요, 사색하는 인간의 양심

에서 우러나온 피맺힌 절규가 아닐 수 없다. 하이데거가 현대 인간의 실존實存을

문제 삼았던 것은 바로 인간의 존재가 궁극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들길』은 한낱

<에세이>나 잡문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사색하는 사람의 대화, 존재와의

대화일 수도 있지 않을까.   [ 퍼온 글 ]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언어’라는 거처에서 거주한다. 사유하는

철학자와 시를 짓는 시인은 이 거처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언어를 통해 존재의 모습을 나타내고 언어 속에 보존하는 한에서, 존재는

자기 모습을 완전히 열어 보여 준다.”

                                                                              《휴머니즘 서간》에서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해보라. 대자연과 작품 앞에 서보라.

그러면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 응답이 시를 지음이며 곧 철학이다.”

                                                                                           ― 하이데거 ―

 

 


호프가르텐 성 정원에 있는 보리수

 

 

들길은 호프가르텐 성문을 빠져 나와 엔리트 쪽으로 치닫고 있다. 성 마당 안에는

늙은 보리수가 여기저기 솟아 있다. 부활절 무렵이 되면 들길은 파릇파릇 움이 돋는

보리밭과 잠이 깨는 목장 사이에서 환히 비치고 있다가도 성탄절 무렵만 되면

눈구덩이에 파묻혀 인근 언덕들 저 너머로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성 마당 안 여기

저기 솟아 있는 보리수는 담 벽 너머로 노상 고개를 빼든 채 들길을 전송하고

있는 것이다. 들 가운데는 십자가가 하나 서 있다.

들판에 서 있는 십자가에서 보면 숲 쪽으로 굽어 가고 있다.

숲가에는 떡갈나무 한 그루가 하늘로 치솟아 있다. 여기를 지날 때는 길도 인사를

보낸다. 떡갈나무 아래에는 미처 손질도 가지 않은 평상이 하나 놓여 있다.

말이 평상이지 걸상이나 다를 게 없다.

 

그 위에는 이따금씩 위대한 사상가들이 쓴 이런 책 저런 책들이 흩어져 있곤 했다.

이런 책을 어려서는 감당도 못하면서 미심한 구석이 있으면 풀어보겠다고 안간

힘을 쓰기도 했다. 수수께끼는 거미줄 얽히듯 마냥 몰려오기나 할 뿐 달아날 길조차

막히고 보면 그래도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는 것은 이 들길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따라 소리 없이 들길을 걷노라면 발걸음은

어느 사이에 메마른 땅, 환히 트인 들녘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책을 읽는다거나 제 힘으로 풀어보겠다고 애를 태우면서 문득문득 사색의

발걸음에 이끌리는 것은 노상 이 오솔길 위였다. 들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환히

트인 들녘을 뚫고 한 가닥 외줄기로 뻗친 길이 바로 오솔길이다.

사색에 잠긴 사람의 발길에는 들길이란 가까운 것, 이른 아침 꼴 베러 가는 농군의

발길에 가까운 길이듯.

 

 


 

해가 차고 달이 참에 따라 길가에 솟은 떡갈나무는, 이따금 저 어린 날의 놀이라든가

처음 ‘선택’이라고 하던 때로 이어지는 회상의 길잡이가 된다.

때때로 숲 한복판에서는 초부(樵夫, 나무꾼)가 찍어대는 도끼날에 못 이겨 떡갈나무가

쓰러지기도 한다. 아버지는 이내 울창한 숲속을 가로질러 빠끔히 햇살이 쏟아지는

공터를 넘어간다. 단골 몫으로 떨어진 일감을 찾아가는 길이다.

여기가 바로 일터다. 성당 탑시계를 돌본다든가, 때맞춰 종을 치는 틈틈이 아버지는

여기 나와서 정성껏 일감을 다듬었다. (1) 탑시계와 종, 이 두 가지는 시간이며 시간의

바탕이라는 것을 대하면서 제 고유의 관계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떡갈나무 껍질로 개구쟁이들은 자기네 배를 만들었다. 노櫓 잡는 사람이

앉는 자리며 키가 갖추어지면 배들은 메텐 개울이나 학교의 분수에서 떠돌아다닌다.

