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추석은 즐겁게 보내셨어요?" 하길래, "나 며느리거든. 즐거웠겠냐?" 그랬더니,
"전 시집 못간 딸이거든요. 즐거웠을까요?" 하네요. 그러고 보니 결혼한 며느리도, 결혼
안한 딸도, 여자들에게 명절은 고된 날인 것 같아요. 아, 저랑 같이 일하는 모 아나운서
분이 그러시더군요. 남자들도 괴롭다구. 마누라 눈치 보느라. ㅎㅎ

저희는 전, 튀김을 이렇게나 많이 해요. 제가 동서보다 나이도 어린데다가 늦게 결혼해서
결혼 초에 잘해보려고 너무 열심히 했더니 뒤집게와 튀김젓가락이 제 차지가 되었네요.
결혼 2, 3년 차 때는 좀 서럽기도 했는데, 이제는 소매 걷어 부치며 뒤집게를 손에 쥐면 제가
시댁의 1인자가 된 듯한 으쓱함이 부쩍 부쩍. 가족들이 인정하던 말던 머. ^^

집집마다 튀김은 하는 집도 있고, 안하는 집도 있고, 종류도 다 다르더라구요.
저희 시댁은 특이하게 수삼을 튀기는데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친정은 느타리 버섯을
튀겼는데, 그것도 역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 엄마가 튀겨주던 느타리버섯 튀김, 명절마다
항상 생각나서 튀김 튀길 때마다 눈물 글썽 글썽.

집에서 튀김할 때는 얼음물 고이 바치고 한 녀석 한 녀석 모양새 확인해 가며 맑은 기름에
토독토독 치익치익 튀기는데요, 명절 튀김은 그저 후딱 후딱. 이 날 새우는 그래도 빵가루 좀
입혀서 튀겼어요. 새우만 110마리. 흐흐.

부침개 부치고, 튀김 튀기면 명절 전날 한나절이 다 가요. 한나절 내내 기름 냄새 맡으면 입맛
뚝 떨어지죠. 그래서 전 저녁은 안 먹고 밤을 까요. 밤은 남자들이 까는 거라지만 모양새가 성에
안 차서 제가 까겠다고 우기죠. 기름 냄새 때문에 명절 내내 입맛이 떨어져서 저절로 다이어트가
된다는. ^^

제기가 있음 차례상이 뽀대는 나는데, 설거지 감이 너무 많아요.
동서 없었음 어쩔뻔 했는지. 동서가 너무 너무 착해서 제가 두살 어려 사이가 틀어질 법도 한데,
전~혀 갈등이 없어요. 먼저 결혼해서 저보다 훨씬 더 잘 알면서도 결혼 초부터 '형님, 이건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형님 간 좀 봐주세요' 이러면서 형님 대우 해줬거든요.
얼굴도 이쁘고, 마음은 더 이쁘고~

점심 때는 시누이들 가족까지 오니까 어른 10명, 아이들 6명. 북적북적 하죠.
많아 보이지만 이건 반도 안돼요. 해물탕에 각종 김치 종류에... 그릇이 너무 많아 설거지 하다
지겨워서 하나 둘 세어 보니 116개더라구요. 으헉.

명절을 저렇게 보내고도 다음 날 5시에 일어나 등산 가는 남편 도시락을 싼 저, 사람 맞나요?
제가 저번에 했던 돼지불고기찜을 살짝 데워서 찐 양배추로 돌돌 말아 줬어요.

어머님이 싸주신 산적을 넣어 김밥 쌌구요. 양배추쌈이 그렇게 맛있었다고, 남편 선배분이
감탄사를 연발 하더래요. 이거 다 술수인데, 홀라당 넘어가서 매주 도시락 싸는 저, 웃기죠?

사람 아닌 저, 거기서 끝낼 수 있나요. 시댁이 수산시장 근처라 전복을 사왔어요. 살아 있을 때
전복장 담그려고 새벽부터 서둘렀죠. 소주를 부어서 불순물을 제거해 줘요.

간장과 물은 4 대 6으로 간간하게 잡고, 다시재료랑 특별히 흑표고와 각종 한약재를 넣어
간장물을 다렸어요.

