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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지리산의 여름 (종주 마지막날)

| 조회수 : 641 | 추천수 : 2
작성일 : 2019-10-04 02:35:19



4시 30분 벽소령 대피소 출발.

남쪽 사면으로 의신마을 불빛이 보이고.

의신사가 있던 곳이라 의신마을.

의신사(義神寺)는 조선 사대부들 천왕봉서 쌍계사로 가던 길 숙소로 유명.


빗점골도 서서히 여명이

우측 멀리 섬진강.


동쪽 천왕봉 쪽


오늘 일정은,

벽소령~덕평봉~영신봉~촛대봉~장터목~천왕봉 거쳐 하산.

위성 지도 황갈색 주능선 위쪽이 북,아래가 남쪽.



선비샘


덕평봉 아래 선비샘 도착

지리산 종주길 3대 샘 중 하나.

지리산 주능선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식수가 풍부하다는 것.

그래서 예전엔 선비샘 일대가 비박 장소로 인기.

그럴듯 하죠?

전설도 이 정도 논리는 펴야 수긍이.


  대성골

1952년 토벌대 대공세로 빨치산 최후지가 되어버린.

<남부군> <태백산맥>을 읽은 이전과 이후 지리산 등반은 느낌 자체가 다를수 밖에 없겠죠.



모싯대

대나무에 달린 청사초롱,,,맞나요?

줄기가 대나무처럼 생겼고,잎은 모시잎 닮아서.



섬비샘 전망대서 바라본 덕평봉.

덕평봉 남사면 의신사 터 인근에 '원통암'이 있어요.

조선시대 최고 승려 서산대사(1520~1604)가 출가한 곳입니다.

서산대사란 별칭은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할 때까지 생 대부분을 묘향산에 있었기에.


지리터리풀


참취꽃



대성골

계곡들이 만나는 가운데 꼭지점 우측이 빗점골.

대성골과 빗점골이 만나 화개천을 이룬 후 화개장터 앞에서 섬진강에 합류.

아랫 길은 김일손(1464~1498)이 영신사에서 1박 후 청학동 찾아 쌍계사로 하산하던 길이기도.

/산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내려갔다.

 능선의 북쪽은 함양 땅이고 남쪽은 진양(진주)땅이다.

 나무꾼이 다니는 한가닥 길이 함양과 진양을 가운데로 나눠놓았다.

한참 동안 서성이며 조망하다가 다시 그늘진 숲 속으로 걸어갔다.

숲 속이었지만 온통 흙으로 덮여 있어서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매를 잡는 사람들이 자주 다녀 오솔길이 나 있어서,

상원사와 법계사로 오르던 길만큼 험하지는 않았다.

산 정상에서 서둘러 하산하여 정오에 의신사(義神寺)에 닿았다./

-김일손 <두류기행록>-




 갑자기 검은 구름이 천왕봉 쪽에서 밀려오네요.



동쪽을 보니 순식간에 천왕봉,촛대봉은 검은 구름에 쌓이고



가야할 칠선봉~영신봉~촛대봉 쪽



먹구름은 남부능선을 넘어 오고

남부능선 이쪽은 섬진강으로,

너머(세석평전)는 낙동강으로 흐릅니다.



아래로 대성골... 우측으로 빗점골

1952년 말 B2 폭격기 폭격으로 일대는 10여일 간 불바다가 되었죠.

토벌대의 2차 대공세로 이를 계기로 빨치산 주력은 궤멸상태로.


모시대,동자꽃 터널


칠선봉 향해



칠선봉 오르는 데크


칠선봉 오르는 길 북쪽사면서 바라본 천왕봉.... 천왕봉은 운무에.

옛사람 글을 보면 천왕봉을 상봉(上峰)이라 부르기도.



칠선봉(1552미터)



넓은 암릉 위에 걸터 앉아 파이 두개로 빈속을 채웁니다.

그리고 남쪽 화개쪽을 바라봐요.


Beethoven - Symphony No. 6 - 5th Movement  

http://www.youtube.com/watch?v=_wk5EV5SET0


예전 저 아래로 의신사와 신흥사가 있었어요.

옛사람들은 산행기를 유산기,유람기라 불렀습니다 .

유람이라구요???

정상에 오르는 현대의 등산(登山)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는.

유산(遊山)에 유람(遊覽)~~

산에서 노닐고,노닐며 구경한다는 뜻이네요.

그럼 당시 산에 오른 후 남긴 유산기를 통해 확인해보죠!


김일손 이 26세 때인 1489년 정여창과 함께 지리산에 오른 후 남긴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엔 이리~~

/광대를 불러 생황과 피리를 불게 해 울적한 마음을 떨쳐버리려 했다.

누더기 승복을 걸친 한 승려가 뜰에서 서성이다가 연주를 듣더니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배를 움켜잡고 웃을 만하였다/


122년 뒤 유몽인은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1611년)을 남겼어요 .

다음은 영신사에서 출발해 의신사에 도착한 후 한판 벌린 풍류의 현장.


/푸른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파란 시냇가에 초록 이끼를 깔고 앉았다.

비파로 영산회상(靈山會上), 보허사(步虛詞)를 연주하고,

범패(梵唄,불가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로 그에 맞춰 춤을 추고, 징과 북소리가 어우러졌다.

 평생 관현악을 들어보지 못한 산 속의 승려들이 모여들어 돋움발로 구경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기담(妓潭) 가에 옮겨 앉았다.

고인 물은 쪽빛처럼 새파랗고, 옥빛 무지개가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

거문고, 비파 같은 소리가 숲 너머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리산 유람 중  벌린 산사 음악회로 국악관현악단에 맞춰 아리아에 발레까지 선뵈였다는.

옛 문인들은 툭하면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뜻으로 관련 시를 읊었죠

아마 이런 환상적인 삶을 살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유몽인 일행이 지리산 깊은 곳 까지 들어와

저런 즉석 공연을 펼칠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바로 지리산 인근 현직 관료란 것.

당시 유몽인은 남원 부사로 일행 중엔 순천 부사도 있었습니다.

당시 남원이면 이성계의 남원 운봉전투 영향으로 전북좌도에선 전주 다음으로 큰 고을.


칠선봉에서 남쪽을 보니 

지금은 대성골,빗점골,화개골 등등으로 불리지만

옛사람들은 일대를 신흥사동(新興寺洞), 청학사동(靑鶴寺洞), 쌍계사동(雙溪寺洞)으로.

절 이름 따라 부른 거죠. 


북쪽을 바라보니



칠선봉에서 북쪽 함양 쪽

보이는 고을이 함양군 마천면.

마천에서 우측 계곡을 따르면 벽송사 거쳐 함양읍이,

왼쪽을 따르면 남원시 산내면으로 실상사가 그곳에.


서쪽으로, 왔던 길.


가운데 엉덩이 형상이 반야봉.

반야봉 뒷쪽으로 멀리 노고단... 노고단 왼쪽이 왕시루봉... 반야봉 앞이 토끼봉,명신봉.

사진 앞봉우리는 오늘 걸어온 덕평봉(선비샘)


옛 사대부들이 남긴 기행문을 보면 지리산을 죄다 두류산이라 불렀습니다. 지리산은 소수.

頭流山~~

말 그대로 백두산이 흘러내려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이라는 뜻.

두류산이라는 말에서 조선시대 식자층들이 같고 있던 인문지리적 사고를 엿볼수 있다는.

한반도 산들은 할아버지 산인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그 맥들의 총합이란 것.

이러한 지리관은 조선후기 실학자 여암 신경준(1712~1781)이 쓴 산경표(山經表)에 집약됩니다.

그는 한반도를 1개의 대간과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조선의 산줄기를 분류해요 .

그리고 그 대간(백두대간)의 마지막 대단원이 바로 지리산이라는 것.

 백두산이 알파라면 보이는 저 주능선이 바로 오메가인 게죠.


김정호의 1860년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 서문에는 이리.

 /백두산은 조선 산맥의 조산(祖山)이니~~/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


대마도도 조선 영토로 표현

아래 백두산을 보실레요?

'東'字 아래가 백두산 천지요.

백두산을 하늘에 맞닿는 신성구역으로 형상화했다는.

조선인에 백두산은 조산(祖山)의 의미를 훨 뛰어넘은 것.

백두산이 조선의 조산(祖山)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네요.


중국에선 동쪽 바다 건너에 신선이 사는 산이 셋있는데 이를 삼신산이라.

삼신산 하나가 방장산인데 유몽인은 지리산이 바로 방장산(方丈山)이라고 주장합니다.(후술)


멀리 반야봉!!

지리산 종주길 등대,나침반 같은 곳.

엉덩이만 찾으면 그곳이 서쪽.

        

말나리


일월비비추


뒷면에서 본 일월비비추

야생화 도 고도가 높아지면 색감부터 달라져요.

아랫쪽은 잡티도 보이는데 정상 쪽은 원색 자체.




어수리


사진으로 봤을 때 주능선 우측이 북쪽,좌측이 남쪽

멀리 보이는 능선은 성삼재~만복대~정령치~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




능선길 남사면

하동군 화개면 일대.


능선길 북사면


남원시 산내면,함양군 마천면 일대

우측으로  마천면이 보이네요.마천면 바로 뒤쪽이 남원시 산내면. 멀리 희미하게 덕유산.


제주도(1950)와 지리산(1915)

둘 중 누가 더 넓을까요?

동서,남북 길이에 넓이도 아주 비슷합니다.

  지리산... 동서길이 50㎞,남북길이 32㎞, 둘레 320 ㎞.  

제주도....동서 70키로,남북 30키로,해안 둘레 300키로.

둘다 타원형으로 특히 위성으로 제주도를 보면 아름답게 보인 이유죠.


지리산은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1915m)을 중심으로

1.서쪽으로 토끼봉,영신봉,칠선봉(七仙峰,1576m)· 덕평봉(德坪峰,1522m)·

명선봉(明善峰,1586m)·토끼봉(1534m) 반야봉(般若峰,1732m)·노고단(老姑壇,1507m)이,

2.동쪽으로는 중봉(1875m)·하봉(1781m)·써리봉(1640m)이 이어집니다.

동서 50㎞에 걸쳐 1500미터 이상 고봉들이 남북을 갈라놓았으니 환경적인 차이가 클수 밖에요.

북쪽은 북서계절풍 영향으로 눈이 많이 내리고 춥고,

 차,면화의 최초 시배지가 바로 지리산 남사면이죠.

왜?? 남쪽은 동서계절풍 영향으로 온화하고 비가 많아서.

그래서 종교적인 색체 또한 달랐다는.

