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줌인줌아웃

생활속의 명장면, 생활속의 즐거움

제 목 : 홀수의 방

| 조회수 : 868 | 추천수 : 2
작성일 : 2019-04-25 09:18:09

홀수의 방

                                                             박서영


  잊겠다는 말 너머는 환하다. 그 말은 화물열차를 타고 왔고 꽃나무도 한 그루 따라왔다. 꿈이었나봐. 흩어지는 기억들. 슬픈 단어들은 흩어진 방을 가진다. 너는. 나를. 그녀를. 누군가를. 사랑은 없고 사랑의 소재만 남은 방에서 너는 긴 팔을 뻗어 현관문에 걸린 전단지를 만진다. 잊겠다는 말은 벼랑 끝에 매달린 손.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도대체 그곳은 어디인가. 떠나면서 허공에 던져놓은 너의 단어들. 흩어져 있는 너의 단어들이 흰 배를 드러내놓고 날아가는 걸 본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등을 돌렸다. 이제 내 몸에서 돋아나는 그림자를 이해하기 위해 계절의 밤을 다 소비해야 한다. 우리의 그림자는 한 패가 아니다. 그림자는 암호처럼 커진다. 씻어도 투명해지지 않는다. 젖어서 흐물흐물 찢어지면 내부를 들여다볼 텐데. 이젠 버려야 하나. 어차피 한 패도 아닌데. 우리는 오로지 나였을 한 사람과, 너였을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붙어있다. 인정하자. 그러지 않으면 사랑에 빠져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으니. 가로등 불빛 아래 쭈그리고 앉아 그림자의 윤곽을 돌멩이로 그려준다. 내가 떠나도 바닥에 남을 뭔가를. 기억은 순간순간 그림자들의 방을 뺏는 놀이 같아.

  그 와중에 잊고 싶다는 말이 개미처럼 우왕좌왕한다. 그 와중에 미안과 무안(無顔)은 깊은 방을 만들고 있다. 나는 방을 잃고 현관문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너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 오로지 너였을 한 사람을 발굴하듯이. 그래서 발굴된 영혼이 다른 영혼을 찌를 듯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 문학동네,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중에서




시인의 시집 제목이 끝자락에 나온 시


첫 문장이 나는 좋다

잊겠다는 말 너머로 보이는 가망없는 희망이 대책없이 밝아 보여서


미래형의 언어들은 자체발광 긍정이다

빌려 채운 세간살이가 더욱 반짝이듯이

 

돌려 막고, 

돌려 막아,

돌려 막으니,

지금은 온통 슬픔일 수 있다 




*사진위는 시인의 시 

*사진 아래는 쑥언늬 사설

*사진은 쑥언늬 동네에 이젠 지고 없는 꽃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우유
    '19.4.25 9:34 PM

    글도 좋고 사진도 좋아요
    좋은 글을 발췌한 원글님의 촉도 좋구요

  • 쑥과마눌
    '19.4.25 10:23 PM

    감사합니다^^

    같이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제게 힘이 된다지요 ㅋ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25504 광복 75주년 도도/道導 2020.08.15 47 0
25503 웅이 동생 오월이예요 8 푸른감람나무 2020.08.13 534 0
25502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희망이 있다 도도/道導 2020.08.13 139 0
25501 위로가 되기를 기도하며 도도/道導 2020.08.12 226 0
25500 감자 놀러왔어요(사진많아요) 10 온살 2020.08.12 562 0
25499 우중충한 오후 당 떨어졌을 때, 웅이 어때? 8 푸른감람나무 2020.08.10 703 0
25498 지리산 속에서 우는 소리 도도/道導 2020.08.10 320 0
25497 윔비의 서비스 12 도도/道導 2020.08.08 758 0
25496 별이의 추억 10 베로니카 2020.08.08 797 0
25495 홍수와 폭우로 감각을 잃었습니다. 도도/道導 2020.08.07 432 0
25494 출근길 부러워서 한컷 6 푸른감람나무 2020.08.06 1,055 0
25493 인애를 생각하다 도도/道導 2020.08.05 241 0
25492 장마가 그치고 양춘삼월이 되기를 도도/道導 2020.08.04 279 0
25491 챌시 중성화수술 하고 왔어요. 19 챌시 2020.08.03 1,109 0
25490 깊은 산속의 비경을 만나다 6 도도/道導 2020.08.03 434 0
25489 계류에서 힘을 얻다 도도/道導 2020.08.01 270 0
25488 홍수 주의보 발령 도도/道導 2020.07.31 488 0
25487 지붕위 늙은 어미와 아기5마리 (모두 구조) 8 Sole0404 2020.07.31 1,219 0
25486 지붕위 늙은 어미고양이와 새끼5마리 2 Sole0404 2020.07.30 980 0
25485 보고 배울 수 있는 지혜 2 도도/道導 2020.07.30 377 0
25484 지상 90m 에서 흔들리는 경험 도도/道導 2020.07.29 465 0
25483 1~2개월된 숫냥이 입양처를 찾습니다 레몬즙 2020.07.27 683 0
25482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 도도/道導 2020.07.27 363 0
25481 (유머)호랑이 부부와 사자 부부의 차이 1 카렌튤라 2020.07.26 803 0
25480 한 주간을 마무리하며 도도/道導 2020.07.25 303 0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