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집에서 읽을까 하다가 다시 새별오름으로 향했습니다.
생각해보니 내일부터는 연휴의 시작이고 연휴가 끝나면 저도 돌아가야하므로
한적한 새별오름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늘 차를 세우는 자리에 차를 세우고 책을 읽으며 놀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4시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거의 5시가 다 되어서야 오름을 떠났습니다.
두시간 전까지만 해도 노는 게 좋아서 갈치조림은 안하는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었었는데
내일 오는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며 동문시장으로 갈치를 사러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려면 조금 더 서둘러서 일어섰으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동문시장은 거리가 멀었습니다.
공항도 지나고서 한참을 더 가서야 시장에 도착했습니다.
실하고 듬직한 갈치를 두 마리 사고, 무도 하나 샀습니다.
제가 무중에서 작은 걸 골라 들었더니, 할머니가 무가 작다고 파 세 뿌리를 얹어서 주십니다.
파도 사려고 했는데 참 잘됐습니다.
시장 내부 구조에 익숙치 않아 장 보는 시간이 좀 길어져서 돌아오는 길이 많이 혼잡해졌습니다. 돌아와서 바로 갈치조림을 가스불에 올립니다.
저의 계획은 오늘 90프로 정도 끓여서 내일 아침에 냉장고에 넣어두면, 언제든 꺼내 먹으면 되니까 아이들 일정에 갈치조림이 영향을 크게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녁 식사 때 한 토막 먹어봤는데.... 아주 아주 맛있게 되었습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아이들 픽업을 나가야 해서 마음이 분주합니다.
몇 시까지 뭔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건 그 전부터 그 일에 마음을 써야 하니 그만큼 품이 드는 일입니다.
마치 여우가 네 시에 오는 왕자를 두 시부터 기다리듯 말입니다.
제 머릿속에는 아이들에게 먹이고 싶은 제주음식리스트가 만들어졌고, 아이들의 짧은 일정에 맞춰 메뉴들을 이리 저리 끼워 맞춰 보고 있는 중입니다. 마치 퍼즐처럼...
도착 시간이 1시30분이니까 공항에서 곽지 바닷가로 와서 시래기 김밥하고 회를 점심으로 먹일까 합니다.
그리고 곽지 일몰을 보는 걸로 일정을 정해봅니다.
아이들을 만나러 공항 가는 길이 두근두근합니다.
갑자기 보고 싶은 마음이 증폭되어 마음이 조급해 지는 것 같습니다.
세 녀석들 다 약간 피곤한 얼굴입니다. 아침부터 짐 챙겨서 비행기 타느라 부산했겠지요.
제가 세운 오늘의 일정은 모두 오케이입니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허기진 녀석들이 김밥도, 회도 맛있게 먹어 치웠습니다.
그리고 곽지 해변으로 갔습니다. 휴일이라 다람쥐통 자리가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비어 있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보는 제주 바다에 취해 행복해했습니다. 특히 우리 며느리가 좋아했습니다.
다람쥐통 (이건 제가 붙이 이름이라 원래 이름은 모르겠습니다.)에서 하루를 보내는 엄마를
상상하면서 엄마의 휴가를 부러워했습니다.
오늘 해는 세상 참한 새색시처럼 안녕을 고하기로 했나봅니다.
구름도 없고, 바람도 없는 하늘을 고운 색으로 물들이며 수줍고 조용하게 물러갔습니다.
해지는 걸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 며느리가 아주 좋아했답니다.
정말 일상에서는 뭔가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이 너무나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한가 봅니다. 오래도록 바라보기 위해서...
이제 숙소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파트에서만 살아본 두 아들들은 이 집을 몹시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며느리는 시골 큰아버지댁이랑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작은 마당도 좋아하고, 낮은 천정, 울퉁불퉁한 벽도 재미있어 했습니다.
큰아들은 일정이 맞는다면 이곳에서 한 달 재택근무를 해보고 싶다고도 하더군요.
작은 집은 아이들 셋이 오면서 북적북적합니다.
잠잘 방을 고르는 데 의외로 딱 요 펴면 가득 차는 제일 작은 방이 인기입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큰아들이 그 방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저녁 메뉴는 갈치조림입니다.
아이들이 씻고, 짐정리를 하는 동안 밥을 하고 갈치조림을 약불로 얌전하게 데워서
상을 차렸습니다. 갈치와 넉넉히 넣은 무까지 순식간에 먹어치웠습니다.
이 녀석들 아마도 집밥이 그립기도 했을 겁니다. 모두 맛있었고 배가 너무 부르다고...
뒷정리 후에 간단히 맥주 한잔을 하면서 내일 일정을 의논했습니다.
여유롭게 일어나 아침 식사 후에 서황돈카츠의 생선까스를 먹고 도립 곶자왈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서황의 생선까스는
우리 식구 모두가 좋아하는 메뉴인데, 유명 맛집이 되어 좀 일찍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도립 곶자왈은 강아지 동반이 되지 않아서 일단 두고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11시에 미리 가서 명단 등록을 한 덕분에 무사히 오픈과 동시에 식당 입장이 가능했습니다.
