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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 조회수 : 5,303 | 추천수 : 3
작성일 : 2015-11-08 23: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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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을 들른 후  선운사엘 왔네요.

일주문 들어서기 직전 좌측 계곡변에 뭔가 보이고.

천연기념물 송악~~

온통 줄기와 잎들이 절벽을 덮고 있네요.

밑둘레가 0.9m,높이 15m, 가지가 퍼져있는 너비는 13m나 되는 특이한 나무.

 

이건 또 뭐람~~???

젖가슴을 닮았다 하여 유주(乳柱) 라네요.

줄기에 상처를 입었을 경우 자가 치유로 특정의 방어물이 생성된 것.

 

그런데 이리 남성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고.

옛날  옛적 민가에서 이를 놓칠리가요.

득남 위한  남근 토템으로 발전해 잘려나가는 수난이. 

잘려나간 흔적들~~

무슨 나무인고 하니 은행나무입니다.

비온 뒤라 은행이 많이 떨어졌고.

도솔산 선운사 일주문~~

일주문 지나니 우측 전나무숲 사이로 부도밭이 보이고~~

사람들은 보통 지나치는 데 가볼만한 곳.

사람에 따라서는 선운사에서 가장 가치있는 볼거리로 여길수도 있겠고.

왜냐구요???

비문이 추사 김정희의 말년 대표작으로 희대의 명작이거든요.

비의 주인공은 당대 최고 선지식 백파선사(1767 ~1852).

앞면~~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

해서체로 엄정한 질서 속에 추사체의 웅혼한 기백이 깃들어있네요.

넘치는 강기로  보는자로 하여금 손끝에 힘이 들어가게 하고.

뒷면은 행서체로~~

찬찬히 보시죠.규율 속에 자유분방한 개성이 철철 넘치네요.

백파 사후  백파의 제자들이 추사에게 부탁하자 죽기 1년 전에 써준 것.

그럼 백파스님(1767 ~1852)은 어떤 사람이길레??

이곳 고창에서 태어나 18 세 때 선운사에서 출가한 후    조선 후기불교의 중흥을 일으켜 화엄종주로 불렸던 인물.

추사가 짓고 쓰게된 일련의 과정을 보면 보면 1800년대 초,중반 당대 지성사의 단면을 엿볼수있고.

당시 백파선사(고창 선운사)와 초의선사(1786∼1866,해남 대흥사 일지암) 사이에 '禪'에 관한 논쟁이 붙었네요.

백파는 '선문수경'(禪文手鏡 ) '을 통해  교(敎)보다 수선(修禪)을 중시하자,

초의는 '선문사변만어'(禪文四辨漫語)를 통해 교와 선은 다른 것이 아니라며 맞선 것.

둘 간의 논쟁에 추사가 끼어들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백파-추사' 간 서한논쟁.

초의는 제주도로 건너가 유배중인 추사와 6개월을 함께할 정도로 둘은 동년배에 평생지기라 자연스럽게 추사가 끼어든듯.

백파-추사 논쟁이 얼마나 격했는지,

추사가 보낸 서한에 대해 백파가 '13조 논증'이라는 답신을 보내자

추사는 '白坡 妄證 十五條(백파 망증 15 조)'라는 재답신으로 응했는데 그 표현이 상식을 뛰어 넘는다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철부지 어린애와 떡다툼을 하는 것 같아서 도리어 창피하다/,,,등등 .

추사가 대선배인 원교 이광사에게 '글씨에 대해 기본도 모르는 자'라고 몰아 부친 것과 비슷한 행동 .

당대 최고 지성이자 신지식인에 문화권력이였던 추사가 얼마나 기고만장했는지 알수있는 대목이네요.

이때 백파 나이 77 세 , 58 세 추사는 제주도 유배가 막 시작되던 시기.

