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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명장면, 생활속의 즐거움

그 여자네 집

| 조회수 : 4,391 | 추천수 : 73
작성일 : 2007-10-22 00:38:24



         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김용택 시인 작)





  

♪흐르는 곡~ [ I'll Never Know-Steve Barakatt]
                                                
                                                
                                                
                                                                                        

                                        
1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젊은 할매
    '07.10.22 11:40 AM

    향수를 부ㄹ러 일으키느듯 멋진 사진에 딱 어울리는 시 군요.

  • 2. 미란다
    '07.10.22 12:04 PM

    초가집이 이리도 정겹고 그립게 될 줄 몰랐어요

    70년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스레트 지붕을 올리면서 저희집은 바깥 대문과 창고,외양간이
    기역자로 된쪽은 스레트 지붕이었고 안채는 초가집이었죠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넉넉한것도 아니었지만 남들 다 올리는 스레트 지붕을
    왜 못올리고 초라하게 놔둘까

    사춘기때는 초가지붕이 부끄러웠어요
    고등학생이 되면서 바깥채는 그대로두고 안채만 옥상이 있는 단층 양옥으로 지었죠

    사진을 보면서 툇마루에 앉아 바로 논과 밭과 신작로가 보이는 초가집이
    너무나 아름답고 그리워지네요
    나이들면 옛것이 그립고 그곳으로 돌아가고싶고 그래지나봐요^^

  • 3. 소박한 밥상
    '07.10.22 12:38 PM

    요즘도 저런 풍경이 남아 있는가......싶네요
    김용택님 글다운...........

  • 4. 망구
    '07.10.22 1:28 PM

    그냥..저도 아련히...그 여자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왜 마음이 착찹하지요...

  • 5. 우향
    '07.10.22 9:42 PM

    맨 위의 그림은 금곡마을이네요.^^*

  • 6. 미소천사
    '07.10.22 11:15 PM

    나 언제쯤 모든걸 훌훌 털어버리고 저기 저곳에서 무념의
    마음으로 살아갈수 있을지...
    너무 평온해 눈물 한방울 볼위로 흘러내리는 지금 ...

  • 7. 베로니카
    '07.10.23 9:45 AM

    눈온 집 풍경을 보니 정말 어렸을때 시골 고향의 아는 집 같아요.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지네요.

  • 8. 우현
    '07.10.23 3:36 PM

    사진? 그림?
    제 보기엔 위 두 집은 사진, 맨 아랫집은 그림같은데, 맞나요?
    그나저나, 김용택 저 분 저 툇마루에 같이 앉아 두서없이 애잔한 얘기 한 번 나누고 싶네요...

  • 9. 수현이
    '07.10.23 3:40 PM

    저도 조용한 시골가서 텃밭일구고 살고파요
    하지못한다는것에 대한 소망.
    언젠가 이루어지겠지요..

    서리내린 마당에 나와 풀잎을 쓰다듬으며
    아침을 맞이하고싶습니다..

  • 10. 정현숙
    '07.10.23 4:08 PM

    와 멋지다

  • 11. 천하
    '07.10.23 6:10 PM

    향수속에 빠지게 하는군요.

  • 12. 준앤드빈
    '07.10.24 12:25 AM

    굿

  • 13. teamolady
    '07.10.24 9:56 PM

    너무 가고싶어 집니다..

  • 14. 파도
    '07.10.26 3:44 PM

    ~~ 떠나가는 가을과 닮은..너무 좋은 분위기 ..글과 그림

  • 15. 녹차잎
    '07.12.3 4:16 AM

    근데 왜 나는 이런 곳에 사는 슬픔이 느껴질까요. 가난 ,폭력 , 고도의 노동.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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