북쪽은 조선 무당의 본향이라는 백무동에서 볼수 있듯 민간신앙과 무속이,

상대적으로 남쪽은 불교가 융성했습니다.

알고 보면 지리산의 역사는 민간신앙 대 불교 대결사이기도 합니다.




영신봉(靈神峰 1652m)

靈,,,神,,,에서 알수 있듯 지리산에서 가장 영험한 곳으로 알려진 곳.

그래서 예로부터 도가,불가,무속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김종직은 영신봉을 '雪衣雞山'이라 했네요.뜻은 한자 그대로.


영신봉 정상


사대부들이 산을 오르는 이유은 뭘까?

요즘의 산행 목적하고 좀 차이가. 현대인에 있어 산행의 의미는 보통 이런 것일듯.

개인적 체험으로 얘기하자면

먼저 건강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올라와 보니 잡사에서 벗어나지며 힐링 느낌들.

계절마다 아니 절기로 세분되어 변하는 시절을 느껴져서 좋고.

산세가 주는 이미지,분위기에 취하고... 삶이 보이고 꽃이 보이고...그리고 중독 모드.


그들은 좀 달랐습니다.

첫째가 산수 구경.

둘째가 자기수양,공부,호연지기를 기르는 것.

세째 시 쓰고,글 읽고,노래하고,기생과 즐기고,연주하며 풍류를 즐기는 것.

상당수 사대부들은 산수유람 때는 피리,비파등 악공에 기생까지 대동했습니다.

월사 이정구(1564년∼1635)같은 이는 화공(사진사)까지.

네째가 대자연 우주의 이치를 구하는 것.


그런데 사대부들이 그리 하는 데는 절대적인 전범이 있었죠.

 중국 5악이라 하죠.

동 태산(泰山), 서 화산 (華山), 남 형산(衡山), 북 항산( 恒山), 그리고 숭산(嵩山).

공자는 태산을 올랐고,주자와 한유는 형산에 올랐어요.

조선시대 사대부에 있어 공자,주자 두 성인의 태산행,형산행은 절대적 가치.

그들의 산행은 두 성인의 발자취를 밟는 것이기도.

그리고 두 성인이 그랬듯 정상에 서면 호연지기를 기르고 세상의 이치를 깨치려 했죠.

그들에게 '산에 오르다=글을 읽다'였습니다.

 讀萬券書 行萬里路 交萬人友

(화가 겸 서예가인 동기창이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이른 말)

사대부에 있어 일생의 궁극적 추구 하나가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가는 것 .

나아가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고 도를 구하는 것과도 닮았다 했죠.

산을 공부하고,수기(修己)하고 도를 구하는 수양처로 본 것.

결국 유산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넓혀가려 했습니다.

(뭐,지극히 일부 사대부들에게만 해당되겠지만...)


공자(孔子)가 태산에 올랐죠. 그리고는 한마디 합니다.

등태산 소천하 登泰山小天下

공자도 태산에 오른 뒤에야 비로소 천하가 작다는 것을 알았다는.

맹자가 이를 두고 이르기를,

/공자께서 노나라 동산(東山)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시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기셨다.

그러기에 바다를 구경한 사람에게는 어지간한 큰 강물 따위는 물같이 보이지가 않고

성인의 문에서 배운 사람에게는 어지간한 말들은 말같이 들리지가 않는 법이다/

공자도 스텝 바이 스텝 정상에 오르고 나서야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느낀 것.


또 논어에서 이르길,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인자한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인자한 사람은 장수한다./


공자 가 세상을 주유하다 집으로 오던 길에 강변 에서 흐르는 강물을 보며 탄식 하며 이르길,

/아,흐르는 것은 이러하구나!/

흐르는 세월 속 늙음을 한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으로는 흐르는 물에서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는 철학적 사유를 한 것.


김일손 <두류기행록>을 보면

당시 사대부들이 얼마나 공자의 삶을 전범으로 삼았는지 알수 있습니다.

/엄천사와 단속사 같은 곳은 모두 승려들의 도량이 되었고,

청학동은 끝내 찾을 수 없으니, 어찌할거나!

백욱이 말하기를, “소나무와 대나무 둘 다 좋지만 솔이 대만 못하고,

바람과 달 둘 다 청량하지만 바람은 중천(中天)에 그림자를 드린 달의 기이함만 못하며,

산과 물 모두 인자(仁者), 지자(智者)가 좋아하는 바이지만,

산은 공자(孔子)께서 ‘물이여, 물이여!’라고 탄식한 것만 못합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그대와 함께 길을 떠나 악양성(岳陽城)으로 나가서

큰 호수에 이는 물결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공자도 산을 즐겼지만 흐르는 강물에서 인생의 이치를 더 깊게 통찰했듯

우리도 이제 지리산을 떠나 악양으로 가 흐르는 물(섬진강)을 보자는 것.

악양은 토지의 배경지인 평사리를 말합니다. 악양벌 옆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사대부 의미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겠네요. 본디 사대부란 학자 출신 관료라는 의미.

그래서 사대부는 산수 유람 중에도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존재였죠.

유람 때도 문방구,시통(詩筒),책 몇권은 배낭에 넣고 떠났습니다. 물론 그 배낭은 노비 몫.

(詩筒이란? 한시의 운두를 얇은 대나무 조각에 써넣어 가지고 다니던 작은 통)

여기서 중요한 게 무슨 책이냐는 것.

시집과 마음 수양,수신 관련 책들로 시집은 당시(唐詩)나 남악수창집(南嶽倡酬集)을,

수신서로는 근사록(近思錄),심경 (心經).

(近思錄:유교의 도는 가까이 있다는 것.心經:도교 관련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은 것 )


그리고 주자(朱子)를 한없이 흠모했던 조선 사대부는 주자와 장식이 남악(형산)을

 유람한 것을 산수유람의 전범으로 삼았어요.

주자와 장식은 남악을 일주일간 유람하면서 주고받은 시와 시발문을 함께 엮어 남악창수집(南嶽倡酬集)을 냈죠.

조선 사대부도 산수유람 때는 그 남악수창집을 가지고 다닌 것.


동자꽃



구절초

영신봉 정상엔 가을이 왔고


옛 건물터.

암자등이 있었겠죠.


영신봉에서 바라본 촛대봉

양 사이가 세석평전


영신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더 입체적으로 표현된 자료 사진을 보면 이리~~

장터목 대피소 보이시죠?

우측 뾰쪽 연하봉.

장터목 뒤쪽 펑퍼짐한 항아리가 제석봉. 제석봉 뒷쪽으로 살짝 보이는게 중봉.

지리산 주능선은 청왕봉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실은 저 중봉~써리봉으로 이어 집니다.

그래서 화대종주 끝은 바로 중봉,써리봉 너머 대원사까지.

남사면 화개쪽


북사면

아래가 함양군 마천면

왼쪽으로 계곡 따라 V 협곡 형상 아래가 실상사가 있는 남원시 산내면.


북쪽 함양군

뒤쪽 큰 능선 아랫쪽으로 함양읍이 보이네요.


조선시대 유람기로 남아 있는게 1200여편.

조선시대 산수유람 일번지는 당연 금강산.

그래서 금강산을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이라 불렀고 가장 많이 남겨진 유람기도 금강산입니다.

다음이 지리산으로 약 100여편이 남아 있어요.

조선시대 지리산을 오르는 이는 수없이 많았을 겁니다.

설악산처럼 골산이 아닌 육산이라 누구나 맘먹고 노자만 충분하면 가능.

사대부들의 평생의 꿈 하나가 금강산 구경인데 지리산도 선망의 대상.


조선 최초의 유람기는??

바로 지리산에 올라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쓴 유두류록(遊頭流錄)입니다.

그는 42세 함양군수로 있을 때 중추절을 맞아 5박 6일간 지리산 유람을 했어요.

그 등정 출발 코스가 바로 우측 끝으로 보이는 능선길.

함양 관아를 나귀 타고 출발 후,

용유담~영랑대~하봉~중봉을 거쳐 정상 천왕봉에 오른 것.

그리고 제석봉~장터목~연하봉~촛대봉~세석평전 거쳐 바로 이곳 영신봉에 이른 후 영신사에서 1박.

하산은 사진에서 보이는 바로 앞 한신능선,한신계곡을 거쳐 백무동~마천으로.

이후 김종직의 유두류록은 지리산 산행의 길라잡이가 되었고 지리산 행 사대부들엔 필독서가 됩니다.

그래서 이후 조선 후기 산행기를 보면 김종직 관련 언급이 많고.

당연히 15,16세기 인기있는 지리산 등정 코스는 북사면인 김종직 코스.

일부는 반대편인 남사면 법천사 코스를 타고 올랐습니다.

북사면

백무동,마천면,함양읍(우측 뭉게구름 바로 아래)이 보이고.




영신봉에서 바라본 세석대피소 & 촛대봉


지리산에서 정상 천왕봉 다음으로 서사(敍事,narration)가 많은 게 영신봉일 것입니다.

그 서사를 위해 영신봉의 위치를 입체적으로 봐보죠!

아래는 영신봉 건너편 촛대봉에서 본 영신봉 일대.


앞 봉우리가 영신봉

영신봉에서 창불대로 이어지는 능선이 남부능선.

왼쪽 멀리 노고단과 반야봉이,그리고 우측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능선이 서북능선입니다.


먼저 영신봉 서사 1.


영신봉 앞 능선이 남부능선으로 소위 낙남정맥입니다.

洛南正脈?

낙동강 남쪽 산맥이라는 뜻.

백두대간은 저 영신봉(靈神峰)에서 낙남정맥이라는 줄기를 하나 분기합니다.  

그리고 낙남정맥은 김해 분성산(盆城山)에서 남해로 빠지죠.

그러니 비가 오면 낙남정맥(남부능선) 너머는 섬진강으로, 이쪽은 낙동강으로 흘러갑니다.