그리고 세월은 흘렀으니~~~

제주도에 9년,북청서 2년 도합 12년의 유배 후에는 벼슬길도 막혀 과천에 뭍혀살다 72세로 죽기 2년 전,

추사는 백파선사 비문을 손수 짓고 쓰게되는데~~

제목도 장대한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

백파는 화엄 종주(華嚴宗主)요,대율사(大律師)이며,그의 사상 줄기인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칭송한 것.

다음은 비 뒷면 첫 부분.

/근래 조선에 율사(律師)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대반전은 12 년의 유배생활을 통해 추사는 성찰과 학문적인 진보를 이뤄낸 결과일 터.

 

  ps) 추사는 유배가 풀리자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를 만나고

귀경길 <망증 15 조>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서 정읍 내장사에 주석하고 있던 백파를 만나기로 함. 

추사는 제주를 떠나며 미리 백파에게 편지를 보내 놓았는데 며칠 날 어느 마을 장터에서 만나자고 .

그러나 정읍으로 오는 중에 폭설을 만나 약속한 날자에 닿지를 못했고 .

백파는 장터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 " 信 없는 사람" 이 말 한마디 남기고 장터를 떠났다나 .

그때 백파 나이 82 세로 7 년 후 열반에 들 때까지 추사와 어떻게 교유했는지 알 수 없고.

그런데 서체에 서로 좀 다른 부분이 있지 않나요??

이 비문은 백파 제자들이 추사에 부탁해 받은 것으로 실제로 비석이 세워질 때는 3년 후.

추사는 써준 후 2년 후 죽었고.

그래서 건립연대인 ' 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立 '은 당연 추사 글씨가 아닐 터.

또 阮堂學士 金正喜 撰弁書(짓고 쓰다)도 본문 서체와 확연히 다름을 알수있네요. 

또 있으니~~

본문 중 가장 마지막 줄!

찬찬히 보면 획이 천편일률적으로 리듬감도 없고 산만한게 답답하죠.

보관 중 일부가 회손되자 추사 후학 누군가가 추사체로 써넣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있답니다.

여하튼 백파비는 추사체 현장 학습용으로 적격.

 

진품을 보시려거든 대웅전 옆 성보 박물관으로 가셔야.

선운사(禪雲寺) 천왕문~~

백제 위덕왕(525~598) 때 승려 검단( 黔 丹 )이 창건.고려 때 중창 후 정유재란 때 소실.

광해군 때는 무장현감( 茂 長縣監 )이 후원자를 만나  승려 일관 등과 함께 대웅전, 만세루, 영산전, 명부전 등을 건립.

검단선사는 대단한 고승이였던듯.

(선종은 9세기 말 들오온 것이니 6세기를 산 검단에게 선사란 호칭은 틀렸음) 

팔당댐 검단산,인천 검단리 등등 옛 백제 지역엔 검단선사를 암시하는 지명이 많죠.

비온 직후라  도솔산엔  운무가~~

전각 바로 뒤로 동백나무 숲이.

안동대학,중부대학생들로 경내에 생기가 돌고~~

고려시대 6층탑~~

사적기에는 9층인데 3층이 소실된듯.

대웅보전 편액은 원교 이광사 작품~~

대웅보전의 현판 중 원교 글씨는 해남 대흥사,부안 내소사,강진 백련사,지리산 천은사에도.

원교 작품이 남도 지방 사찰에 특히 많은 데 왜??

완도 신지도에서 23년 유배살다 현지에서 죽었거든요,,,자산어보를 쓴 흑산도 정약현처럼. 

당대 서예 1인자인지라 가서 받아왔겠죠.

대웅보전  현판 '大' 자에서 느낌이 안오시나요??

성큼성큼 걷는 모습의 표현이랍니다.

다음을 보면 더 명확하겠네요.

강진 백련사 현판~~

성큼성큼 걷는거 맞죠??

부안 내소사 현판도 그러하고~

백련사는 남성이,내소사는 젊은 여성이. 

