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줌인줌아웃

생활속의 명장면, 생활속의 즐거움

제 목 : 시절, 겨울 끝자락 무등산에서 한나절

| 조회수 : 1,858 | 추천수 : 4
작성일 : 2022-02-28 13:00:13

증심사 지나고 당산나무도 지나고~~


  국립공원 무등산(無等山 1187m).

지리산 서쪽 호남 땅에서는 가히 등급을 매길 수 없는 독보적인 산.

예나 지금이나 무등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들머리에서 증심사를 만나요.

1574년 무등산 산행기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긴 의병장 제봉 고경명(高敬命1533~1592).

그의 산행 시작도 증심사.


40분 만에 중머리재 도착.
제1 중간 기착지 같은 곳.

 

The Best of Piano

50 Greatest Pieces

Chopin, Debussy, Beethoven, Mozart...등등

https://youtu.be/MuxB2zACza0

2zACza0


중머리재?

말그대로 고개마루 일대가 대머리여서.

토사유출이 심해 야자수 메트를 깔았네요.

그냥 주저앉아 쉴수 있어 좋고. 

정상은 설산,뭔가 상서로운 느낌들.



휴식 공간 맞죠?

산도 사람도 다들 평온.

증심사에서 이곳 중머리재 까진 트레킹 코스로 원점회기 하시는 분들 많아요.

왼쪽 봉우리가 중봉...철탑 있는 곳이 장불재.

여기서 정상 가는 길은 크게 둘.

원점 회기라면 중봉으로 오른 후 서석대~정상~입석대~장불재~용추삼거리 거쳐 다시 중머리재로.

역순이 더 인기.



 다가갈 수록 더 맑아지는 느낌
.

                     장불재 가는 길은 산허리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니 완만해요(사진 속 등산객 처럼).

30여분만에 장불재(919) 도착.

 이 코스는 '노무현 길'로 불립니다.

노대통령 재임시인 2007년 5월 19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무등산에 올랐고.

증심사~당산나무~중머리재~장불재 왕복 8키로.


불멸의 남자,

노무현의 장불재 '산상(山上)연설'

2007년 5월 19일 서석대를 배경으로.






정상 루트는 하산하는 저분들의 역으로.

입석대~서석대 거쳐 정상.

우측 암릉군이 입석대,위쪽 암릉군이 서석대,정상 천왕봉은 바로 뒤켠에.

 아래는 장불재서 정상 뷰!



청량함이 걸려있네요.

눈을 뗄수가 없어요.



우측 입석대(立石帶)

입석대는 지질학적으로 주상절리.

팔각 등 다각형 기둥(柱) 바위가 수직으로 갈리어졌다는 뜻.

화산암 기반인 제주도 해안에서 흔히 볼수 있고.

반대로 판상절리는 시루떡 처럼 수평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제


입석대는  臺가 아니라 )일까?
띠처럼 돌기둥들이 둘러졌기에

서석대(1100) 뒤가 정상 천왕봉(1,187m)

정상석 멋지죠,서체의 석각도 멋스럽고.

서석대는 帶가 아닌 臺.

 

보이는 호수는 광주호로 주변은 담양.

 저길  보고도(그것도 무등산 정상서) 그냥 지나치면

기대승,김인후,김덕령,고경명,송순,정철 등이 많이 서운해 할겁니다.

저 일대엔 15세기 한글 반포 후 한글이 널리 퍼지게 된 큰 공이 있거든요.

웬 뚱딴지같은 소리나구요?

소쇄원,식영정,송강정,환벽당,면앙정 등 저곳 누정(樓亭)에서 가사문학이 꽃피워졌거든요.

무등산 자락은 우리나라 최고 누정문화권(함양 안의계곡과 더불어).

무등산이 훤이 보이는 누대,정자에 들어 앉아 가사,시조 짓고 읊었죠.

 송순의 면앙정가를 시작으로,

가사 문학의 꽃봉우리 정철의 성산별곡,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이 저곳에서 나왔고.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문학 놀음의 기본은 시조(詩調)와 가사(歌辭).

