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해줘야 한다.
"누가 너를 어떻게 보든,
놀말 만큼 못생겼든,
놀랄 만큼 예쁘게 생겼든,
너는 너이고 그 누구도
너에게 상처를 줄 자격은 없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모든 것의 기준은 항상
너 자신이어야 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다.
누군가 너를 함부로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또 너무 소중히 다루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너는 전시장에 진열된
상품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예쁘고 사랑스러운 내 딸이니까."
그리고 엄마는 말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불행히도 상당히 많은 엄마들은 성장하는 동안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을 내면에 세우지 못했다.
그렇기에 엄마들은 사회가 규정한 기준을
가장 열렬히 떠받드는 숭배자로 딸 앞에 존재한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필연적으로 내면에 품게 된
수치심과 콤플렉스를 딸에게도 가감없이 전달한다.
스스로 충분히 예쁘지 않다고 생각함으로써 불행했던 엄마들은
자신을 꼭 빼닮은 딸에게 실망하고 그 실망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딸들은 외모뿐만 아니라 엄마의 내면도 물려받는다.
사실 내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인식하는 신체상(body image)은
내가 누구인가를 구축하는 자아상(self image)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가는 내가 누구인가를 이야기하는 한 부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많은 딸들에게 왜곡된 신체상은 자아상을 갖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신체상이 자아상을 점령해버리는 것이다.
부끄럽다고 스스로 인식하는, 부분으로 나의 전체를 판단하다 보니,
딸들은 그들의 엄마가 그러했듯 사춘기를 지나면서 고통스런 자아상을 경험한다.
비본질적인 것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부당한 사회 문화적 압력을 그대로 내면화하며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로 여기는 여성들의 부적절감은
이렇게 세대를 타고 대물림된다.
상처받은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