해남 대흥사 현판~~

외에도 경내에는  이광사 작품이 몇 있는데,

천왕문 현판도 이광사 작품~~

요사채 편액 정와(靜窩)도 이광사 작품~~

고요하고 작은 집이라는 뜻.

그러면 이광사는 누구??

고딩 역사 시간 때 '연려실기술'을 많이 들었을듯,,,저자 이긍익이 이광사의 장자입니다.

연려실은 이긍익의 호로 아버지 원교가 지어준 것을 평생 자신의 서재에 당호로 내걸고 살았다네요.

그림에 겸제 정선이 진경산수로 조선의 산수를 그렸듯이,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조선의 서체를 완성한 장본인.

추사 이전에 원교 이광사라 할 정도로 당대 인기를 끌었고.

허나 해와파인 추사의 혜성같은 등장으로 존재감이 약화되었고.

서예,그림 등 조선 후기 예술 문화사의 핵심 인물,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 1705~1777)~~

그처럼 비운의 삶을 산 선비도 드물듯.

본관이 전주로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 출신.계속된 당파 당쟁 집안이 쑥대밭이.

부친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 되었다가 영조 때 사망.

30 세 때 강화도로 들어가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배우고  백하(白下) 윤순(尹淳)에게 서예를.

( 설악산 비선대의 飛仙臺 암각이 바로 윤순 글씨)

강화에 들어간 지 20 년 후인  50 세 때 '나주벽서사건'이 터지며 함경도 회령으로 귀양.

그곳에서 7 년을 보냄. 그후 완도 바로 아래 신지도(땅끝 전망대서 보면 보임)로 이배되어 죽을 때 (73 세 ) 까지 귀양살이 .

서예의 역사와 서예 이론을 '필결(筆訣)'이라는 이론서를 통해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

이렇게 오랜 유배 생활을 통해 원교는 '동국진체'라는 서체를 완성(추사가 제주도 8년을 통해 추사체를 완성한 것처럼)

이는 겸재의 '진경산수'와 같은 문화적 성격.

다산,추사,원교~~~

각각 강진 18년,제주 9년,회령과 신지도 23년 유배생활.

이들의 학문적 성과는 영광의 한양 아닌 고통의 유배지였기에 가능했으니 이또한 역사의 아이러니.

원교의 필결(筆訣)은 일종의 서예철학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예를 보는 관점을 정리.

그는 안평대군, 자암 김구,봉래 양사언,석봉 한호를 4대가라 평하고 이중에서 석봉을 최고로 쳤고.

그러나 추사 김정희는 서언교필결후(書圓嶠筆訣後)를 통해 원교 필결은 신랄히 비난.

예를들어 제주도 유배가는 길 초의선사의 해남 대흥사에 들러 " 조선의 글씨는 원교가 다 망쳐놓았다"

며 대웅보전에 걸려있는 이광사가 쓴 편액들을 떼어내게 했다는.

국내파 원교에,청나라에서도 인정을 받으며 기고만장하던 해외파 추사라 할까.

이는 아마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으니 원교는 소론의 집안,추사는 만년대대 집권을 누린 노론의 집안.

추사는 이리 제주도 유배 갈 때(당시 55세)까지만 해도 원교의 서체를 매우 못마땅 해 하였으나

유배 9 년을 보내며 달라졌으니~~

해배 후 귀향 길에 대흥사에 다시 들려 자기의 경솔을 초의에게 사과하며 원교가 쓴 현판을 다시 달라고 부탁하네요.

그 결과가 바로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

바로 이거!

원교 (1705~1777) 가 죽고 9 년 후에 태어난 추사 (1786~1856)~~

늦게라도 자신의 과오를 바로 잡는 게 역시나 큰 사람이라는 .

 

당파 싸움에 집안이 쑥대밭이 된 채 한 평생 벼슬 한자락 못해보고 수십년 간 귀양살이하다

남녁 끝자락 섬에서 생을 마친 원교 이광사~~

물 흐르듯 유연하고 힘찬 '천왕문' 글씨에는 한 점  한(恨)도 읽히지 않으니 이또한   탈속의 경지랄까....

