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가면서 행복에 대한 정의도 달라지네요. 20대의 행복의 정의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처럼 나름 담대했다면, 50이 넘어간 지금은 쇼펜하우어처럼 "고통이 없는 것이 행복"임에 동의하게 됩니다.
고통이란게 육체적 고통이 있고, 정신적 고통이 있죠.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고, 마음이 아프다보년 몸도 병드는 것이라. 고통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게 쉽지 않죠. 그래서 행복이 만만치 않습니다.
몸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은 규칙적인 생활, 운동, 소식이죠. 참 어렵죠. 특히 인간관계가 루틴을 무너뜨리고, 운동도 방해하고, 과식을 유발하죠. 50이 넘어가면 인간관계를 부부 관계에 집중하는게 맞는듯 합니다. 20대 때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의 행복을 위해 다양하고 많은 인간관계가 중요했다면, 50대 때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간관계를 줄이는 게 맞더군요. 내가 자는 것, 마시는 것, 운동하는 것, 읽는 것, 느끼는 것 등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나이때가 된 듯 합니다.
정신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이 있는 듯 합니다. 문제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정신적 고통은 내 노력으로 달라질 수 있는데, 사회적 차원의 정신적 고통이 내 노력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명박을 보고도 박근혜를 뽑고, 박근혜를 겪고도 윤석렬을 뽑고, 이해관계에 따라 양심을 버리고 이익을 좇아 그러는 것들은 차라리 논리로는 이해가 되니,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습니다. 문제는 주변이죠. 메타 인지가 땅바닥에 붙어있는 껌딱지같은 정치적 맹함으로 나에게 정신적 고통을 부가하는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생각도 없는 맑은 인간들.
그런 논리적 모순과 무지함은 저같은 'ENTJ'에게는 엄청난 고통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통스러울 때면 돌이겨 봅니다. 20대 때, 전두환 노태우 잡아 넣을 '특검 제도' 만들어 보자고 주말이면 종로에서 토끼몰이 당하면 시절을, 우리 의견을 들어 줄 '국회의원' 한 명 만들어 보는게 소원이었던 시절을. '충청도' 저 동네는 나 죽을 때까지 김종필을 못 벗어날것라던 '충청도 출신 89학번 선배'는 지금껏 죽지 않고 잘 살고있지만 지금의 충청도는 그 때의 충청도가 아니라는 실체적 사실을.
힘 냅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