이것은 아이들의 세계 일주 놀이다.

가고 싶은 목적지에도 쉽게 닿고, 해안으로 돌아올 때도 쉽게 닿았다. 이와 같이

떠돌아다닐 때 느끼는 꿈의 경지는 그때는 미처 눈에도 잘 띄지 않았지만, 세상 만물

어디에나 걸쳐 있는 어떤 광채 속에 언제까지나 마냥 파묻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나라를 감싸주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눈길이요, 손길이었으니까.

어머니는 말없는 가운데 마음을 쓰시면서 이런 모든 것을 보살펴 주시는 것만 같았다.

 

저와 같이 뱃놀이를 한다고는 하지만, 떠돌아다니느라고 해안이란 해안은 모두 뒤로

남기면서 떠돌아다닐 줄은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단단하고 향기 짙은 떡갈나무 재목은, 나무인 자기가 자라 오기는

얼마나 더디던 것이고, 얼마나 꾸준했던 것인지 알기나 하느냐고 또렷또렷하게 들려

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길가에 우뚝 솟은 그 떡갈나무도 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던가. 언제까지고

버티면서 끝내는 열매까지 맺게 되는 바탕은, 이와 같이 자라는 과정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자란다는 것은 무엇인가. 넓으나 넓은 하늘을 향해 가지를 편다는 것, 그러면서도 또

한쪽으로는 대지의 ‘어둠 속’을 뚫고 뿌리를 내린다는 뜻이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인간도 이 두 가지 자세를 지닐 때, 그러니까 드높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받쳐

주는 대지의 품안에서 비호를 받겠다는 결의가 서 있을 때, 이 때라야만

옹골찬 것은 하나같이 번영을 누리게 된다던가.

 

 


알프스 풍경

 

 

예나 다름없이 지금도 떡갈나무는 이런 뜻을 들길에게 일러주고 있다. 제가 거느린

오솔길은 틀림없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자신에 찬 모습으로 곁을 지나갈 때면

일러준다. 길 언저리 여기저기에는 제 본성이란 것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 즐비하다.

들길은 이런 것을 모아들여서 길 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들길 제 몫으로

넘겨준다. 가깝다고 해도 늘 같을 수는 없는 일, 밤낮 그 밭, 그 목장 언덕배기가

사시사철 들길을 따라나선다.

 

숲이자 또 숲 너머 알프스 산봉우리들이 저녁 땅거미 속으로 가라앉아 없어지기도

하겠지. 언덕배기 물길을 타고 들길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떨고 넘어가는 저기,

여름날 아침을 맞느라고 종달새란 놈이 마냥 치솟아 오르기도 하겠지. 어머니 친정

이 있는 저 고장에서는 동녘 바람이 연상 휘몰아쳐 오기도 하겠지.

어둑어둑해지면 초부가 나뭇단을 끌고 화덕가로 다가서기도 하겠지. 거두어들인

<작물作物>을 싣고 수레가 들길로 들어서면 집 찾아가느라고 재촉도 해야겠으니까

뒤뚱거리기도 하겠지.

아이 녀석들은 목장 언덕배기에 갓 피어난 앵초櫻草를 따느라고 정신이 없겠지.

며칠씩이나 안개가 끼다 보면 그 우중충하고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짐 덩이를 들판

위로 마구 밀어붙이기도 하겠지.

그러나 들길 언저리 여기저기에는 한결같은 것이 외치는 소리가 어디서나 밤낮없이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들려오는 소리는 이렇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단순하기만한 것 속에는 머무는 것,

상주常住하는 것, 위대한 경지라는 수수께끼가 간직되어 있다. 이 단순하기만

한 것은 대주는 것이 없어도 인간의 품안으로 찾아들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번성을 누리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언제나 한결같은 것은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 이처럼 눈에 띄지 않는 것 속에 단순하기만 한 것은 제가 내릴 축복

이란 것을 숨기고 있다. 자랄 대로 자란 온갖 것들은 들길 언저리 여기저기에 머물다

보면 그 넓으나 넓은 경지에서 아깝다하지 않고 ‘세계’라는 것을 내준다. 읽는다는

것과 사는 데는 거장巨匠이었던 저 옛날의,

에크하르트 (2) 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세계의 언어라는 게 있더라도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 가운데서 신神은 비로소 ‘신’이 된다고 말이다.