구석 구석 아주 깨끗하게 손질한 전복이랍니다.

밀폐 용기에 담아서 Made by 제아이디 라벨을 붙였어요. ㅋㅋ

인간이길 포기한 저, 내친 김에 생애 최초 겉절이 담기에 도전했답니다. 명절 다음 날에요.
항상 시어머님이 김치를 담가 주셨는데, 지난 번에 김치가 많이 짜더라구요. 식구들이 짜다 했더니,
이번에 담은 김치는 맹숭맹숭 아무런 맛이 없어요... 어머님도 나이를 드시는구나 싶으니 마음이
짠해요. 잔소리 하고, 호통 치셔도 좋으니 기력이 빠지진 않으셨음 좋겠어요. 늘 어머님 답게...
저희 시어머님, 제가 최고래요.
아들 보다 저랑 있는 걸 더 좋아하시는 듯. ^^ 제가 옆에서 재잘 재잘 떠들기도 잘 떠들고, 이것
저것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또 어머님 살림 솜씨 칭찬도 잘하니 그렇겠죠. 진짜 살림꾼이세요.
이건 머 오늘은 자뻑이 지나친 걸요. 사장님이며 시어머님이며 다 자기 좋아한대. -_-
근데요, 그거 아세요?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고 믿으면 나 또한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고와지고,
그러다 보면 정말 그 상대가 저를 좋아하게 되거든요. 함 해보세요. 진짜 그래요. ^^
근데, 이거 공주병 내지는 도끼병으로 변질될 수 있으니 미혼이신 분들은 자제하는 게 좋으실 듯.
이번 추석 때는 시엄니 뒤꽁무니 졸졸 쫓아다녀서 새우젓과 매실엑기스 포획 성공.
그럼 김치 초보의 첫 겉저리 담기 함 구경 하실래요?
재료 : 배추 2kg 기준, 무 작은 거 반토막, 쪽파 한줌.(앗, 갯수를 안 셌다.)
양념장 : 까나리 액젓 8큰술 (조절 필요), 새우젓 4큰술, 마늘 10개, 생강 4톨(마늘 크기)
홍고추 10개, 매실엑기스 4큰술(맛 보고 가감), 양파 큰 거 반개, 배 4분의 1개,
고춧가루 1컵
찹쌀죽 : 물 2컵, 찹쌀 4큰술
절임물 : 물 4리터, 천일염 4컵

배추는 들어봐서 속이 꽉한 걸로 골라야 달아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 따라 시장 다니던
내공이 있어서 음식 재료 고르는 건 좀 자신 있어요. 노하우는요, 그냥 무조건 이쁜 걸로. ^^;
야채나 과일은 모양이 고르고, 색깔이 선명한 걸 고르면 실패가 없어요.
큰 거 절대 고집하지 마세요. 모양이 고르지 않으면 큰 건 버리는 게 더 많을 수도 있거든요.
배추 처음 사면서도 좋은 배추는 다르던걸요. 원래는 알타리무우 사서 총각 김치 담그려고
했는데, 이마트에 없더라구요. 배추 김치로 바꿀까 하고 두통 골랐다가 다른데 더 들러보자
싶어 내려 놨어요.
그리고, 뉴코아 아울렛까지 쇼핑카트(유모차 같은 거 질질 끌고 다녀요. 주말마다 일산에
뜬다죠. 트레이닝복에 모자 눌러쓴 카트녀.) 질질 끌고 가봤는데, 뉴코아는 명절 끝물을
그대로 물고 있더라구요. 아예 물건이 없어요. 흑흑.
그대로 포기할 순 없죠. 다시 거기서 미관 광장을 지나 홈플러스까지 질질 끌고 갔답니다.
그쯤 되면 알타리는 이미 포기하고, 좋은 배추라도 건지자 싶은 심정이죠. 그런데, 홈플러스도
물건이 새로 안들어왔더라구요. 척봐도 이마트 배추 보다 못한 것이, 도저히 성이 안차요.
다시 이마트까지 가기엔 너무 먼 거리를 왔죠.
(일산 사시는 분은 알거예요. 웨스턴돔 근처에서 이마트를 찍고, 다시 홈플러스까지 가서
돌아오는 거리... 쇼핑 시간까지 꼬박 2시간 반 걸렸어요.) 자포자기 심정으로 롯데백화점에
갔더니 다행이 제법 큰 크기의 쌈배추가 있더라구요. 쌈배추가 더 달긴 하잖아요. 겉저리에는
그만...이라는 말을 들은 바가 있어요. 흐흐.