그러나 현실에서 그의 한이 얼마나 컸는지는 그의 시 한편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는.

유배를 떠나던 날 부인이 자살 했다는 비보를 듣고 쓴 '悼亡'(죽은 부인을 애도함) 이라는 시입니다.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번을 윤회 한대도
이 한은 정녕 살아 있으리

수미산이 작은 개미둑이 되어도
황하가 가는 물방울이 되어도
고불(古佛)을 천 번이나 땅에 묻어도
상선(上仙)을 만 번이나 묻어도

천지가 뒤바퀴어 태초가 되고
해와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이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 지리라

번뇌는 부술 수 없고
금강석인들 뚫을 수 있으랴
감춰두면 응어리가 되고
울분을 토해 내면 세상에 가득 하리라

내 한이 이와 같으니
당신 한도 정녕 이러 하리라
두 한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우측은 산비탈은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5천여 평에 수령이 약 500년.

만세루(보물)~

예전에 사부대중의 회합장소였겠지만 지금은 무료 찻집 휴식 공간으로.(선운사 차밭도 유명)

안동대 학생들~~

이제 경내에서 걸어서 3키로, 40분 거리 도솔암으로 향합니다.

늦여름이면 좌우 산비탈로 붉은 상사화가 장관을 이루죠.

좌측으로 차밭이 보이네요.

저 차밭이 장금이와 종사관이 첫 데이트를 즐기던 곳이랍니다.

비온 뒤라 도토리가 쌓였네요.

참나무엔 갈참,굴참,졸참,떳갈,상수리 등등,,,그 열매를 도토리라.

그럼 저 도토리 소속은??

열매가 가장 큰 것은 상수리나무,반면 가장 작은 건 졸(卒)참나무입니다.

졸참은 잎 또한 가장 작고.

바로 졸참나무의 도토리로 당연 맛은 가장 좋고습니다.

진흥굴~~

진흥왕이 왕위를 넘기고 왕비와 공주를 데리고 선운사를 찾아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네요 .

인도의 왕자 석가모니가 구중궁궐을 떠났듯이 진흥왕도.

그리고 사적기엔 선운사 창건에 대해  이리~~

/검단선사가 위덕왕 (554∼598 ) 때 진흥왕의 시주를 받아 창건했다/.

이걸 믿으라고?? 이거야 말로 국정교과서식 횡포 .

역사를 재대로 알면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함을 알수있으니~~

백제 27대 위덕왕(554∼598)에 있어 신라는 불구대천지 원수 .

아버지 성왕은 자신으로 인해 신라군에 사지가 잘리고 결국 신라왕궁 문지방에 뭍히는  처참한 죽음이였 으니 .

 

전후 사정은 이렇습니다.

아버지 성왕은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군을 중심의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으로 고구려 공격에 나섰죠.

그 결과,백제는 고구려에 빼았 겼던 한강 하류의 6군(六郡)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고.

그러나 배반한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뒤, 한강 하류유역을 차지하게 되자 성왕의 노력은 모두 수포가.

이에 성왕은 신라에 대한 보복공격을 꾀하였고.

이 때 백제의 조정에서는 신라정토(新羅征討)를 반대하는 귀족세력이 있었지만,

이들을 물리치고 정토군을 일으킨 이가 바로 태자 창(이후 위덕왕).

선봉에 나선 창은 관산성(管山城, 옥천)전투에서 대승하자,

불과 50명 호위병을 이끌고 격려하러 온던 성왕은 신라 매복군(대장이 김무력으로 김유신 합아버지)에 걸려 사지가 절단.

그 결과 3만명에 가까운 사졸이 전사에 이르고.

성왕 전사로 태자 창은 왕위 오르니 그가 27대 위덕왕(威德王).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의 시신을 경주에서 반환받아 능산리에 장사를 치루고 능사( (陵寺)도 조성.