歌辭라는 한자에서 보듯 말(辭)을 노래(歌)하듯 읊는 것...학문적으로 말하면 외형률을 가진 운문인 노래. 

보통 4음보(音步) 운율의 연속이라 입에 딱 달라 붙죠.

태산이/높다 하데/하늘 아래/뫼이로다.........이처럼.

가사는 기본적으로 한글로 창작된 문학.

가사는 곧 사대부 계층 부녀자들을 거쳐 평민에게로.

즉 규방가사에 이어 조선 후기엔 평민가사로 발전. 

 첫 주요 소비층은 사대부 계층이였지만

장르 자체가 지닌 폭넓은 개방성 덕분에 양반가의 부녀자, 승려, 중·서민(中·庶民) 으로 이어진 것.

물과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15세기 한글이 창제되었지만 양반들은 16세기에도 여전히 한문에 의존.

그런 상황에서 사대부가 가사라는 문학 놀음을 통해 한글로 글을 짓고 즐겼으니.

그래서 송순과 정철로 대표되는 담양의 가사는 한글을 보편화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문학적 사례.

가사문학의 종조 격인 송순은 41세 되던 1533년 담양으로 낙향해요.

제월봉(霽月峰)에 면앙정(俛仰亭)을 짓고 이곳에서 면앙정가를 지었다는.

어린 시절 10년을 담양에서 지냈던 정철은 출사(出仕) 이후 도중 4번이나 낙향해 담양에서 지냈고.

1550년 식영정(息影亭)에서 성산별곡(星山別曲,바로 앞산)을,

8년 후엔 송강정(松江亭)을 짓고는 그곳에서 사미인곡 속미인곡(續美人曲)을.

조선 최고의 가사문학은 이렇게 무등산 변 누정(樓亭)에서 탄생했네요.

무등산 변 누정 공간은 가사문학을 이해하고 한글 보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아래는 사미인곡(思美人曲) 15세기 원본&해석본!

한번 읊어 보시죠?! 

뎨 가ᄂᆞᆫ 뎌 각시 본 듯도 ᄒᆞᆫ뎌이고.
텬샹(天上) ᄇᆡᆨ옥경(白玉京)을 엇디ᄒᆞ야 니별(離別)ᄒᆞ고,
ᄒᆡ 다 뎌 져믄 날의 눌을 보러 가시ᄂᆞᆫ고. 

 

4음보(音步) 운율이 착착 감기죠? 

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구나.
임금이 계시는 대궐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가 다 져서 저문 날에 누구를 만나러 가시는고  

정철의 가사 중에서 문학성이 가장 높다는 속미인곡 첫구절입니다.

예전에는 어려워 했던 원문이 지금은 저절로 해석이 되니 참으로 신기방기.

이렇게 쉽게 읽히니 급속히 한글이 퍼질수 밖에요.


정상 천왕봉(자료 사진)

1년에 두세번 개방

서석대(瑞石臺)

왜 상서러운 瑞石인지는 아래를 보면~




수직 돌기둥들이 뭐 같이 보이시나요?(예전 사진) 

1.의병장 제봉 고경명은 참빗살,수정바위로 보았답니다.

/서석대 낭떠러지의 서쪽에 참빗살처럼 서있는 돌무더기는 높이가 모두 백 척이 넘게 보인다/

 2.최남선은 심춘순례에서,

/(금강산)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서석이다/ 

3.증심사 인근 의재 허백련의 사랑 춘설헌에 자주 들렀던 노산 이은상은?

'무등산 기행'에서 서석대와 금강산 해금강을 동격으로 보았다는.

/금강산 해금강을 바다의 서석산이라고 하고 서석산을 육지의 해금강이라 한다면

해금강을 본 사람은(무등산 서석대를 보지 않았다 해도 능히)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등산에도 올라 시 '등무등산'을 남겼던 매월당 김시습.

그가 59세로 부여 무량사에서 죽자 후학들이 수많은 제문을 받쳤죠.