/(백두대간)...북으로부터 달려서 남원(南原)에 이르러 으뜸으로 일어난 것이 반야봉(般若峯)이 되었는데,
동쪽으로 이백 리를 뻗어와서 이 대청봉에 이르러 다시 우뚝하게 솟구치고는 북쪽으로 서리어 다하였다.
그 사면의 빼어남을 다투고 흐름을 겨루는 자잘한 봉우리와 계곡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계산에
능한 자일지라도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보건대, 그 성첩(城堞)을 끌어서 둘러놓은 것처럼 생긴 것은 함양(咸陽)의 성(城)일 것이고,
청황색이 혼란하게 섞인 가운데 마치 흰 무지개가 가로로 관통한 것처럼 생긴 것은 진주(晉州)의 강물일 것이고,
푸른 산봉우리들이 한점 한점 얽히어  곧게 선 것들은 남해(南海)와 거제(巨濟)의 군도(群島)일 것이다.
그리고 산음(山陰,산청), 단계(丹谿), 운봉(雲峯), 구례(求禮), 하동(河東) 등의 현(縣)들은
모두 겹겹의 산골짜기에 숨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김종직 <유두류록>-

영신봉 바로 옆 영신대

왼쪽 능선 길이 왔던 길로 칠선대서 이어지는 주능선


영신대 인근 영신사터


영신봉 서사 2


유람록이 가장 많은 산은 단연 금강산이지만, 유람록이 가장 먼저 지어진 산은  지리산.

김종직(金宗直)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이 나온 이후100여 편이 넘는 지리산 유람록이 전하고.

김종직 이후 사대부들이 지리산에 오르면 꼭 들르는 코스가 둘 있어요.

천왕봉 정상과 화개 쌍계사 뒷 능선 불일암 어드메에 있을 거라고 여긴 청학동.

더불어 신라말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있는 쌍계사.

쌍계사엔 887년 최치원이 짖고 쓴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국보)가 있습니다.

그들은 정상을 찍고는  너나없이 여건이 되면 도가(道家)의 엘도라도 청학동을 찾으려 했어요.

기본코스는 천왕봉을 찍은 후 장터목~연하봉~촛대봉~세석평원 거쳐 이곳 영신사에서 일박.

곧 영신사는 청학동 찾아가는 중간 기착지.

그 쌍계사로 인도하는 능선길이 바로 남부능선이요,그  끝자락에 쌍계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곳 영신사에서 일박한 후,

어떤이는 주능선 타고 서쪽인 칠선봉,덕청봉,삼각고지로 더 향하다

적당 시점서 빗점골 타고 의신사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이 구간은  주능선 코스가 좀 험준해 소수만이 이용.

그래서 대다수는 남부능선을 내려오다 아랫 대성골을 탔죠.

쌍계사 도달 이전 중간 기착지로 의신사,신흥사에서 다시 1박 내지는 2박.

그래서 영신사,의신사,신흥사를 합하여 삼신(三神)이라 불렀습니다.모 두 '神'가 들어가기에.

이렇듯 영신사,의신사,신흥사,쌍계사는 지리산 유람 사대부들의 주요 숙식처.


당시 지리산 내 사찰과 암자는 이렇듯 사대부 유람시 숙박시설로,승려들은 가이드가 되었습니다.

심지여 승려들은 사대부들을 실어나르는 가마꾼에, 피리 불고 비파 켜는 악공에,춤추는 무희 역할까지.

(그래서 등정기가 아니라 유람기,유산기라)

90년대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처럼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은 지리산 유람 안내서가 됩니다.

  김종직 하면 조의제문(弔義帝文)이겠죠.

사후 그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 많은 문도들이 죽임을 당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결국 그는  영남사림의 종조가 됩니다. 

김종직 문도 중 대표적인 이가 김일손,정여창,남효원,김굉필.

이들은 스승 자취를 찾고자 하는 열망까지 더해져 지리산을 찾아요.

그리고 김일손(1464~1498)은 속두류록(續頭流錄,1489년)을,

남효온(1454~1492)은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1487)를 남깁니다.

이 또한 후대 지리산 유람 참고 문헌으로 인기.

남효온,김일손은 김종직 아래서 동문 수학. 

김일손은 26세 때 친구 이기도 한 일두 정여창(1450∼1504)과 함께 등정했습니다.

남효원은 생육신 한명으로 김시습과 친구로 무려 16일간 지리산을 누볐는데 그는 첫 지리산 종주자 일지도.

빼놀수 없는 게 남원부사로 있을 때 유람한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남효원,김일손,유몽인 모두 다 천왕봉 오른 후 이곳 영신사에서 하루밤을.

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셋 모두 남부능선,대성골을 타고 화개로 내려갔어요.

중간 숙소는 당연 의신사,신흥사에서,그리고 쌍계사 거쳐 청학동 찾았고.


영신사에 들른 김종직은 <유두류록>에서 이리.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천왕봉 성모사 마야부인)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김종직이 말한 왜구는 바로 그 황산대첩(荒山大捷,1380)서 참패한 패잔병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와 성모사와 영신사에서 행한 행패를 말한 것.


성리학자 답게 이어 불교의 폐해를 논합니다.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를 황당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전포(錢布)를 보시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물론 김일손,남효원,유몽인도 유람기에서 

김종직이 유두류록에 넘긴 저 글에 대해 언급하며 나름의 논리들을 폅니다.


유몽인은 지리산 유람 도중 운봉 황산대첩비를 들러요.

그는 황산대첩비를 지나 산내면 백장암서 일박 후 지리산 북사면을 두루 유람 후 동사면 산청에서 정상에 오릅니다.

이처럼 남원,구례사람들이 천왕봉을 오를 때는 운봉을 거쳐야 하기에

중간에 있는 황산대첩비,피바위등 황산대첩 유적지를 꼭 탐방했습니다.



자살바위서 본 창불대와 남부능선


/영신사(靈神寺)에서 묵었다.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우뚝 솟아있어 그 위에 올라가면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김일손 <두류기행록>-

멀리 남해 바다까지 보인다는 얘기.

창불대에서 바라본 병풍바위(왼쪽),자살바위(우측 공기돌같은 바위) 

영신사에서 1박한 그들은 10분 거리 창불대를 꼭 들렀어요.

일대는 지리산 내 최고 암릉구간으로 경관이 수려할뿐 아니라 영험한 곳이라 여겨져

도가,유가,무속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병풍바위

뒤쪽으로 덕평봉~칠선봉 주능선이 보이고


자살바위


영신봉 서사 3


창불대,자살바위,병풍 바위 바로 아랫 계곡이 화개 대성골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신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창불대 거쳐 대성골을 통해 쌍계사로 향했죠.


1952년 겨울.... 지리산 내 빨치산 소탕을 위한 대공세가 펼쳐집니다.

영원사골, 백무동골, 칠선골, 벽송사골, 조개골, 대원사골, 중산리골, 거림골, 삼점골 등

 지리산 일대가 모두 빨치산의 활동지.

국군 4개 사단이 지리산을 포위 후 토끼몰이식 공세.  빨치산들을 대성골 한 곳으로 몰이하는 것.

그리고 미 B2폭격기 까지 가세해 폭격을 가하니 대성골은 10여일 간 불바다가 됩니다.

이때 사망자만 2천여명. 일부 여성 빨치산들은 밀리고 밀리다 다다른게 이곳 창불대.

막다른 길,막다른 인생.... 저 낭떨어지에서 몸을 던지니 이를 자살바위라.


이 대공세에서 살아남은 이가 있었으니, 1963년 생포된 마지막 여성빨치산 정순덕(1933 ~ 2004).

그녀는 비전향장기수로 23년을 감옥에 있다 1985년 석방.

산청군 삼장면 내원골 출신으로 17살 결혼 몇개월만에 한국전이 터집니다.

남편은 인공치하 때 부역했고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지리산으로 입산.

그녀는 남편 행방을 대라는 군경의 고문에 시달리다 탈출 후 입산한 것.


그리고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9월 지리산 빗점골에서 최후를.
칠선골,백무동,조개골에서 경남 유격대를 이끈 이영회는 천왕봉 아래쪽서 11월 교전 중 사망.
54년 1월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는 비트가 발각되자 수류탄 자폭.
2월,경북 봉화 출신으로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한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은

반야봉의 한 동굴에서 같은 빨치산이 쏜 총에 의해 사망.
4월,전남 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는 백운산에서 군경에 의해 사살.

얼어죽고,굶어죽고,총에 맞아죽고...그들은 이리 스러져 갔습니다.

남부능선 창불대에서 바라본 세석 대피소.

입체적으로 보면 아래.

남부능선 아랫쪽서 바라본 좌 창불대,자살바위,영신봉,,,우측 촛대봉,,,그 사이가 세석평전


영신봉에서 내려와 세석대피소로 향합니다.

왼쪽으로 천왕봉. 저 능선 타고 가는 거죠.


벽소령서 4시간 만에 세석대피소 도착.

지리산 내  대피소 중 최대 규모.

햇반 하나 사고 인스턴트 국 데우고 늦은 아침을 해결합니다.



원츄리 세상


동자꽃



세석평원은 꽃 세상


세석은 사통팔달

정상 가려는 자 장터목으로,

북쪽 마천으로 하산하려는 자 백무동으로,

화개로 가려는자 의신마을,청학동으로

중산리쪽 가려는 자 거림마을을 선택하면 됩니다.

난 촛대봉으로~~


바로 앞 봉우리가 영신봉

바로 뒤로 영신대에 영신사터가 있어요.

남부능선 이쪽은 넉넉한 흙산이지만 너머는 암릉구간.

얼굴 한면은 흙산,또 한면은 바위산이라는 이중성.


영신 봉~영신대~창불대 일대는  지리산에서 가장 영험한 곳으로

무속인,승려,도교적인 수도 자 등등이 몰 리는 또다른 이유가 있으니...바로 이런 양면성 때문.

남부능선 한쪽은 암릉 구간으로 암릉이 주는 맑은 기운에다 비바람 막아줘 거처로 최적.

그리고 반대편은 넓은 평원이라 식수와 먹을 거리가 해결되죠.

한마디로 세석평전은 관의 수탈을 피하고, 의식주 해결해주고

호연지기에 영적인 뭔가를 얻을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그래서 혹자는 이곳이 청학동일 것이라고도 얘기합니다.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1152~1220)~~.

그는 도가의 이상향인 청학동이 지리산에 어딘가에 있다고 여기고

개경에서 소 등에 얹혀 지리산 화개골 까지 두번이나 왔습니다.

그리고 쌍계사 입구까지 이르렀으나 더 이상 찾을 방법이 없다며 되돌아가요. 

그의 파한집(破閑集)에 나온 얘기.

파한집 영향으로 이후 많은 이가 청학동은 지리산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꿈꾸며 찾아들어오고.

하지만....'황금을 칠한 사나이' 엘도라도(eldorado)가  있을가요?


유몽인(柳夢寅 )도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서 이상향을 지리산에서 찾았다는.

/옛날 사람이 일찍이 천하의 큰 강 셋을 논하면서 황하,양자강,압록강을 들었다.

그러나 압록강의 크기는 한양의 한강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직접 보지 않고 범범하게 논한 것이니, 책 에 실려 있는 것도 정확하지 못한 점이 있다.