(바로 그 능사 터에서 그 유명한 백제금동향로가 발견)

 

이런 정치적인 상황에서 진흥왕이 시주하고 말년엔 수도처로 삼았다??? 

후대 선운사 중창 즈음에 진흥왕의 권위를 이용했겠죠.

허나 생각해보면  이해못 할 것도 없으니,이도 패망 한 백제 지식인들의 생존방식일 터 .

장사송(長沙松,600년, 천연기념물로 )~~

이곳 지명이 에전엔 장사여서.

진흥굴 옆에 있어 진흥송이라고도. 8갈래로 갈라진게 기품있네요. 

장사송에서 도솔암은 지척인지라 마치 일주문 역할을~~

 

도솔암~~

본래는 상·하, 동·서·남·북의 여섯 도솔암 이 있었다네요.

 

도솔암 바로 옆 마애불(보물)~~

고려시대 작품으로 이 땅서 가장 큰 마애불.

높이 약 40m 벼랑면에 불신 크기 12.5m, 양 무릎의 폭 8.5m,좌대 높이는 2.7m.

마애불은 지상에서 약 6m 올라가 있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머리쪽은 돋을새김으로 볼륨감을 표현했으나 하체는 선각.

 

머리 위 사각형의 구멍 세개  보이시나요?

머리 우측으로 부러진 서까래가 꽂혀 있는 것도 보이고 .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만 있는 누각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의 흔적이네요 .

누각은 풍우로 1648년(인조 )에 무녀져 내렸고.

 

그런데 저 마애불이 동학농민운동의 빛나는 서막을 알리는 대서사를 간직하고 있으니~~

가운데 명치 부분 복장(腹藏) 흔적 보이시죠.

복장은 탑으로 보면 사리함같은 거로 배 안에 사리(舍利),불경,불화,시주자 이름 등을 봉안(奉安)하죠.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언제부턴지  저 복장 속에 비결(祕訣)이 들어있어 그걸 꺼내기만 하면 한양이 망한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꺼낸 이는 벼락살을 맞은다는 얘기도 함께.

농민 봉기 2년 전인 1892년  접주인 손화중 등 동학도 우두머리들이 비결을 꺼내기로 모의를 합니다.

그러나  벼락살이 문제.

그러나 40년전 전라도 감사 이서구가 열었다가 천둥 벼락이 일자 급히 닫은 선례가 있기 때문에

벼락살 문제는 해결됐다며 실행에 옮깁니다.

먼저 도솔암 스님 수십명을 포박,,,그리고 대나무로 비개를 설치 후 복장 속의 비결을 꺼냈고.

물론 이는 농민군 사기를 북돋으려는 심리전의 일환이였겠죠.

나온 것이란곤 기껏해야 불경,시주자 목록 등이였을 터.

이후 대대적인 사상범 체포가 이뤄졌고 관련자 수십명이 무장현에 잡혔와 3명은 참형에.

여하튼 저 마애불은 갑오농민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역사적인 유물.

 

이제 마애불 암벽 바로 위에 있는 내원궁으로 향합니다.

도솔천 내원궁~~

이제까진 도솔川인줄로 알았는데 도솔天이더군요.

도솔천은 미륵불의 상주처로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의 꼭대기 위에 있다네요.

도솔은 '만족시킨다'는 뜻으로 한자로는 지족천(知足天)으로 번역하기도.

도솔천에 사는 천인들은 다섯 가지 욕(재물욕,명예욕,식욕,수면욕,색욕)을  다 누리며 만족(知足)한 삶을 누리고 있고.

이 도솔천은 외원궁과 내원궁으로 나뉜다네요.

외원궁은 천인들이  온갖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곳,

내원궁은 미륵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올 때를 기다리며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곳.

그래서 미륵불이 있는 내원궁을 바치고 있는 40미터 벼랑에 미륵 마애불을 새긴 것이겠죠. 

원래는 내원궁 안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이 있어야 하는데 안보이네요.

보수공사 중이던데 안전상 선운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긴듯.