 

 


독일 전원풍경

 

 

그러나 들길이 이렇게 외치는 소리는 들길에 이는 바람 속에 태어나서 들길에서 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런 사람들

이야말로 자기네 내력(來歷, 지나온 자취)이란 것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자기네 내력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들은 억지로 만들어낸 세계에서 노예나 시녀 노릇을 할 사람들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가 계획한 바에 따라 대지라는 것, 세계라는 것을 어떤 질서 속으로 끌어

들여 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들길이 외치는 소리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도 허사다. 오늘날 사람들

치고 들길이 외치는 소리에 귀가 어둡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기에 위험이란 것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지 않은가. 이 사람들 귀에 솔깃한

것이 있다면 그 요란한 기계 소리, 장치 소리뿐이다.

기계니 장치니 하는 것을 거의 ‘신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인간은 심란해지고 길을 잃을 수밖에.

심란한 사람 눈에는 단순하기만 한 것은 단조롭게 밖에는 더 비치겠는가. 단조로운 것

이라면 신물이 난다. 신물이 난 사람들 눈에는 매양 그렇고 그런 것밖에는

보이지 않는 법. 이러다 보니 ‘단순한 세계’라고 하는 것은 달아나버리고 만 것이다.

단순한 데서 오는 그 은은한 힘은 메말라버리고 말았다.

 

단순한 세계야말로 자기네 재산을 얻은 바나 다름이 없는 것,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런 사람들의 수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몇이 안 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사실은 어디서나 머무는 사람들, 상주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언젠가는 들길에서 풍기는 그 온화한

힘을 바탕으로, 원자력이라는 어마어마한 힘까지도 이겨내면서 버틸 수 있는 사람들

이다. 원자력이라니, 인간의 계산이라는 것이 ‘꾸며낸 것’이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행동을 사로잡는 멍에가 되지 않았던가.

 

들길이 외치고 있는 소리를 들어보면 깨우쳐 주는 바가 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중히 여기라.

설사 재난이 닥쳐온다손 치더라도 다시없이 유리하다 싶은 자리에 이르면 껑충 뛰어

넘어서 궁극에는 명쾌한 경지를 찾으리라. 이런 기백 말이다. 이 명쾌한 경지만

찾으면 혼자 날뛰다가 허무한 데로만 내몰고 가고 마는 한낱 작업 같은 것, 여기서

나오는 행패쯤은 능히 막아 줄 수 있는 것이다.

 

 


 

철마다 들길의 [바람]이란 것도 바뀌게 마련이지만,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도 예지에

넘치는 명쾌한 경지는 나날이 번성해 가고 있다. 이런 경지에도 표정이 흐려 보이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있어도 많은 편이다. 예지에 넘치는 명쾌한 경지, 이것이

고담(枯淡, 속되지 않은)의 경지요, 표일(漂逸, 세상을 벗어난 뛰어난 기상)의 경지다.

이런 경지란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들길에서 얻어내게 마련이다.

들길이 거느리는 게 오솔길, 이 오솔길에서는 겨울의 모진 바람과 가을걷이하는 날이

만나기도 하는가하면, 이른 봄 만물이 생동하는 모습과 차분히 죽어 가는 가을날이

부딪치기도 하고, 철부지 때의 장난질과 늘그막의 지혜가 서로 눈길을 모으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꼭 하나로 화음을 이루고 있다. 화음에서 흘러나온 메아리를

들길은 묵묵히 여기저기 끌고 다니다 보면 모든 것은 이 화음 속에서 맑고도 환하게

제 모습을 걸러내게 된다.

 

예지에 넘치는 명쾌한 경지란 영원에 이르는 성문. 이 영원의 문은 명인 소리를 듣는

대장장이가 언젠가 나타나 생존의 수수께끼를 밑천으로 달구어낸 축軸들을 에워

싸며 빙빙 돌고 있는 것이다.