나는 우리나라 바다와 산을 모두 두 발로 밟아보았으니,

천하를 두루 유람한 자장(신라 스님)에게 비할지라도 나는 크게 뒤지지 않는다.
내 발자취가 미친 모든 곳의 높낮이를 차례로 짓는다면

두류산(頭流山)이 우리나라 첫번째 산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인간 세상의 영리를 마다하고 영영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면,

오직 이 지리산만이 편히 은거할 만한 곳이리라. /


인간 세상의 영리를 마다하고 영영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면,

오직 이 지리산만이 편히 은거할 만한 곳이리라!!!


촛대봉에서 바라본 세석평전(細石平田)


한자에 뜻이 다 들어있네요.

유람기에는 대부분 세석평(細石平)이라. 예전엔 마을이 있었어요.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서 자여원( 沮 洳 原)이라 했습니다.  

'낮고 습기있는 지대'를 뜻하니 정확한 표현.

세석에 이른 이들은 이 높은 고지에 이런 평원이 있다니?...하며 놀라죠.

덕유산의 덕유평전과 함께 1500m 이상의 고지대에

이처럼 아름답고 넉넉한 평원이 있어 지리산을 더욱 사랑하는지도 모릅니다.


남효온 (南孝溫,1454~1492)이 쓴 지리산 일과(智異山日課)에는 이리~~.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다.5,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도 놓아져 있다.

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세석평원에 매잡는 관청도 있었나 봅니다

해동청(海東靑)... 조선 매를 말합니다.

예로부터 매사냥은 권력자들이 즐기던 유희 중 하나.

조선매는 몽고에도 널리 알려져 원나라 지배기 때는 주요 조공품.

그 전통이 이어졌는지 조선 때도 왕궁,돈 많은 사대부들에겐 인기.

이중 가장 뛰어난 매가 지리산 천왕봉 일대서 포획한 매.

지리산 세석평전에 내상군(內廂軍)이라는 매잡이 관청을 둘 정도였으니.

당연 주민들의 고생은 이루말할수 없었을 터.


유몽인의 <유두루산기>에는 이리~.

/사당 밑에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잣나무 잎을 엮어 비바람을 가리게 해 놓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매를 잡는 사람들이 사는 움막입니다”라고 하였다.

매년 8,9월이 되면 매를 잡는 자들이 봉우리 꼭대기에 그물을 쳐 놓고 매가 걸려들길 기다린다고 한다.

매 가운데 잘 나는 놈은 천왕봉까지 능히 오르기 때문에 이 봉우리에서 잡는 매는 재주가 빼어난 것들이다.

 관청에서 쓰는 매가 대부분 이 봉우리에서 잡힌 것들이다.

매잡이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치니,

어찌 단지 관청의 위엄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 뿐이랴.

.....

백성의 온갖 고통이 이와 같은 줄 누가 알겠는가?/


앞으로 남부능선

세석평전 물은 거림골로 흐릅니다.

세석 하면 철쭉이죠.지리 십경 중 하나.


촛대봉(1,703M)


설악산 대청봉  높이입니다.

촛대봉으로 이름이 굳혀진 과정을 보면 '언어의 사회성'이란 걸 생각하게하는데,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는..... 甑峰(증봉,증은 떡시루 의미) ,

1487년 추강 남효온..... 賓鉢峰(빈발봉) ,

1611년 어우당 유몽인..... 獅子峯( 사자봉 ) ,

1851 년 하달홍의 두류기 ( 頭流記 )에는..... 중봉(中峰) ,

1879 년 송병선 두류산기 ( 頭流山記)에는...... 燭峯(촛대봉) 이라고 기록하고 있네요.

송병선 (1836~1905)은 두류 산기 ( 頭流 山記 )에서 이리.

/촉봉(燭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촉봉이 촛대봉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 지리산의 많은 봉우리 이름표는 누가 달았을까?

물론 지리산을 오른 힘있는 식자층이 붙혔을 것.

이름을 불러줄 이가 없다 보니 잊혀지고 또다른 이가 다시 짖고를 반복하다 어느 시점에 정착.

촛대봉은 적어도 1879년 이전 부터 불려졌음을 알수 있네요.

우측으로 남부능선이 뻗어내리고.

남부능선 우측이 하동군 화개면으로 계곡수는 섬진강으로.

남부능선 좌측은 거림골로 계곡수는 낙동강으로.

촛대봉 바로 앞 봉우리는 시루봉.

옛사람들,청학동을 찾아 갈 땐 주로 저 남부능선과 우측 대성골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별책 부록***


소설 '토지'와 '지리산'


남부능선의 Y 형태 중 V 사이가 소위 tv에 자주 나오는 훈장들의 '청학동'(하동군 청암면).

갈라진 우측 능선 중간 즈음에 쌍계사가,

그리고 능선 끝 섬진강과 맞닿은 곳이 악양면우로 토지의 배경 평사리(하동군 악양면)가 위치합니다.

영신봉~삼신봉~형제봉~고소산성~악양 평사리 이리.

위성사진으로 다시 보면,

구천이 야반도주 예상로


태백산맥 & 토지..... 둘다 지리산이 주무대.

태백산맥에는 인물들이 활동하는 지리산의 지명들이 명확히 나오지만

토지에선 언급된 실제 지명이라곤 최참판댁 뒷산에 있는 '고소산성' 하나.

저자는 완간 이전까진 평사리를 직접 가본 적이 없었다는데 하물며 지리산을 올랐을 리는 더더욱.

그러나 저자의 유,청소년기 생활공간이였던 진주나 통영은 실지명이 나오고.


최치수가 이복동생 김환을 죽이려 지리산으로 들어갈 땐 연곡사 피아골 어디쯤으로 상상을...등등

토지를 읽을 때 생각나요.

그곳이 어디지? 하며 지리산 어드메로 단정해 그림을 그리던...

그렇다면 김환(구천)이 서희의 엄마 별당아씨와 지리산으로 야반도주할 때  루트는?

 당연 고소산성~형제봉~삼신봉~영신봉으로 이어지는 저 남주능선을 탔을 것.

그리고 그들의 생활 공간은 남부능선의 끝, 이곳 세석평전 초막.

(고소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국경)

김환이 잉태된 곳은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그리고 태어난 곳은 천은사.


전봉준,손화중과 더불어 동학군의 3대 지도자 김개남!...셋 모두 처형.

김개남은 남원,구례,순창,순청 일대를 석권하고 지리산 변 남원 교룡산성에 주둔합니다.

그리고 1894년 11월 겨울 김개남이 이끄는 1만여 농민군은 운봉으로 진출해요. 

남원과 운봉 사이는 백두대간이 갈라놓은 험지로 둘을 잇는 고개가 바로 여원치. 

그때까지 운봉은 농민군이 요구한 집강소(농민군 자치행정기구) 설치등을 거부하고 있었고,

구례,순창,임실 출신 지주들이 도피해 있었던 상황.

또한 함양,산청쪽 지주들의 지원하에 관군과 함께 방어막을 여원치에서 치고 있었고.

총대장이  운봉의  지주 박봉양.

김개남이 이끈 농민군은 결국 백두대간이라는 지리적인 현실을 극복못하고 여원치서 대패합니다.   

공주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와 더불어 운봉 여원치전투 패배는 갑오농민전쟁 실패의 서막.

그리고 패잔병들은 관군의 보복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소설서 김환은  지리산으로 입산한 동학군 패잔병들을 모아 

의병으로 재기를 모색하는데 이는 이같은 역사적 배경에 기반을.


동학군 지도자 김개주의 실제 모델은 김개남! 

그는 퇴락한 양반가로 학문적 소양에다 셋 중 사상적으로 가장 레디컬.

당시는 동학군은 연곡사는 물론 평사리 남쪽 하동까지 접수하고 있었으니,

연곡사에서 김개주 겁탈로 김환을 잉태하게 한 근거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동남쪽으로 중산리가 보이고

그 너머가 진주시.

아래 계곡이 거림골로 빨치산 주무대.



구절초

정상은 가을맞이 꽃들로.


산오이풀

한여름에도 정상에 오르면 어김없이 반기는게 바로 구절초와 산오이풀.

둘은 여름을 가장 먼저 밀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꽃입니다.





동쪽으로 연하봉 거쳐 천왕봉 가는 주능선.

연하선경(烟霞仙境)

촛대봉~장터목까지 3키로 구간으로 지리 10경 중 으뜸으로 치는 이가 많습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 까지 25키로 중 이제 3.7키로 남았어요

우측으로 남쪽 사면

바로 앞이 거림골,멀리 중산리가 보이고.

중산리 넘어가 진주시.

지리산은 분위기,이미지로 느끼는 곳.

25키로 주능선 길,사시사철 늘 맑은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뒤돌아 보니

왼쪽이 촛대봉,우측이 영신봉,그 사이가 세석평전.


가운데 영신봉.


가운데 오목한 곳이 세석평전으로 우측 아래 하산길이 한신계곡.

백무동서 한신계곡 타고 세석으로 오른 후 촛대봉~연하봉~장터목~천왕봉으로.

그리고 백무동 계곡 따라 하산하는 백무동 원점회기 코스가 요즘 수도권 산행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코스.

남부터미날에서 백무동 행 고속버스가 있어서죠.

500년 전 김종직 일행도 영신봉에서 우측 능선과 한신계곡을 따라 하산했습니다.


북사면 마천면쪽에서 구름이 밀려오네요.


멀리 덕유산 주능선이 구름 사이로.


조선 사대부 중 가장 많은 산을 유람한 이는 누굴까?

어유당 유몽인(1559~1623)!!

먼저 그의 <유두루산록> 도입부를 보죠.


/아, 나는 성품이 소탈하고 얽매임을 싫어하여 약관의 나이부터 산수를 유람하였다.

벼슬길 전에는 삼각산(三角山)에 머물며 아침저녁으로 백운대(白雲臺)를 오르내렸으며,

청계산(淸溪山)∙보개산(寶盖山)∙천마산(天摩山)∙성거산(聖居山)에서 독서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팔도를 두루 돌아다녔다.

청평산(淸平山),한계산(寒溪山),설악산(雪嶽山)을 유람하였다.

봄∙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의 구룡연(九龍淵),비로봉을 구경하고 동해에 배를 띄우고 내려오며

영동(嶺東) 아홉 군의 산수를 두루 보았다.
그리고 적유령을 넘어 압록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을 지나

험난한 장백산(長白山)을 넘어 파저강(波豬江),두만강(豆滿江)에 이르렀다가 북해에서 배를 타고 돌아왔다.
또 삼수(三水),갑산(甲山)을 다 둘러보고, 혜산(惠山)의 장령(長嶺)에 앉아 저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았다.

