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
하시겠지만
조선에는 씨받이가 없었습니다
조선의 대표적 악습처럼 알고 있지만...
실제 조선에는 씨받이가 없었습니다
왜?
여자가 궁하면 첩을 들이면 되고
아들이 없으면-적자- 서자도 있고 양자도 있습니다
조선 시대 남자가 첩 들이는 건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죠
그리고
적자가 없다면 서자가 대를 이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서자 출신 왕도 있습니다
서자 출신 왕도 있는데 가문의 대를 못 있겠습니까?
서자라 격이 떨어진다고요?
그럼 정부인의 양자로 만들고 적당히 족보 바꾸면 됩니다
실제 조선 전기가면 서자나 사위가 대를 잇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가면 양자가 있습니다
아들이 없다는게 나나 내 동생 아들이 없다는 거지
10촌의 아들도 없을 리는 없으니까요
그럼 씨받이는 언제 왜 생겼냐고요?
씨받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는 이규태입니다
문제는 이규태는 자신 혹은 자신과 바로 앞세대 일을 조선 시대 일로 오인 기술하는 왜곡을 저지른 바가 있고
씨받이도 그렇게 왜곡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실제 조선은 굳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그럼 왜 씨받이가 생겼냐?
씨받이가 등장한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규태의 연배를 고려하면
일제 초기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조선 후기의 제도에 문제가 생겨 그 제도 때문에 나온 것이라 볼 수 있지요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일단 첩이 사라집니다
첩으로 부릴 수 있는 여종들이 사라졌고
첩 자체도 지탄의 대상이 되어 갑니다
두 번째
양자 제도의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무슨 문제냐?
우리 속담에 처삼촌 산소 벌초하듯 한다는 말이 있지요
대충대충 시간만 때운다라는 뜻인데
처삼촌이면 먼 사이도 아닙니다
막말로 마누라의 삼촌이고 조선이나 일제 시대라면 얼굴도 아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묘를 대충대충 벌초한다고 하니....
정말 10촌 이상에서 데려오는 양자들이 잘도 제사를 지내주겠습니다
게다가 막말로 제사 때문에 먼데서 오는 양자와
내 딸과 사위 혹은 서자
누가 더 내 맘에 들고 이쁘겠습니까?
결국 알짜배기 재산은 사위와 딸 혹은 서자가 물고 가고
제사를 위해 오는 양자는 제사 지내줄 몫만 받으니....
이 양자는 대체 뭐가 고마워서 제사를 정성껏 지내겠습니까?
이런 현실 속에서 일종의 과도기 문화로 등장한 것이 씨받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인식 속에서
과거의 폐습=조선의 것으로 오인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 우리의 문제점을 조선 사람들이 본다면
우리는 안 그랬다 너는 왜 그러니? 하는 것이 대다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