 

내원궁 앞 전경~.

도솔암에 오면 발품좀 팔아서라도 꼭 가봐야하는 곳이 있어요.

맞은편 산등성이 낙조대입니다.

느린 걸음으로 40분이면 충분.

 

용문굴 지나고~~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어머니를 뭍은 곳.

 

낙조대에 오르니~~

1)서해 칠산바다,위도가 보이고

2)북쪽으로 줄포,곰소,부안 변산이

3)남동쪽으로 내장산,무등산,추월산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낙조대는 최상궁이 자살한 곳.

서해 일몰이 아름답기로는 두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랍니다.

 

서해 칠산바다~~

왼쪽 아래가 영광 법성포 쪽.

법성포와 위도에서 출항한 조깃배들이 이곳 칠산바다에서 잡은 조기가 바로 영광굴비.

해안가 따라 염전이 많고.

 

북쪽으로 젓갈과 염전으로 유명한 곰소만이 보이고~~

요즘은 있는 자에 다가 가지만 초기 불교 포교는 없는 자들에 대한 배품에서 시작.

병을 치료해주고,농사법을 가르쳐주고  등등..

선운사 초기도 그랬나봅니다.

개창조 검단스님은 이곳 도적 때에 뒤섞인 주민들에게 소금 정제법을 가르쳤는데, 결국 검단리라는 지명도 생겼고.

해방 직전 까지만 해도 인근 염전에서 보은염이라며 봄가을 선운사에 바쳤다는.

여하튼 선운사의 물적 기반은 바로 곰소 일대 소금,칠산 앞바다 어업, 그리고 고창 들녁.

 

낙조대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내원궁 & 마애불이 보이고~

 

낙조대에서 하산 중 바라본 마애불~~~

<가져온 사진>

도솔암으로 하산~~

 

갈 때는,오던 길 맞은편 도솔천 따라 선운사로~~

 

선암사 경내 바로 앞엔 고도 차가 거의 없이 도솔천이 흐르고~~

 

그런데 심산유곡 계곡수와 달리 물이 검게 보이네요.

참나무의 탄닌(도토리에 특히 많은) 성분이 녹아들어서랍니다.

왼편으로  천왕문이~~

아쉬움에 잠시 들어갑니다.

 

만세루 기둥을 보니 토막 목재들을 이어 붙혔고~~

대웅전 지을 때 남은 자재를 사용해서라네요.

투박한 건물.

 

만세루 내 무료 찾집~~

감로수 한모금 마시고~~

물론 감로수는 도솔천에 거주하는 천인들이 마시는 물.

요즘 조계종단에서 생수 수익사업을 하는 데 생수 이름이 감로수더군요.

 

광해군 때 지은 대웅전~~

 

윤기나는 진초록 동백잎~~~ 

동백의 서식 구역이 확연히 드러나고.

 

성보 박물관~~

 

미당 육필원고를 새긴 /선운사 동구/ 시비~~~~~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


1)막걸릿집 여자의 목 쉰 육자배기 가락이 떨어진 동백꽃인줄 이번에  알았네요.

2) 골째기는 골짜기로~

  남었읍디다는 남았습니다~~

  이리 배웠는 데 원어로 읽으니 훨 어감이 살고 감칠맛나네요.

 

1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자수정
    '15.11.9 2:43 AM

    언제나 흥미진진한 투어님의 역사이야기,
    한문에도 조예가 깊으신 듯 하군요.
    사진 한 장, 한 장 보면서 여행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듭니다.

  • wrtour
    '15.11.15 9:39 PM

    감사합니다
    이 가을 가기 전 어디든 다녀오세요 자수정님~~~~~~~~~~~

  • 2. 하늘재
    '15.11.10 6:19 PM - 삭제된댓글

    대웅보전!! 설명을 듣고나니 정말 그렇게 보이네요!!
    성큼 성큼..ㅎ사뿐 사뿐...