명천(明川)의 칠보산(七寶山)을 지나 관서의 묘향산(妙香山)에 올랐으며,

발길을 돌려 서쪽으로 가서 바다를 건너 구월산에 올랐다가 백사정(白沙汀)에 이르렀다.

중국에 세 번 다녀왔다.

요동부터 북경까지 그 사이의 아름다운 산과 물을 대략 보고 돌아왔다./


이 정도면 유명 산 중 안가본 곳이 별로 없네요.

중국을 세번에 산수갑산,묘향,금강,삼각산,칠보산,설악,압록,두만강,지리산을 다 유람했으니.

눈에 띄는게 해금강에서 배를 타고 동해로 내려와 관동팔경을 유람하고,

북한산 백운대를 아침 저녁으로 올랐다는 구절.


그런 베테랑 유몽인에게 지리산은 어떤 것이였을까?


/나는 일찍이 땅의 형세가 동남쪽이 낮고 서북쪽이 높으니,

남쪽 지방산의 정상이 북쪽지역 산의 발꿈치보다 낮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두류산이 아무리 명산이라도 우리나라 산을 통틀어 볼 때 풍악산(금강산)에 집대성이 되니,

바다를 본 사람에게 다른 강은 대단찮게 보이듯 이 두류산도 단지 한주먹 돌덩이로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보니 그 웅장하고 걸출한 것이 우리나라 모든 산의 으뜸이었다./

그동안 모든 식자들이 그랬듯 금강산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지리산 정상에 올라보니 지리산이야 말로 최고란 것.

심지여 중국 대 문장가들을 소환하며 지리산 위대함을 설파합니다.

/두류산은 살이 많고 뼈대가 적으니, 이게 더욱 높고 크게 보이는 이유이다.

문장에 비유하면 굴원(屈原)의 글은 애처롭고, 이사의 글은 웅장하고, 가의의 글은 분명하고,

사마상여의 글은 풍부하고, 자운의 글은 현묘한데,

사마천의 글이 이를 모두 겸비한 것과 같다.

또한 맹호연의 시는 고상하고 위응물의 시는 전아하고,

왕마힐의 시는 공교롭고, 가도의 시는 청아하고, 피일휴의 시는 까다롭고, 이상은의 시는 기이한데,

두자미(두보)의 시가 이를 모두 종합한 것과 같다. /

지리산은 문장의 사마천이요, 시의 두보란 것.

어유당이 지리산에 빠져도 너무 빠졌네요


김종직에 있어 지리산도 어유당과 같았습니다.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中原)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

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옥검(玉牒玉檢) 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 하였을 것이고,아니면 의당 무이산,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

지리산을 황제가 재를 올린다는 오악 중 하나인 숭산,태산,태산의 반열에 지리산을 올려놓고 있다는.


천왕봉은 구름에 가렸다 걷쳤다를 반복.


유몽인(柳夢寅,1559~1623)~~

유몽인하면 어유야담(於于野談)이겠죠. 어유당은 유몽인 호.

최초 설화집인 어우야담(於于野談) 에는 당대 사대부들의 삶이 있는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의관 정제하는 그럼 모습이 아니라 산수를 유람하며 들은 얘기들로  해학으로 넘친다는.

거기엔 우리가 잘 아는 황진이와 서경덕 일화도.

그의 지리산 유람기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도 그런 성향이 잘 드러나요.

 당대 최고 문장가로 유려한 필치의 지리산 묘사와 감상이 압권입니다.

시 짓고 술을 마시고 음악이 흐르는 풍류도 고스란히 전하고.


이번 지리산 종주 전에 4편의 유람기를 읽었어요.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두번 더.

김종직을 시작으로 김일손,남효원,유몽인 이리.

앞 3인은 성리학적인 사고가 유람 내내 드러나는데 유몽인은 훨 자유인이라는.

풍류를 넘어 산에서 인생 철학을 내비치는가 하면 무었보다도 특히 지리산의 위대함을 간파합니다.

다음은 지리산서 터득한 인생사 단면~~

유몽인은 천왕봉을 오른 후 장터목 인근 향적사에서 일박하고

바로 연하선경,지금 이 능선을 밟으며 촛대봉으로 향합니다.


/일찍 향적암을 떠났다.

고목 밑으로 나와 빙판 길을 밟으며 허공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고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앞서 가는 사람은 아래에 있고,뒤에 가는 사람은 위에 있다.

즉 벼슬아치와 선비는 낮은 데 위치하고 종들은 높은 데 위치하게 되었다.

그러니 선비는 공경할 만한 사람인데 내 신발이 그의 상투를 밟고,

업신여길 만한 자(종)인데 내 머리가 그의 발을 떠받들고 있으니, 또한 세간의 일이 이 행차와 같구나./

비탈진 산을 내려갈 때 사람의 위치에 따라 높고 낮음이 달라지는 것을 인생사에 비유한 것 .

​ ​ 인간사 가운데 높다고 하는 것이 늘 높은 것이 아니고,

낮다고 하는 것이 항상 낮은 것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한 것.


동자꽃



산오이풀

장시간 지겨우면 줄기 하나 꺽어 코에 대어 보시길.

 향긋한 오이 내음이.



모싯대


뒷쪽으로 보이는 게 천왕봉.

절대 지존으로 향하는 통과의례 차원인지 예전 누군가 석상 둘을 세웠어요.

장승 역할인지도. 왼쪽은 온전한 형태,우측은 밑부분이 끊겼고.





천왕봉이 더욱 가까이





일대는 야생화 천국.

 황홀하다는 말이 어울려요.

연하능선을 넘는 바람을 따라 일제히 숙이는 풀들의 군무.


3키로 이어지는 천상 화원

 구름이 넘나들고 멀리 노을이라도 비취면 말그대로  연(烟)과 하(霞)가  어울어지는 선경(烟霞仙境)

옛사람들에겐 신선의 세계에 들어온 느낌일 터.




미역줄나무 터널도 지나고




뒤돌아 보니


 매력적인 이 길도 5백년 전에는 이름조차 없었나 봅니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었다.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천왕봉)과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장터목 인근 향적사에서 일박하고 연하선경을 지나 세석으로 가던 중, 김종직이 일행들과 나눈 대화.
그 시절 지리산에 오를 수 있었던 자들은 지극히 소수였기에
이름을 지어줘도 불러줄 이가 없으니 사양하겠다는 얘기.
지금은 봉마다 연하봉, 삼신봉,화장봉 등등 명칭이 주어졌지만 당시만해도 이름조차 없었다는.
여기서 우리는 산,봉우리에 이름표를 달아준 자들은 당연 식자층이였음을 알수 있고.
승려들은 불가식으로,유자들은 성리학에 도교적으로,
일반 백성들은 그냥 일상에서 보고 느낀데로.
매가 자주 앉아있으면 매봉,항아리같이 생겼으면 시루봉 등등으로

연하봉(1667m)


자수정,일월비비추





모싯대



동짜꽃길 따라서





배초향


추어탕에 저 잎을 넣어 먹죠. 왜?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래서 배(排)초향입니다.

꿀풀과로 향기가 나니 벌,나비들이 많아요.


장터목 산장( 1,653m)


 봄가을 이곳에서 장(場)이 섰기에 장터목.

제석봉 (1,806m) 과 연하봉 (1,730m) 사이에 형성된 널찍한 고갯마루.
산청의 덕산 주민들 , 그리고 함양의 마천 , 남원의 산내 주민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곳 .

산 청쪽 주민들은 중산리계곡의 상류인 법천계곡을 따라, 함양 · 남원쪽 주민들은 백무동계곡을 따라 올라왔고 .
장터목의 해발 높이는 1,653m. 당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선 장터.

장터목에서 내려다본  백무동


백명의 무당이 살았다해서 백무(百巫).,,당시 '백'이란 많다는 의미.

백무동은 정상 천왕봉 성모사에 모셔둔 성모(聖母)를 주신으로 하는 무당들이 

천왕봉 오르는 중간 기착지가 되면서 무당의 집성촌이 형성된 것.

나아가 점차 백무동은 팔도 무당들의 본향이 되었고.
무속이 시들해지면서 지금 행정 지명은 백무(白武)로 바뀌었네요.  
지금도 하동바위 밑 샘터에는 많은 기도객들이 몰립니다.  


이제 천왕봉 자매봉인 제석봉으로 향합니다.

일대는 야생화 천국.


세잎종덩굴




말나리


물레나물

꽃의 모양이 실을 잣는 물레 를 닮아서


구절초


쑥부쟁이 피기 직전


동자꽃






제석봉 고사목 지대

수백년 된 전나무,구상나무들이 불타 죽은 고사목 군락지  

60년대 초 도벌꾼들이 수사가 들어오자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냥 일대로 모조리 불로 태워버린.

실은  자유당 소속 지역 정치인들이 권력을 이용 도벌을 사주했다는.




제석단(帝釋壇)

제석봉(1808m)은 천왕봉, 중봉에 이어 지리산 3위의 고봉.

천왕봉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이 위성봉에 천신을 상징하는 제석(帝釋)이란 이름을 붙였고.

그 자락에 제석단(帝釋壇)을 만들어 천신에게 제를 올렸다는.




제석봉 주변 고사목들


뒤돌아 보니 연하봉은 운무에 쌓였고


/산등성이를 따라 천왕봉을 가리키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사나운 바람에 나무들이 모두 구부정하였다.

 나뭇가지는 산 쪽으로 휘어 있고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

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껍질과 잎만 있는 소나무,잣나무는 속이 텅 빈 채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가 지 끝은 아래로 휘어져 땅을 찌르고 있었다. 산이 높을수록 나무는 더욱 작달막하였다.

 산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푸른빛과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 오니 꽃나무 가지에 아직 잎이 나지 않고, 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쫑긋 내밀고 있었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 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있는 것 같았다./

/가지에 아직 잎은 나지 않고,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쫑긋 내밀고 있었다/

익숙한 문장들인데 원작자는 유몽인인듯.

실경 묘사가 타 유람기하곤 차원이 다릅니다.


제석봉 지나니 천왕봉은 더욱 가까이


천왕봉은 어느새 운무에.




구름패랭이? 술패랭이?


