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gunch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0042&fbclid=IwY2xjawSW...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홍수연 전 공동대표도 “1985년 대학에 입학해 처음 만나 평생을 함께해온 선생은 저에게 최악의 환자로 남아 있다. 40대 후반에 어금니가 다 없어진 선생에게 임플란트를 해주기 위해 쫒아다녔지만 너무 바빠 치과에 올 시간이 없었던 선생에게 여태 임플란트를 해주지 못했다”면서 “선생은 갔지만 여전히 우석균은 살아 있을 것이다. 선생이 투병을 하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게 후배들에 대한 사랑이었는데 여기 남아 있는 우리 후배들이 다시 우석균 선생이 되어 그의 길을 함께 걸어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아까 입관식에서 아빠한테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몸 위에 다라니경을 덮어주었다. 저승에서 7개의 심판을 잘 통과하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아빠가 잘 통과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마음에 관에 ‘심판 조심해‘라고 썼더니 동생 수안이가 ‘말대꾸는 하지마’라고 댓글을 덧붙이더라”고 소개했다.
아울러 그는 “하지만 제가 아는 우리 아빠는 저승에서도 지배계급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말대꾸를 할 거다. 아마 벌써 저승 곳곳의 불평등과 부조리에 맞서고 혁명을 도모하고 있을 것만 같다”며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집에 없었다. 대신 싸우느라 바빴다. 거리 곳곳의 투쟁현장에 안 간 곳이 없었다. 아빠가 100분토론에 나갔을 때는 TV에 나온 아빠가 자랑스러워 디시인사이드에 ‘우리 아빠 토론 잘했나요?’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아빠가 참여한 운동을 나열하자면 오늘 하루를 다 써도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빠가 용기를 나눈 사람은 셀 수도 없다. 아빠는 혼자 잘나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저한테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또 여기 있는 사람들과 또 오지 못한 많은 이들에게 하나뿐인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이다. 그렇게 하느라 아빠는 바쁠 수밖에 없었다. 자기 건강도 챙기기 어려울 만큼 바빴다”고 회고했다.
끝으로 그는 “계엄이 터졌던 날 국회로 가는 길에 아빠는 전화를 해서 ‘내가 가족대표로 가니까 너는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가부장제의 수호자냐’고 말대꾸를 했다. 그렇게 농담을 하면서 우리는 국회 앞에서 만났다”면서 “아빠는 끝까지 아빠답게 살았기 때문에 아빠답게 죽은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후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라는 특별한 관계 속에서 우석균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석균이라는 사람이 믿었던, 언제나 잃지 않으려고 했던 아름다운 마음과 용기, 그리고 투쟁을 우리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아빠를 기억하며 울고 있는 수백 개의 얼굴 속에서, 말도 안되는 농담 속에서, 팔레스타인 민중을 위해 흘리는 눈물 속에서, 투쟁현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는 아빠를 발견할 것이다”고 추모했다.
다른 부고 기사
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2444390?sid=102
한겨레 기사입니다. 끝의 웹자보에 계좌번호 있습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808471?sid=102
그 계좌번호 적습니다.
카카오뱅크 3333089361055 이가연
우석균님명복을빕니다 하니 딱 10글자 되더군요.
뒤늦게 알게되어 올린 글에 부고계좌 출처에 대해 말씀하신 분들이 계셔서 추가합니다. 여기는 사진첨부가 안돼 불편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