시퍼런 거 떼어 내니 세통이 2kg 좀 넘어요. 김치 담그기의 절반이라는 소금 절이기 시작.
처음 시도하는 요리를 할 때는요, 과정에 대한 이유를 파악하면 내가 처한 상황과 재료에
따라 응용하기가 쉬워요. 아시죠? 따라쟁이의 필수는 '말 잘듣기'와 '응용하기'라는 거.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이유는 삼투압 현상을 통해 배추 속에 물기를 제거하기 위함이래요.
김치를 모를 때는 소금에 절이는 이유가 밑간하는 거라 생각 했거든요. 오우, 노~
생각해 보니 배추에 짭짤한 간이 배이면 나중에 아무리 양념장 간을 봐도 소용 없겠더라구요.
그렇다면, 배추 속의 물기만 적당히 빼주면 소금 절이기 성공이라는 거죠?
금방 금방 먹을 겉저리라 반나절씩 절여줄 필요 없을 것 같아 소금물에 2시간 반 정도 절였어요.
중간에 먹기 좋게 길쭉하게 칼로 찢어줬구요. 길쭉한 김치를 밥에 돌돌 말아 먹는 게 좋아서.^^
하나님이 예전에 남긴 레서피에 줄기가 '탄력있게' 절여지면 된다고 하셨는데, 대충 감이
와요. 넘 빳빳하지도, 넘 흐물흐물 하지도 않을 정도까지 절인 후, 깨끗이 씻어줬어요.
소금기가 남으면 양념장 간을 제대로 맞춰도 짤 수 있어 깨끗이 헹궈줬어요. 그리고, 물기를
꼭꼭 짜줬죠. 기껏 배추 속 수분 제거했는데, 물기가 흥건하면 안되잖아요.

배추 절이는 동안 찹쌀죽 쑤기. 엉엉... 항상 넘쳐 나던 찹쌀이 왜 하필 똑 떨어진 거래요?
임시 방편으로 찹쌀 가루로 죽 쑤었어요. 이거 땜에 2% 부족해진 듯.

양념장은 고춧가루만 빼고 드르륵 믹서에 갈아줬어요.
무는 채썰고, 쪽파는 무채와 같은 길이(4~5cm 정도)로 잘라주구요.

햇고추가루를 썼음 빨갛게 때깔이 좋았을텐데, 그냥 작년에 사둔 시판 고춧가루 썼더니 때깔이
별루죠? 흑, 이거 8% 부족.
꼭 짜둔 배추와 양념장, 무채, 쪽파를 쓱쓱 섞어주면 겉저리 완성!
우와, 내가 김치를 담그다니!!
평생 김치는 안 담글 생각이었는데, 확 바꼈어요. 왜냐면 넘 맛있더라구요. ㅋ
10%나 부족한 김치가 어떻게 맛있을 수 있냐구요? 시어머님이 직접 담그신 새우젓과 매실엑기스
덕분인 것 같아요. 남편이 맛있다고 난리네요. 일단 배추가 달달하구요, 젓갈이 너무 강하지도 않게,
살짝 살짝 맛이 도는 것이 영 짜지도 않구요.

저녁을 먹었는데도, 겉저리 맛 한번 보더니 밥 먹구 싶다고 해서 후딱 차려줬어요.

어제는 퇴근 하는데, 전화해서 겉저리에 밥 먹고 싶다네요. 또 눈썹 휘날리며 20분 만에 밥 차려
줬어요. 냉동시켜둔 양념불고기 꺼내 볶고, 시어머님이 싸주신 전 데우고, 나물도 얹고.
야근해야 하는데, 겉저리 생각난다구 집밥 먹고 다시 회사로 드가네요.

자, 이로써 명절 다음날 김치를 담그면서 사람이기도, 초보이기도 포기한 만년초보의 자화자찬,
자뻑 수다는 막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