당시 유자(儒子)들의 자연관을 알수 있는 일화 하나~~

/승려가 말하기를, “산 위에는 꽃과 잎이 5월이 되어야 한창이고, 6월이 되면 시들기 시작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백욱(정여창)에게 묻기를, “봉우리가 높아 하늘과 가까우니 먼저 양기를 얻을 듯 한데

도리어 뒤늦게 피는 것은 왜입니까?” 라고 하니,

백욱이 말하기를, “땅과 하늘의 거리는 8만 리이고 우리가 며칠 걸어서 상봉에 올랐지만

상봉의 높이는 지상에서 1백 리도 채 되지 않습니다.

상봉에서 하늘까지 거리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양기를 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홀로 우뚝 솟아 바람만 먼저 맞을 따름입니다.” /

-김일손 <두류기행록>-

해를 먼저 맞으니 산 위가 더 따뜻해야하고 꽃도 먼저 피여야한다는 얘기.

이때 김일손 나이 28세.



통천문

500미터 남았어요.


通天門

천왕봉,아니 하늘로 통하는 문.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등등 옛 사람들의 유산기에도 자주 등장하는 각자.

/의문∙일경 선사와 함께 향적암에서 상봉(上峰)으로 올라갔다.

구름에 덮이고 바람에 깎여 나무는 온전한 가지가 없고 풀은 푸른 잎이 없었다.

무서리가 내리고 땅이 얼어 날씨는 산 아래보다 곱절이나 추웠다.

구름사다리와 석굴은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올 정도였다.

우리는 그곳을 지나 드디어 상봉에 올랐다./

-남효온 (1452~1492) 지리산 일과(智異山日課)-

/구름사다리와 석굴은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올 정도였다./

통천문을 얘기 한 것.



한구비만 더 돌면 정상인줄 알았는데 아직.





저 위일까?

맞다! 정상!


천왕 각자 바로 위가 정상.


天柱

천왕봉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천왕봉 (天王峰)


請看千石鐘 ( 천간천석종 )

非大叩無聲 ( 대비고무성 )

萬古天王峰 ( 만고천왕봉 )

天鳴猶不鳴 ( 천명유불명 )

천석이나 되는 종

크게 쳐야 소리 나는데

만고의 저 천왕봉

하늘이 쳐도 울리지 않는 다네

-남명 (南冥) 조식 (曺植, 1501~72)-

천왕봉...하늘이 쳐도 울리지 읺을 정도로 장대하답니다!!


Beethoven - Symphony No. 5 in C minor 2nd movement  

http://www.youtube.com/watch?v=bq32Wi9bJUg


맞나요?


늘 인증샷 찍는 자들로 넘치는 곳이지만 지금은 나 포함 두명.

전날 태풍이 예고되어 있어 휴일인데도 지리산 출입을 막은 것.

그러니 지금 지리산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전날 입산해 종주산행 하는 이들.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한반 도 산줄기는 이곳 천왕봉에서 대장정을.

남한 최고봉에 섰는데 감회가 없을리가요.

4백년 전 유몽인이 토로한 소회로 대신합니다.


/지금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면면이 4천리나 뻗어왔다.

그리고 아름답고 웅혼한 기상이 남해에 이르러 엉켜모이고 우뚝 솟아나

열두 고을이 주위에 둘러 있고,사방의 둘레가 2천리나 된다.

1.안음(安陰)과 장수(長水)는 그 어깨를 메고,

2.산음(山陰)과 함양(咸陽)은 그 등을 짊어지고,

3.진주(晉州)와 남원(南原)은 배를 맡고,

4.운봉(雲峰)과 곡성(谷城)은 허리에 달려 있고,

5. 하동(河東)과 구례(求禮)는 그 무릎을 베고,

6.사천(泗川)과 곤양(昆陽,현 남해군)은 발을 물에 담그고 있다.

그 뿌리에 서려 있는 영역이 영남과 호남의 반 이상이나 된다./


지리산 정상에서 발 아래로 펼쳐진 세상을 논하는 글 중  이보다 더 문학적 글은 없을듯.

한발 더 나아가 중국 대륙에 비유, 두류산의 위대함을 칭송합니다.

/두류산은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는 구가 있는데,

 그 주석에 ‘방장산은 대방국(帶方國) 남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지금 살펴보건대, 용성(龍城)의 옛 이름이 ‘대방’이다.

그렇다면 두류산은 곧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진시황과 한무제는 배 타고 바다 건너 삼신산을 찾게 하느라 쓸데없이 공력을 허비했는데,

우리들은 앉아서 삼신산을 구경할 수 있다./

진시왕이 그리 찾으려 했던 방장산이 바로 지리산으로

우린 앉아서 구경하는 홍복을 누린다는 것.


그리고  발 아래 펼쳐지는 산들을 나열하는데 남한땅 절반에 해당합니다.

지리산은 동서길이 50㎞,남북길이 32㎞, 둘레 320 ㎞.   딱 제주도 만한 크기.

/승려가 가리키며 이름을 대는 대로 따라 보았다.

동쪽을 바라보니 대구의 팔공산(八公山)과 현풍(玄風)의 비파산(琵琶山)과

의령의 자굴산(자堀山)과 밀양의 운문산(雲門山)과

산음(山陰)의 황산(黃山)과 덕산(德山)의 양당수(兩塘水)와 안동의 낙동강이 보였다.

서쪽을 바라보니 무등산은 광주에 있고, 월출산은 영암에 있고, 내장산은 정읍에 있고,

운주산(雲住山)은 담양(潭陽)에 있고, 변산(邊山)은 부안(扶安)에 있고,

금성산(錦城山)과 용구산(龍龜山)은 나주에 있었다.
남쪽으로 소요산(逍遙山)을 바라보니 곤양(남해군)임을 알겠고,

백운산(白雲山)을 바라보니 광양임을 알겠고,

조계산(曺溪山),돌산도(突山島)를 바라보니 순천임을 알겠고,

사천 와룡산(臥龍山)을 바라보니 동장군(董將軍)이 패한 것이 생각나고,

남해(南海) 노량(露梁)을 바라보니 이순신이 순국한 것에 슬퍼졌다.

북쪽으로는 안음(安陰)의 덕유산과 전주의 모악산(母岳山)이 하나의 작은 개미집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사이에 큰 아이처럼 조금 솟구친 것이 성주의 가야산이었다.

 삼면에 큰 바다가 둘러 있는데,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 큰 파도 속에 출몰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마도의 여러 섬은 까마득히 하나의 탄환처럼 작게 보일 뿐이었다.

아, 이 세상에 사는 덧없는 삶이 가련하구나.

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 죽는 초파리 떼는 다 긁어 보아도 한 움큼도 채 되지 않는다.

인생도 이와 같거늘..../


남해 노량 앞바다를 보면서 이순신 전사를 애석해 하고, 대마도도 언급하네요.

김종직도 정상서 대마도를 얘기하는 데 당시 식자층에서는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는.

다음은 김종직이 언급한 대마도~~.

/아래 산들이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용호(龍虎)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

그 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鷄立嶺)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 창공에 널리 퍼져 있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으로는 신기루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1980년 대 천왕봉 표지석.

'경남인' 이전엔 '영남인'이였다는.


1986년 처음으로 천왕봉 올랐어요.그땐 '한국인' 아닌 '영남인'.

쿠테타로 5공이 들어서고,그 5공 실세 인  권익현은 바로 함양,산청 국회의원 . 더우기 전씨는 인근 합천 출신.

권씨에 의해 1982년 표지석이 세워지는데 야만의 시대에 걸맞는  권력 횡포의 상징같은 것.

이후 빈번히 훼손이 일어나 '경남인'으로 바뀌고.

그리고 언젠가 여수시 모 산악회장이 정으로 경남인 각자를 문질러버린 것.

그리고 '한국인'으로 재탄생 .

권씨가 국회의원이였던 함양은 대학자 김종직이 군수로 있던 곳입니다.


日月臺

해돋이와 해넘이 그리고 월출을 볼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겠죠.

저 일월대 각자 얘기는 옛 사람들 유람기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명필,졸필 할것 없이 주변 바위들은 서체 전시장

왼쪽 집터 보이나요?



성모상을 모시던 성모사( 聖母祠) 터.


지리산을 이해하는데 있어 키워드가 몇 있어요.

그 중 핵심이 성모사와 성모상.

성모는 석가의 어머니로 마야부인(摩耶夫人)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모는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이던 시기도 있었어요.

시대에 따라 성모상 주인공이 달라졌다는.

지리산의 역사,문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모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천왕봉에 모셨던 성모상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삼국사기,삼국유사,이승휴의 제왕운기 까지 모두 다 지리산 산신 얘기가 나옵니다.

도교의 영향으로 산엔 반드시 산의 주인인 산신이 있다고 믿어왔죠.

지리산 산신의 주인공은 역사적으로 마고,노고를 시작으로 선도성모,위숙왕후,마야부인으로 이어집니다.

통일신라 때는 노고단에 남악사를 짖고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산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어요.

그때는 오악(五岳) 중 지리산을 남악이라 했고.

그러다 고려 때 주인공과 모시는 장소가 바뀌어요.

신라 말 송도의 한 여인이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하늘에 재를 올리고 낳은 인물이 태조 왕건.

이후 고려는 노고단을 떠나 천왕봉에 성모사를 짖고 관료를 상주시켜 매년 성모 위숙왕후를 위한 제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국교가 되면서 그 자리는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으로.

새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창건자 어머니는 지리산 산신이 되어 숭상될 정도로 지리산의 위상이 절대적이였다는.

그런데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 모친은 왜 빠졌을까?

이성계는 반대 세력인 최영을 죽임으로써 조선을 세웠죠.

비운의 최영이 바로 무가에서 신으로 모셔지고 있는데서 그 이유를 유추할수 있네요.

또 조선의 통치 이념이 성리학이라는 것도 또다른 이유.


마고,노고,선도성모,위숙왕후,마야부인~~.

이렇듯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요 여신의 산.

모든이를 품어주는 지리산의 넉넉함이 여신을 상주시켰는지도.

당연 승려,무속인들을 넘어 주민에게도 천왕봉 성모사는 신성한 곳.

천왕봉에 오른 이는 너나할거 없이 성모상에 진설하고 제문을 읽으며 소원을 빌었습니다.


천하의 김종직도 그랬네요.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맑게 해달라고 외쳤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사당에 들어가서
주과(酒果)를 올리고 성모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공자)가 태산(泰山)에 올랐던 일 과
한자(韓子,한유)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 을 사모해 왔으나,
직사(職事)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운제(雲梯)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 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이어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이 감히 그 큰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김종직(1432~1492)의 유두류록(遊頭流錄)-


그리고 성모사에 들어가 하루밤을 잡니다.

/네 사람이 사내(祠內)에서 서로 베개삼아 누웠노라니,

한기가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중면(重綿)을 껴입었다.