    말씀하신 사찰을 다 가 보았건만 저 글귀에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흥미롭습니다..

    백파선사와 추사의 논쟁과,그 후의 이야기는 정말 멋지군요!!
    말 바꾸기..뒤집어 씌우기.. 유치한 논리로 점철된 지금의 상황과 비추어서 더 더욱이요.

    이전 선운사에 갔을때는 마애불까지..
    이번 상사화 축제때는 시간에 쫓겨 도솔암까지도 못 올라간것이 못내 아쉽네요..
    진작에 봤더라면 많이 도움이 되었을터...ㅠㅠ

    암튼 잘 봤습니다!!

    송창식의 선운사 노래도 생각나는군요!!

    미당 선생님 친일행적이 없었으면 더 빛났을텐데.......ㅠㅠ

  • 3. 하늘재
    '15.11.10 9:24 PM

    대웅보전!! 설명을 듣고나니 정말 그렇게 보이네요!!
    성큼 성큼 백련사!!..ㅎ사뿐 사뿐..내소사!!.

    말씀하신 사찰을 다 가 보았건만 저 글귀에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흥미롭습니다..

    백파선사와 추사의 논쟁과,그 후의 이야기는 정말 멋지군요!!
    말 바꾸기..뒤집어 씌우기.. 유치한 논리로 점철된 지금의 상황과 비추어서 더 더욱이요.

    이전 선운사에 갔을때는 마애불까지..
    이번 상사화 축제때는 시간에 쫓겨 도솔암까지도 못 올라간것이 못내 아쉽네요..
    진작에 봤더라면 많이 도움이 되었을터...ㅠㅠ

    암튼 잘 봤습니다!!

    송창식의 선운사 노래도 생각나는군요!!

    미당 선생님 친일행적이 없었으면 더 빛났을텐데.......ㅠㅠ

  • wrtour
    '15.11.15 9:42 PM

    선운사서 도솔암 까진 쉬엄쉬엄 40분인데
    아깝군요 선운사 진짜는 선운사서 도솔암 까지인듯.
    도솔암서 낙조대 까진 20분 정도니 서해 까지 볼수 있는거를 생각하면 가성비 최고 20분이네요 다음길엔 꼭 성사하셔요

  • 4. 변인주
    '15.11.11 2:08 AM

    강진 백련사 대 자를 보고 헉!! 자유자재 성큼걸으시는 큰 스님의 장삼자락 소리까지 들리는 듯 합니다.
    선운사가 어디있는고 하고 구글링 해 보고 자세히 읽었습니다.

    실타래 풀 듯 슬슬 풀리는 wrtour님글이 오늘은 더 맛나네요. :-))))

  • wrtour
    '15.11.15 9:45 PM

    아아~~~~~그렇네요
    장삼을 걸친 대사가 도포 자루 휘날리며 걷는 모습이요 ㅎ

  • 5. wrtour
    '15.11.15 9:44 PM - 삭제된댓글

    아아~~~~~그렇네요
    장삼을 걸친 대사가 도포 자루 휘날리며 걷는 모습이요 ㅎ

  • 6. 하여서
    '15.11.18 7:52 PM

    .너무 열성적으로 설명해주셔서 고마움을 전합니다.회사다닐때 선운사를 다녀왔는데 그때는
    둘러보는 코스였고 ,오늘은 공부하는 학생으로 임했습니다. 추사와 관련된 역사를 많이 배운것같아 감사함을 전합니다.요즘 곡학아세 하는 인간들이 더러있어 심기가 매우 불편했는데,이렇게 공들여서 한컷한컷소개해주심에 재삼고마움을 전할뿐입니다.고맙습니다.거제도에서 댓글한번 올려봅니다.

  • wrtour
    '15.11.21 12:13 PM

    아고~~~~
    이리 마음 깊이 말씀해주시다니 좀 부끄럽네요
    물론 제 입꼬리는 최고 높이로 올라갔답니다
    거제도 향해 꾸벅~~~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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