그 중 문구 하나~~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도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

이름을 불러줘야 비로서 꽃이 되듯이.

서석대도 제봉,육당,노산이 있었기에 더욱 빛난다는...이게 인문학의 힘!


전체를 보면 이렇고.

거대한 성채같은.

입석,서석대를 지질학적으로 분석하면 이래요. 

중생대 백악기,그러니까 약 8700만 년 전 용암이 분출하고 급격히 냉각 후 수축합니다.

수축하면서 그 부피가 줄어들다 보니 수직 틈새(절리)가 생기고.

수백만년 동안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들며 틈,즉 절리가.

특히 빙하기 때 절리는 급속히 이뤄졌네요.

그 결정체가 바로 서석대 주상절리.

더 풍화가 진행되면 단위 기둥이 훤히 드러나는 입석대 형태가 됩니다

아래 입석대~~

입석대

다시 입석대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너덜지대가 형성.

아래 덕산너덜처럼.

돌들의 강,덕산너덜. 

외에도 무등산엔 지공너덜 등 너덜지대가 많고.

저 너덜들로 인해 무등산이 서석산으로 불리게 된 연유이기도.

옛글을 보면 대부분 서석산이라 했어요.

무등산의 어원을 놓고 수많은 설이 있지만 ‘무돌’ 즉 ‘무지개를 뿜는 돌’에서 유래한다는 것.

‘상서로운 돌’이라는 뜻의 서석(瑞石)은 ‘무돌’의 한자식 표기.


그럼 장불재 인근 중봉(中峰)서 본 정상 뷰는?

아래~~~

제봉 고경명의 말이 생각나고.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요,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유서석록 중-


중봉은 장불재와  고도가 비슷.

인근 자연석을 이용한 표지석의 석각이 멋스럽고.

많은 명산 중 표지석의 으뜸은 단연 무등산에 모여 있습니다.

중머리재,장불재,서석대,입석대 등등 많은 표지석들이 하나같이 예술작품.

좌 정상,우 서석대

구절양장...정상 까지 이어지는 군사도로

예전엔 오솔길 좌우는 군 주둔지.

書不盡 畵不得

'글로서 다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얻을 수 없다'

이게 옛 시인문객들이 산수(山水)를 보는 기본 시각.

자체로 채색 산수화네요.

다시 장불재~~

 이곳 장불재는 정상 향한 베이스 캠프 같은 곳.

여기서 등산객이 가는 길은 세 군데.

1.직진으로 정상으로 향하든가,

2.규봉암~꼬막재 거처 무등산장(원효사)까지, 무등산 허리를 한바퀴 빙돌던가

3.정상과 평행하는 지능선인 백마능선을 타는가.

세 코스 다 매력 만점이여요.

 지금 이순간,

저 풍광을 보고 발길을 돌린다든가 정상 아닌 2,3 코스를 택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열이면 열 정상으로 향하고.

이제 백마능선으로 향합니다.내게 백마능선은 꿈길 같은 곳. 

백마능선엔 몇가지 매력 포인트가 있어요..

하나는 억새요,

또 하나는 백마능선 고개마루서 보는 정상과 아랫 산골마을 뷰,

그리고 꿈길을 거니는 듯 편안하고 아름다운 능선길.

 

백마능선 전체 모습을 먼저 볼까요?

정상 쪽에서 뷰!

중앙 유두 봉우리가 정상 낙타봉.

낙타봉 왼쪽이 안양산으로 장불재~안양산 능선길을 보통 백마능선이라 해요.

지금부터 낙타봉 까지 저 산마루따라 걸으려구요.

Shall We Walk?

정상서 멀어져 가는 길이기도.

느낌 오시나요?


장불재를 떠나 백마능선을 탑니다,

타는 게 아니라 그냥 워킹.

백마능선 산마루는

무등산을 가장 無等스럽게 즐길수 있는 곳 중 하나.

좌측 중앙으로 장불재가 보이고

정상과 백마능선은 기찻길 처럼 평행을 이뤄요.