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김종직은 아침에도 운무가 깔려 그날은 포기하고

편도 1시간 거리 장터목 인근 향적사(香積寺)로 내려가 일박합니다. 일어나니 맑게 개었고.

일행들은 다음 행선지로 갈 걸 바라나 김종직은 다시 천왕봉으로 향해요.

그리고 발 아래 펼쳐진 파노라마를 이리 묘사합니다.

/아래 산들이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용호(龍虎)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

그 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鷄立嶺)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 창공에 널리 퍼져 있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으로는 신기루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리산의 위대함을 찬양하는데~~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中原)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

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옥검(玉牒玉檢) 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 하였을 것이고,아니면 의당 무이산,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

지리산을 황제가 재를 올리는 숭산,태산의 반열에 올려 놓고 있다는.

그러나 역시나 성리학자 특유의 편협성은 어쩔수 없으니~~

/그런데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를 배운다는

용렬한 사내나 도망간 천인들의 소굴이 되어있다

.... 이것이 어찌 이 산의 불우함이 아니겠는가./

 숭산이나 태산처럼 천자나 공자가 나서서

금으로 입힌 옥검을 바치며 재를 올릴만한 명산임에도 불구하고

군입대를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된자나 도망한 천인의 산이 된 것을 한탄한 것.


그리고 몇년 뒤 제자 김일손이 천왕봉 성모사에 들러요.  

/저물녘에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한 칸의 작은 판잣집(성모사)이 있었다.

안에는 돌로 된 부인상(婦人像)이 있는데, 이른바 천왕(天王)이었다.

그 판잣집 들보에는 지전(紙錢)이 어지러이 걸려 있었다.

또, “숭선(嵩善) 김종직(金宗直) 계온(季昷),

고양(高陽) 유호인(兪好仁) 극기(克己), 하산(夏山) 조위(曺偉) 태허(太虛)가

임진년(1472) 중추일에 함께 오르다.” 라고 쓴 몇 글자가 있었다.

일찍이 유람한 사람들의 성명을 차례로 훑어보니, 당대 걸출한 사람들이 많았다./


성모사 대들보,기둥 등엔 다녀간 사대부들의 제명이 널려있었고,

스승 김종직 이름도 확인하고는 감격해 한것.

당시 사대부들은 산수를 유람하면서 바위에는 각자하고,

암자 대들보 등엔 제명(이름을 적음)하고,

정자,누각엔 자신의 시나 소회를 나무에 새겨 현판으로 걸어 놓은 걸 즐겼습니다 .

김일손도 스승 김종직처럼 성모사에서 일박하는데~~~

/겹으로 된 솜옷을 껴입고 두터운 이불을 덮어 몸을 따뜻하게 하였다.

따라온 사람들은 사당 앞에 불을 지펴놓고 추위를 막았다.

한밤중이 되자 천지가 맑게 개어 온 산하가 드러났다.

골짜기의 흰구름이 마치 바다에서 조수가 밀려와 온 포구에 흰 물결이 눈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듯하였다.

드러난 산봉우리들은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마음과 정신이 모두 늠름하고 몸은 아득한 태초에 있는 듯 하였다./


스승도 제자도 사당 안에서 자고 노비등은 밖에서 불피고 뜬눈으로 보냈다는. 시절은 스승은 가을,제자는 봄.

특이한 것은 김일손도 성모사에 들어가 재를 올리려고 제문까지 완성했으나

성리학자의 본분 운운하며 포기한다는 것.

그리고  아침에 해돋이를 보는데,

 /맑은 하늘에 잘 닦은 구리거울 같은 해가 솟아올랐다.

사방으로 저 멀리 눈길 닿는 데까지 바라보니, 뭇 산은 모두 개미집처럼 보였다.

산의 동남쪽은 옛 신라의 구역이고,산의 서북쪽은 옛 백제의 땅이다.

앵앵거리며 날아다니는 모기들이 독 안에서 생겼다 사라지는 것같이,

처음부터 꼽아보면 얼마나 많은 호걸들이 이곳에 뼈를 묻었겠는가?/

김일손도,유몽인도 독안에 든 파리의 삶을 들며 인생의 덧없음을 얘기한다는.


생육신의 한 사람 남효원 (南孝溫 1452~1492).

생육신 김시습과 가깝게 지냈죠.

그의 지리산 유람기에서는 두류산이 아닌 지리산으로 지칭.
다음은 남효원의 지리산 일과(智異山日課) 중 성모사 부분~
/그리고 천왕상(天王像)을 보았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분은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倻夫人)입니다.

이 산의 산신령이 되어 이 세상의 화복 을 주관하다가,

미래에 미륵불을 대신하여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어찌 그리 황당하던지 문헌상의 근거가 없는 말이었다.

나는 사당 모퉁이 석각(石角)에 앉았다.

사방은 엷은 구름마저 다 걷혀 산과 바다를 두루 볼 수 있었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내 발아래 있었다/


다음은 유몽인의 <유두루산록>에서 성모사 부분~~~

/드디어 지팡이를 내저으며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 위에 판잣집이 있었는데 바로 성모사였다.

사당 안에 석상 한 구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흰옷을 입힌 여인상이었다.

이 성모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고려 태조대왕의 어머니가 왕을 낳아 길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의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당시 성모사는 민간신앙의 절대적 성지 같은 곳.

이 높은 데 까지 신도들이 줄을 이어 여인숙 같은 숙박업이 있었으니.

유몽인 <유두루산록>엔 이리~~~.
/영남과 호남에 사는 사람들 중에 복을 비는 자들이 이곳에 와서 떠받들고 음사(淫사)로 삼았다.

그래서 옛날 초나라,월나라에서는 귀신을 숭상하던 풍습이 생겨났다.

원근의 무당들이 이 성모에 의지해 먹고산다.

이들은 산곡대기에 올라 유생이나 관원들이 오는지를 내려다 보다가,

관원이 오면 토끼나 꿩처럼 흩어져 숲 속에 몸을 숨긴다.

유람하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가, 이들이 하산하면 다시 모여든다.
봉우리 밑에 벌집 같은 판잣집을 빙 둘러 지어놓았는데,

이는 기도하러 오는 자들을 맞이하여 묵게 하려는 것이다.

짐승을 잡는 것은 불가에서 금하는 것이라 핑계하여,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소나 가축을 산 밑의 사당에 매어놓고 가는데,

무당들이 그것을 취하여 생계의 밑천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성모사,백모당,용유담은 무당들의 3대 소굴이 되었으니, 참으로 분개할 만한 일이다./

천왕봉 아래 북사면에 백무동이라는 무당 집성촌이 탄생하게 된 이유를 말하고 있다는.


정상엔 역시나 구절초,산오이풀.

산오이풀,쑥부쟁이도.

정상엔 지금 나 홀로.

오는 이 끊기고,가는 이 다 가버린.

대원사로 갈까... 중산리로 갈까....?

발은  중산리를 향하고....


애초엔 중봉~써리봉 거쳐 대원사 코스였으나 3 시간여 단축 중산리를 택합니다.

지난 5월에는 장터목으로 다시 내려가 백무동으로 하산.

장터목서 북쪽 백무동이든,남쪽 중산리든 9키로 정도.

동쪽인 대원사는 13키로.


지리산 주능선은  대청봉에서 끝나는 게 아녀요.

백두대간은 지리산서 대장정을 마치는데 그 마지막 용트림이 천왕봉.

그 용트림이 일순간 멈춰질 수는 없는 법.

 그 관성은 한동안 중봉,써리봉으로 이어지고 .

그래서 진정한 지리종주는 화엄사~대청봉~대원사,,,그 화대종주 .

다음엔  그리하자! 해보 지만 또 어찌 변할지....(홀로 산행의 단점이자 장점)

아쉬움 속 법계사 거쳐 중산리로 하산합니다.

이 중산리 코스가 최단 코스라보니 이땅 산길 중 가장 경사가 심해요 .

연이여 이 코스 택한다면 관절 망가지는 것은 시간 문제.

오후 2시! 하산을 서둘러야 .

중산리서 7시30분 마지막 버스를 탄 후   산청 원리정류장서 남부터미널 행을 타야 하기에.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보이지 않은  지겨운 길!

서서히 시야가 트이고.

평소 스틱을 잘 활용하는 나이지만 오늘만은 내 관절도 시큰시큰.

아래로 법계사가 보이네요.


스승 김종직은 북쪽 함양에서,

유몽인은 동쪽인 산청에서 올랐는데

그러면 동문수학한 남효원,김일손은?

둘은 지금 내가 내려가는 이 길을 역으로 올랐습니다.

제자 둘은  3년의 시간차를 두고 남사면 산청 중산리 인근을 거쳐 이곳 법계사 쪽으로 오른 것.

그리고 천왕봉 바로 아래에서 방향을 서쪽 장터목으로 틀어 향적사에서 일박합니다.

 당시 사대부등의 산행은 그냥 정상에 오르는게 유일 목표가 아녔어요.

인근 절경을 찾아 아름다운 산수도 두루 구경.

함양에서 출발한 김일손은 김종직처럼 직접 북사면 능선을 타지 않고

지리산 동사면인 산청 일대 산수를 두루 구경합니다.

즉 동쪽인 산청~단성(단속사)~덕산 ~지금의 중산리를 거쳐 천왕봉으로.

정상 찍은 후 연하봉~촛대봉~영신봉(영신사 일박)~대성골~의신사(일박)~신흥사~쌍계사(일박)로.

그리고 쌍계사서 최치원 흔적들을 찾아보고는

불일 암(청학동) 지나 악양(소설 '토지' 배경인 평사리)으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사대부들의 산행은 등정이 아니라 유람(遊覽),혹은 유산(遊山)...

그 기행문 도 유람기,유산기라.


남효원은 아마 최초의 지리산 종주자 일겁니다.

무려 15박 16일을 산자락,정상 그리고 주능선을 누볐죠.

진주를 출발해 동쪽인 산청~단성(단속사)~덕산~지금의 중산리를 거쳐 천왕봉으로.

그리고 연하봉 거쳐 촛대봉~세석~영신봉(영신사 일박).

영신봉서 주능선을 타고 서쪽인 칠선봉으로 향하다 덕평봉 즈음서 빗점골로 하산해 의신사서 일박.

다시 의신사 뒤 서쪽 능선을 넘어 칠불암(일박)으로.

다시 불무장능선을 타고 올라 삼도봉 거쳐 반야봉까지.

초막등서 숙박하고 노고단으로 이동 후 지금의 화엄사 계곡으로 하산해 화엄사에서 며칠을.