 

엔리트에서 길은 호프가르텐 성문으로 되돌아온다. 마지막으로 언덕배기를 넘으며 길

은 가느다란 띠 마냥 좁아지면서 펑퍼짐하게 좀 내려앉은 목을 질러서 끝내는

성벽에까지 닿고 만다. 지친 듯 가느다란 길은 별빛을 받아 풀이 죽은 몰골로 힘겹게

빛나고 있다.

성 뒤편에는 성 마르틴 성당의 탑이 우람하게 솟아 있다.

느릿느릿, 갈피를 못 잡은 것 마냥 열한 시 종치는 소리가 밤을 뚫고 힘없이 사라져

간다....... 이 낡은 종, 개구쟁이 때는 그 줄을 잡아당기느라고 어찌나 비벼댔던지

손바닥이 다 화끈거리지 않았던가. 줄도 시달림께나 받아왔던가 보다. 이 종이 때를

알리는 쇠망치에 얻어맞아 지금 부들부들 떨고 있다.

망치에 그려진 흉물스럽고도 그 익살스러운 얼굴,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종도 마지막으로 얻어맞자 고요는 더욱 고요해진다. 이 고요는 두 차례에 걸쳐 세계

대전을 지나오는 사이, 시대에 앞서 제물로 바쳐진 저들에게까지도 미치고 있다. (3)

단순하기만 한 것은 어느 사이에 더욱 더 단순해졌다. 노상 한결같은 것은 낯선

표정을 지으면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들길이 외치는 소리는 이제 누구 귀에나 들릴 수 있을 만큼 또렷해졌다.

들어보자. 심혼이 이야기를 하겠는가, 세계가 이야기를 하겠는가, 아니면 신이 이야기

를 하겠는가. (4)

 

모든 것은 한결같은 것 속에다 대고 체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체념이라고 해서 빼앗는

게 아니다. 체념이란 주는 것이다. 단순하기만 한 것에서 뽑아 올려도 뽑아 올려도

다함이 없는 힘을 체념은 주는 것이다. 들길이 외치는 소리는 오랜 내력 속에서 고향

품에 안기고 있다.

 

 


 

구절 설명 ―

(1) 이 글을 쓴 하이데거의 아버지는 고향 인근에 있는 성 마르틴 성당에서 탑시계도

돌보고 종지기 노릇도 하면서 통이나 항아리를 만들어 내다 팔음으로써 생계를 유지

했다고 한다.

(2)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 독일 중세의 신비사상가

(3)「시대에 앞서 제물로 바쳐진 저들」이라 함은 유능한 시인, 작가, 예술가, 사상가,

문화인 등을 가리킨다.

(4) 현대 세계를 「세계의 밤」「고향 상실의 시대」로 보는 게 하이데거의 입장이고

보면 현대 인간에게 영혼이 살아 있을 리 없고, 세계는 온전한 세계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고향 상실’ 이란 말은 인간의 기반을 잃었다는 뜻이니 신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독일의 실존철학자

《존재와 시간》을 비롯 8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토드나우베르크(Todtnauberg) 전경: 《존재와 시간》 대부분이 이곳에서 집필되었다.

 

 

~~~~~~~~~~~~~~~~~~~~~~~~~~~~~~~~~~~~~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카라
    '12.9.20 11:45 PM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 딜라이라
    '12.9.21 12:16 AM

    감사합니다.

  • 3. march
    '12.9.21 9:09 AM

    학생이셨군요 ~
    깔끔 명료한 글들 잘읽었어요 ~
    좋은글 감사해요 `

  • 4. 안상우
    '12.9.21 1:11 PM

    82에서 많은 정보를 얻고 도움도 받았는데

    이렇게 좋은 글도 만나게 되네요.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 5. 야스
    '12.9.21 1:32 PM

    좋은글 감사해요~

  • 6. 바람처럼
    '13.12.8 2:21 AM

    ‘원글’은 되풀이 읽어야 할 정도로 약간 난해성이 있는데, 많은 분들이 읽어
    주시고 댓글을 주셨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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