횟감으로 만들어 주는 생선까스는 오랜만에 먹어서인지 더 맛이 좋았습니다.
도립곶자왈의 안내 사진 정보로 보면 굉장히 깊은 숲인데 가는 길은 신도시급으로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있습니다.
이런 곳에 숲이 있을까 싶은 마음입니다. 곶자왈은 ‘곶’과 ‘자왈’의 합성어인데 곶은 숲이고 자왈은 나무와 덩굴이 얼크러져 있는 덤불을 말 한다는군요.
늘 쓰고 있는 단어인데 문득 궁금해서 애들하고 찾아봤습니다.
제주말은 단어가 참 예쁩니다. 곶, 자왈이라니....
수다를 떠느라 길을 몇 번 잘 못 들기도 하면서 도립곶자왈에 도착했습니다.
강아지를 두고 왔으므로 저희는 제일 짧은 코스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주변이 도시의 모습을 한 것과 대조적으로 곶자왈은 숲이 깊은데다가 관리도 잘 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방문객이 좀 많은 날이라 아쉬웠습니다.
방문객이 적은 날에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일 것 같았습니다.
저의 사진과 기타 정보를 바탕으로 오후에 가보고 싶은 곳을 정하라니 셋이서 입을 모아 새별 오름을 외칩니다.
집에 들러 우리 댕댕이를 데리고 새별오름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참 혹시 모르니 간식용 빵도 좀 사기로 했습니다.
주유소 다녀오다 발견한 집근처 빵집을 한 번 이용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 빵집을 이제사 발견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달다구리 디저트 말고 진정 그냥 빵을 찾던 저에게는 빵 맛집입니다.
올리브 치아바타, 소금빵, 모두 맛있습니다.
저희 애들이 새별 오름에 도착해서 탄성을 지릅니다.
여기 너어어어어무 좋아요!!! 라고
트렁크를 열어 두고, 돗자리도 펴고, 각자 편하게 자리 잡고 앉아 아무것도 안하는
그런 휴식을 애들도 좋아하네요.
억새를 좋아하는 우리 며느리는 자기 신랑하고 신이 나서 사진을 찍으러 다닙니다.
모두 딱히 할 일이 없이 그렇게 앉아 있으니 많은 얘기를 하게 되더군요.
큰아들이 잘 안하던 여자 친구 얘기도 많이 해주고, 작은 아들 부부는 이제 4년차에 접어드는 부부답게 서로 달라서 힘든 부분에 대해 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도 즐거워 무장해제가 되었는지, 늘 점잖던 큰아이가 마치 초등학생처럼 장난도 치고,
작은 아들 부부는 늘 그렇듯 배꼽 잡는 퍼포먼스를 보여줘서 제가 동영상 촬영도 했습니다.
우울할 때 보면 웃지 않고 배기지 못할 명약이 될 듯합니다.
이 장면은 어쩌면 제 인생 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맑은 가을 오후, 억새가 만발한 새별 오름에서 아이들과 제가 광대가 아프도록 웃으며
마음 속에 있는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던 오늘의 이 장면이 너무나 소중할 것 같습니다.
남편이 함께 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아이들은 누워서 보이는 하늘과 시선에 따라 달리 보이는 풍경들에 감탄했습니다.
사실 저는 아이들이 이토록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여행을 해본 게 오래전이고, 성인이 된 아이들과 긴 여행은 안 한 것 같습니다.
이건 그저 제가 좋아하는 여행의 방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이들도 나이를 먹으면서 좀 달라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재되어 있던 저의 성향이 표출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녁메뉴는 고사리와 돼지고기를 같이 구워먹는 봉성식당입니다.
여기도 유명한 곳이라 걱정하면서 갔는데 다행히 바로 입장했습니다.
고사리하고 묵은지와 돼지고기를 같이 구워먹는 방식은 저희 입맛에 아주 잘 맞았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는 행복을 마음껏 만끽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밤이 늦도록 얘기를 나눴습니다.
저희 가족이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얘기를 나눈 것이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이 굉장히 낯설면서도 행복하고 반가웠습니다.
가가장 좋았던 것은 아이들 어린 시절 얘기를 나누면서 지금까지도 저의 가슴속에 미안함으로 남아 있던 어떤 사건을 진심으로 사과한 것입니다.
6살 큰아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와 아파트 계단에 앉아 저녁까지 저를 기다렸던 그 날은
아직도 가끔 떠올라서 마음이 아프거든요.
그 날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너의 마음을 생각하면, 엄마가 아직도 속이 많이 상한다고...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했습니다. 아들도 그 날 계단에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고 앉아 있던 그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그래도 많이 무섭거나 그렇지는 않았다고..
괜찮다고...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오늘 아침 비행기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일정을 늦춰서 내일 올라갑니다. 일정을 하루 늦춘 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진짜.....
제주 여행이 끝나갑니다.
오늘 저는 짐을 정리하고 강아지와 간단한 마을 산책을 하려고 합니다.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