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조선왕족실록 UFO쓴 사람인데요... 읽고 있는 책에 진짜 재밌는 내용이 많네요.
이번엔 <현모양처>에 대한 이야기 잠깐 해드려도 될까요... (재미없음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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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모양처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전통이라 생각되지만 사실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의 상이다.
고려시대에는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지위를 누렸기 때문에 현모양처의 이미지는 없었고
조선시대 역시 성리학으로 인해 퇴보되긴 했지만 현모양처가 아닌 삼종지도(결혼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 후에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름)를 강요받았다.
조선시대 여성상으로 신사임당을 꼽지만 신사임당은 현모양처가 아닌 시와 그림이 뛰어난 지식인으로 분류된다.
19세기 후반, 문호의 개방으로 서양문물이 들어왔는데 당시에도 우리 민족은 교육에 열혈이었으므로
고종 20년에 원산학사를 시작으로 선교사들이 근대 학교를 잇달아 세웠다.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은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유교전통이 강했던지라 부모들은 딸을 이화학당에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이화학당의 첫 학생은 고위관료의 첩으로, 명성황후의 통역관이 되기 위해 입학했지만 3개월만에 포기했다.
그후로도 이화학당은 학생모집에 매우 애를 먹었는데, 당시 개화파인 박영효가 딸을 보낸 이후에야 여학생이 늘기 시작했다.
13년 후 개화파 관료의 부인들이 설립하고 운영한 순성학교가 생겼는데, 여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신문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남여의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남자가 벌어다 주는데 의존해 사는가. 여자는 안에만 머물면서 술과 밥을 짓는 것은 낡은 생각이다. 여자아이들을 우리 여학교에 보내라'
설립자인 관료의 부인들은 고관대작의 부인 뿐만 아니라 서민이나 기생들에게도 학교의 문을 개방하였고 이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벌여 순성여학교를 설립하여 최초의 여성 사립학교가 된다.
그러나 일본의 내정간섭의 심화로 1901년 학교는 일본인에게 넘어가게 되었으며 5년이 흘러서는 일본의 간섭은 더욱 심해져 조선 여성이 교육에 눈을 뜨는 것을 퇴보시켰다.
그러다 1906년 서울에 여성을 위한 학교인 양규의숙이 설립되었는데, 이 학교의 취지문에 '현모양처'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현모양처라는 단어는 조선인들에게는 듣도보도 못한 처음 듣는 용어였다.
그러나 현모양처는 19세기 후반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로, 근대 여성의 상이 아닌 주로 집안일을 하라는 여성의 역할을 강요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일본 내에서 사용되다가 30년 후 조선 땅에 있는 양규의숙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 여성상은 현모양처이며 이는 여성의 상징이라고 가르쳤다.
일본인이 가르치는 학교에서 현모양처의 개념은 조선 사회로 번져나가게 되었으며, 일제는 식민지 여성은 집에서 바느질, 뜨게질. 청소, 집안일 등에 충실한 여성이 현모양처라고 치켜 세우게 된다.
집안일만 하는 여성에게는 철학이나 사상 같은 고등교육은 필요없다는 논리이다.
조선시대에는 '양처'라는 말이 있긴 했으나, 이는 천인 신분의 남자와 결혼한 양인 여성을 뜻하는 것으로 현모양처와는 다르다.
현모양처는 우리 전통이 아닌 일본 여성상이며 이는 일제의 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