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
얼마 전 서대문구 지역의 한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이 현재 살고 있는 마을에 관해 ‘미래지향적인’ 토론을 하기위한 작은
모임이었는데요, 그날 모임에 참여했던 <지역사회 봉사자>, 대학 강사,
환경 운동 관계자들, 도시 디자인 관련업체 직원 등 남녀 9명이서 주제를 놓고
2시간여 정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조촐한 시간이었지요.
대화 모임은 각자 돌아가면서 참석자들의 개인 발언이 시작되었는데, 마침 제
맞은편에 앉으신 남성 <지역사회 봉사자>의 말씀에서 유난히도 <영어단어>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50대 중년으로 보이는 이 인상이 유순
하고 선하신 분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중에 문득,
“모임에서 대화 중, 영어단어 사용 빈도수는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이
떠올라 휴대폰을 꺼내들고,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영어단어>가
나오면 바로바로 ‘문자입력’을 하였지요.
그런데 맨 처음에 발언을 하신 <지역사회 봉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머지
참석자들의 대화에서도, 예외 없이 영어는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튀어나오곤
했습니다.
『.....페이퍼, 캔슬, 맨션, 네트워크, 글로벌, 엔지니어, 모티브, 프라자, 럭셔리,
캠핑, 포럼, 스케줄, 미디어, 팀, 팟캐스트, 피디(PD), 노트북, 웹, 잇슈, 블록,
업저버, 코멘트, 프로 챠트, 리스트, 핸들링, 콘텐츠, 인큐베이터, 플랜, 파트너,
파트, 프로, 데이터베이스, 데이터, 케이스, 이벤트, 프로그램, 트위터, 믹서,
컨택, 뷔페, 까페, 레퍼토리, 커뮤니티, 워크숍, 플러스, 셀프, 매뉴얼, 아이디어,
포인트, 빠킹, 핸들링, 소프트 웨어, 오픈, 롤 모델, 미션, 드림, 센터, 컨셉,
모델............. 』
그날, 2시간여 동안 채록한 <영어단어>들 중 일부인데 저 역시 「모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야 말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이제 대도시의 회사들을
비롯한 대학교와 지역모임에서는 거의 일반화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현대와 같은 지구촌화‧다중언어 시대에 의사표현에서 꼭 자국어만을 쓸 수는
없을 것이고, 지금처럼 개방사회에서 본토 언어로 사물과 상황을 설명하거나
전달하는데 있어 적합성과 신속성이 떨어질 수도 있지요.
영어지만 「디자인, 스트레스, 아이디어, 뉴스...... 」등 우리의 생활 안에 이미
깊숙이 토착 언어와 함께 자리하게 된 외래어는 오히려 자연스럽기조차 하죠.
일제 강점기인 1937년 3월 1일, 외솔 최현배 선생이 펴낸 문법책 《우리말본》
한글 학자이신 최현배 선생은 생전에 <이화 여대>를 ‘배꽃 계집아이 큰 배움터’
라든가 <우유>를 ‘소젖’이라고 풀어서 말씀하셨다는데, 오히려 이런 경우는
축구경기 용어인 <코너 킥>의 ‘모서리 차기’처럼 어색하게 들릴 수가 있겠어요.
개인적인 잣대로 타인의 영어 상용常用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해줬으면’
하기보다는, 우리말 표현이 충분히 가능한 것조차도 <영어단어>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남용’같이 생각됩니다.
외국어, 특히 영어를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남발하게 될 정도라면 한 번 생각해
볼만한 일이 아닐까 하는데 <예식장>보다 <웨딩홀>이 더 자연스러울까요?
개인적으로 <한글>과 그 언어는 감성이 풍부해서, 프랑스어의 음성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언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어가 영국, 미국으로 이어지는
패권국가 <국어>로 세계 공용어가 되다보니, 정보화 사회로 진입해 각종 통신
기기를 이용하면서 파생되고 만들어지는 용어의 범람과, 그로 인해 ‘인터넷’
상에 유통되는 수많은 신조어新造語는 또 어떤가요?
저는 영어 남용과 함께 ‘개드립..... ’ 등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수준의 용어가
끊임없이 양산되고 전달되어, 우리의 언어 환경에 자리한다고 해서
모국어 어휘가 더 풍성해지고 품격이 한결 높아진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조지훈의 시 <승무>,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명시
그리고 남‧여가 정사, 혹은 사랑을 나누는 걸 대부분 영어로 표현하거나 혹은
에둘러서 말하기를 ‘같이 잠을 잔다..... ’라고 하는데 선조 지식인들은 비록
한자이기는 하지만 <운우지정雲雨之情>이라는 운치 있는 아름다운 말을 사용
한 듯싶습니다. 저로선 이 ‘죽은 언어’가 현대에 다시 부활하기를 바라고
있는데요,
<성性>을 표현하는데 있어 이처럼 멋스럽고 시적인 말이 세상에 또 있던가요?
이제 경제력의 향상에 힘입어 우리의 생활수준도 높아져 <명품>을 지향하고
소비하는 사회인만큼 문화의 정수라는 ‘말과 글’도 품격이 높아졌으면 합니다.
인간은 ‘말과 글’이라는 소통의 도구를 통해 상대방과 생각을 나누거나 사물을
인식하고 뜻을 표현하는데요, 한 개인이 외국어를 편의에 길들여져 사용
한다고 해서 지식인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10여년 후면 현재보다도
영어의 사용 빈도는 더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언어학자들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 형성한다.” 고 주장하는데
“각각의 언어는 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민족의 사고 양식에 직접
적인 영향을 끼친다.” 는 것입니다.
언어 습관은 본인 스스로 자정하지 못하면 개인의 ‘습관과 생활’로 굳어지고,
아름다운 모국어는 더욱 변질되며 도태되어 갈 것입니다. 어쩌면 20년 후에는
영어 사용자가 사회지배층으로 자리매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의 생각도
솔직히 듭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먼 훗날 통일이 되었을 때 <남‧북한> 사람들의 소통 관계에
장애가 되는 면도 없지 않아 있겠지요. 말의 사용은 자유라도 굳이 좋은 우리말
에 대한 사랑과 인격의 영역에서 자신을 소외시킬 이유가 있을까요?
모국어 안에는 민족의 영혼과 정신이 담겨있기에, 우리는 문화 민족의 자존을
지키면서 <세계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故) 최민순(1912 ~ 1975) 신부, 영성신학자
한국 번역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서 한국어와 라틴어를 비롯해 7,8개 국어에
능통하셨고, 순수 우리말을 살려 유려한 문체로 번역하신 분으로 유명
하지요. 지금도 단테의 《신곡》은 최고의 ‘명 번역’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번역 작품: 신곡(을유문화사) / 돈키호테1(정음사)
가르멜의 산길 / 어둔 밤 / 영혼의 성 / 완덕의 길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이상 바오로딸 출판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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