당사 화엄사 주변은 수십개 암자가 있을 정도로 불국토.

전체적으로 지리산 내 암자만 3백여개 있을 정도.

화엄사를 떠난 그는 구례읍으로 내려와 섬진강 따라 화개로 남진합니다.

그리고 화개장터에서 화개를 거슬러 올라 쌍 계사(일박)로.

다시 쌍계사 너머 불일암 지나 현 청학동 거쳐 출발지였던 진주 여사등촌으로 원점회기.

이 정도면 지리산 종주 맞는거죠?


그런데 사대부 산행에는 반드시 불가의 도움으로 가능했습니다.

숙소는 사찰 아니면 암자였고 식사도 주로 이곳에서.

가이드도 중이요,불가의 성악인 범패며,피리 비파 생황으로 흥을 돋으는 이도 중.

떠나는 사대부 배냥에 먹을 것 채워주는 이도 중.

가마꾼도 중이요,칡넝쿨로 양반 허리를 메고 위에서 끄는 이도 중.


다음은 김일손 <두 류기행록>에 나오는 실례~~

/나는 먼저 가서  시냇가 바위에서 기다리는데, 

 백욱(정여창)은 힘이 빠져서 허리에 줄 하나를 매고 중으로 하여금 앞에서 당기게 하였다. 

 나는 백욱을 향해 말하기를, “중은 어디서 죄인을 잡아 오는가? ” 하니

백욱은 웃으며, “산신령이 포객(逋客)을 나포한 것에 불과하다.” 하였다./

칡넝쿨로 자신의 허리를 묶고 중으로 하여금 위에서 끌고 가게한 것.

이런 유람이였음에도 유람기에는 늘 불가에 대한 증오가 가득합니다.

그 증오는 유람기에 거의 본능적으로.

2시간 만에 법계사(法界寺) 도착.

고도  1,400m로 설악산 봉정암과 더불어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


법계사(法界寺,   1 400m )  

/5리 정도 더 가 법계사(法界寺)에 다다랐다. 절에는 승려 한 사람만 있었다.

나뭇잎은 파릇파릇 막 자라나고 산꽃은 울긋불긋 한창 피었으니, 때는 늦은 봄이었다.

 “두류산에는 감나무, 밤나무, 잣나무가 많아서 가을이 되면 열매가 바람에 떨어져 온 계곡에 가득하다.

이곳의 승려들이 열매를 주워 주린 배를 채운다.” 라고 하는데, 이는 허황된 말이다.

다른 초목들도 이 높은 곳에서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데 하물며 과실이야 어떠하겠는가?

해마다 관아에서 잣을 독촉하므로 주민들이 늘 산지에서 사다가 공물로 충당한다고 한다.

매사에 귀로 듣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하는 것에 이런 경우이다./

-김일손 <두류기행록>-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544 년에 조사 ( 祖師 ) 연기 ( 緣起 ) 가 창건...화엄사 ,대원사도 연기조사가.

전각들은 한국전 때 다 타고 최근 신축.

단 하나 영화로웠던 시절을 웅변하고 있으니 바로 신라말 3층석탑(보물)


망바위 ( 1 300 m)

  중산리와 법계사 사이.

올라서 보면 남해 바다가,뒤로는 천왕봉이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



중산리 도착.

고도 637미터(관악산 고도)로 여전히 심산유곡.

걸어서 30분 더 가야 중산리 버스정류소.

중산리계곡


지금은 도로가 뚫리고 위락시설이 들어서 그렇치 예전엔 심산유곡.

중산리 고도만도 600미터가 넘어요.

천왕봉서 발원한 법천계곡은 중산리 직전서 중산리계곡으로 불리다,

 중산리를 지나면서 시천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시천을 한자로 옮기면??

'矢川'

화살같이 빨리 흐르는 하천이라는. 일대의 행정명도 시천면. 이해가시나요?

천왕봉~중산리 코스가 워낙 경사가 심하다 보니 물의 흐름도 순식간이라는.

시천은 시천읍서 대원사 계곡서 흘러오는 덕천강을 만나 진주 남강으로 빠집니다.


지금 중산리를 떠난 버스는 시천을 따라 난 산길을 달립니다.

풍광이 좋아요.시천읍을 가로지르네요.

시천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

남명 조식 묘

앞으로 덕천강이 흐릅니다.


시천읍은 시천과 덕천강이 만나는 곳에 형성된 유서 깊은 고을.

시천읍 하면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일 정도로 관련 유적지가 여렀.

말년 그가 후학을 가르치던 산천재(山天齋), 그를 기리는 덕산서원, 그리고 음택이 이곳에 있죠.

덕산서원은 예전 덕산사가 있던 곳으로 여러 유람기에도 나온다는.

어느 시점에 유림 쪽에서 덕산사를 밀어내고 덕산서원을 세웠고.

경상좌도 퇴계 이황이라면 좌도엔 남명 조식.

둘은 1501년 동갑으로 남명은 벼슬 않고 평생을 처사(處士)로 살며 후학 양성.

그는 산천재에서 말년을 지내면서 지리산만 12번 올랐습니다.

지리산 유람기로 유두류산록(游頭流山錄)을 남겼고.

금강산 주인이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라면 지리산 주인은 남명 조식.

봉래 양사언 아시죠?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태산가(泰山歌)의 주인공.

남명 제자 중엔 특히 임진왜란 때 곽재우,정인홍 등등 의병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나의 관심사는 그의 묘.


그 음택엔 후학들이 바친 추모 비석이 많아요.

사후 그를 추모하는 자들이 각지에서 보낸 것죠. 거기엔 송시열도.

 그런데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당시 나이 20세)이 바로  그 비석에 묶어 고문을 당했다는.

(비석들에는 한국전 때 박힌 총자국 흔적이 나있음)

  야심 동아줄을 풀고 탈출에 성공한 그녀는 곧바로 남편 찾아 지리산으로 입산합니다.

죽은 조식에 묶인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이 또한 역사의 이 아이러니.


40분만에 산청읍 원리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진주 발 남부터미날 행 고속버스에 몸을...


화엄사 출발 천왕봉 찍고 중산리 하산.

&&...

1.한여름 화엄사~ 대청봉~ 중산리  40 km 2박 3일 종주 끝.

어떤분들은 하루 만에 다녀오신분들도 있더군요.

2.1편 올리고 절기 둘이 지났어 요.

다음주에 올린다는 말을 남긴 걸 많이 후회했습니다ㅎㅎ

'다음주'를 뺐어야 했었죠.

격려 댓글에 답도 못하고...

모든님들 감사합니다!!!




1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산이좋아^^
    '19.10.4 10:18 AM

    wrtour님의 글을 읽고나면
    난 산을 겉만 핣고 다니는구나 ~~반성?하게 됩니다.
    늘 쫒기듯 바쁘다는 핑게로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오래 산에 있고 싶은 욕심만
    앞세워...
    이리 천천히 눈마춤하면서 걸어보질 못했네요.
    지리 표지석이 이리 바뀐것도 몰랐구요.ㅠㅠ
    5월 지리산이 열리면 새벽에 코제를 숨 헉헉거리며 올라 연하천에서
    아침을 먹고 또 부지런히 걸어..대원사로 하산을 하면 대략 15시간을 걸어서
    아~~제각각의 산빛을 자랑하는 지리를 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름날의 지리산을 wrtour님처럼 이리 찬찬히 걸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감사히 오래오래 다시다시 되새김질하며
    지리에 들면 여기엔 이런 사연이 있었지 ~~꺼내보렵니다.

  • wrtour
    '19.10.11 12:03 AM

    와~
    저로선 2박3일도 힘든 화대종주인데, 15시간만에 다녀오시고 완전 산사람이시네요.
    존경~~^^
    저는 마음은 늘 앞서는데 막상 산에 들어서면 체력적으로 힘들고 그렀답니다.늘 안전하고 행복한 산행이시길...

  • 2. 쑥송편
    '19.10.4 7:58 PM

    오래 전, 3박 4일로 걸었던 길. 저는 천왕봉 먼저 갔다가 화엄사쪽으로 내려왔었어요.
    그 길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두 명이나 우연히 만나, 서로 깜짝 놀라고...

    세석평전이니 선비샘이니... 참 그리운 이름들입니다.
    사진 한 장 없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풍경들이 님의 글과 사진을 보며 새로이 살아나네요.
    앞으로 이 년 안에 꼭 다시 걸어보겠다고 마음먹습니다.

  • wrtour
    '19.10.11 12:09 AM

    아니 왜 2년인가요?
    올 가을.겨울 준비 후 봄엔 다녀오세요
    당연히 이번엔 버스로 성삼재 이동 후 노고단에서 부터요.오히려 3박3일,2박3일이 더 힘들다고 하네요.1박2일이 최적.
    산에서 3일,4일 있는다는 게 체력적으로 더 힘들다는.

  • 3. 현직
    '19.10.6 3:51 PM

    멋지네요 산행을 하면서 들꽃 관찰하면서 가는 기쁨이 있어요 두고두고 볼께요

  • wrtour
    '19.10.11 12:16 AM

    감사해요.
    산에 많이 다니시나봅니다
    늘 건강하시구요

  • 4. 변인주
    '19.10.8 8:22 AM

    원글에 시시한 댓글로는 정말 무색합니다! *
    산세며 야생화며 어느 하나 마음 주지 않은곳이 없는 듯하여
    더 다정해 보이고요.

    멋진 음악까지 잘 찾으셔서 음악 듣는 맛도 쏠쏠한데
    근세 역사공부까지 하게되니 그 깊이가 가이 없어요.
    읽고 금새 까먹지만요. ^^

    가 보리라 가보리라 하지만 기약도 없는 세월
    눈으로라도 저기쯤이구나 그곳이구나 저리생겼구나라고만 합니다.
    가을 평안하시길 그리고 원하시는 산행도 많이 하시길........

    참, 모싯대에 반했습니다!!!!!

    찬찬히 봤습니다.

  • wrtour
    '19.10.11 12:32 AM

    늘 아름답게 봐주시니 얼마나 고마우신지.... 감사드려요.
    기약도 없는 세월이라뇨? 어서 서두르세요!!! ㅎ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고요

  • 5. 쭈혀니
    '19.10.8 10:30 AM

    뭐라 댓글 달아야 할지ㅡ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정독했습니다.
    공부 많이 해야겠다..마음 먹습니다.

  • wrtour
    '19.10.11 12:36 AM

    정독하셨다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행간만으로도 쭈혀니님 마음 다 읽고도 남음이 있어요
    이 가을 행복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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