그래서 능선을 걷다가 좌측으로 돌리면 정상이 한눈에 들어오죠.

정상 좌측으로 서석대,우측 끝이 정상 천왕봉.

정상은 페트리어트 미사일 기지로 접근 금지!

신년 첫날 등 1년에 두세번 개방.


가운데 완만한 계곡이 장불재서 화순 적벽( red face )으로 이어지는 고갯길.

저 고개를 넘어 화순군 이서면,동복면 장삼이사들이 광주 말바우시장,대인시장으로 장보러 갔고.

그래서 장볼재가 장불재로...물론 여러 유래 중 하나.

저 고개를 삿갓 김병연 (1807∼1863) 도 넘 었고.

 좌  정상,우측이 백마능선,중앙 골짜기가 장불재로 이어지는 오솔길. 아래로 광주시 식수원인 동복댐이 보이네요.동복댐 물은 우측 백마능선 아래 도수(道水) 터널을 통해 광주시로 흘러갑니다.
멀리 희미하게 지리산 능선이 보이고.

참고로,서석대 인근서 동복댐,적벽 뷰!

 좌 멀리 지리산 반야봉이 빼꼼히 드러나고.

중앙 산자락으로 주상절리 암릉군 보이시죠?

규봉암이 있는 규봉(圭峰)으로,

무등산 8부 능선의 허리띠 선 상에 놓여있어요.

토끼봉~장불재~규봉암~꼬막재~원효사(산장)로 한바퀴 빙도는 순환루트가 인기 만점.

 규봉을 자료 사진으로 보면 이래요

규봉(圭峰)과 규봉암(우측) 

 100개 주상절리 수직 돌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서석대,입석대와 더불어 무등산 3대 주상절리.

 

그리고 이 규봉에 얽힌 조선을 대표하는 아웃사이더 방랑객 둘이 있었으니,

매월당 김시습 (金時習·1435∼1493) 과 삿갓 난고 김병연 (1807∼1863) .

매월당은 조선 초기,김삿갓은 신분제가 해체되어 가던 후기.

둘다 산수(山水)에 미쳐 매월당이  남긴 현존 시만 2200편.

매월당은 부여 무량사에서,김삿갓은 화순 한 종가집 사랑방에서 50대 후반 사망.  

매월당은 디아스포라적인 삶의 방외인(方外人)으로 조선팔도를 섭렵한 독보적 지식인.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 작가라는 국문학사적 의미를 떠나,

조선 초기 10여년에 걸친 그의 유량길을 보면 현대인이 봐도 경이롭다는.

 

자,정리하면 이래요~~

역사적으로나 인물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문학적 소재로나 참 매력적인 인물.

매월당은 성균관 인근 반궁리(泮宮里,현 명륜동))에서  태어났어요.

본관이 강릉.외가 또한 강릉으로 15세 어머니를 여의고 강릉서 3년 시묘살이를.

(외가가 강릉인 율곡 이이의 매월당 사랑은 특별했는데, 둘은 유학자로서 불교에 심취한 점도)

바로 그날 성균관 유생들이 모두들 꿈을 꿨답니다.

공자가 태어나는 꿈!

이름 또한 공자의 가름침에서 따온 '시습(時習)'

논어의 첫머리,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의 時習에서 따온 것.

율곡 이이는 매월당을 무척이나 흠모했어요.

매월당 ‘전’(傳),즉 전기를 쓰고 '백세의 스승'으로 여길 정도.

율곡은 매월당의 사상형태를 ‘심유적불’(心儒跡佛)로 정리.

불교에 적을 두고 승려의 행색으로 살았지만 마음은 유학자라는 거네요.

(물론 이는 후대 충절의 화신으로 추앙되면서 정치적 목적에 따라 유학자 쪽으로 더 끌어들인 것)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이라는 전기를 쓴 윤춘년은 그를 흠모해 공자에 비겼고.

매월당은 다섯살 때 이계전에서 중용,대학을 배웠는데,

(이계전은 고려의 대학자 이색의 손자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의 아버지)

소문을 들은 정승 허조가 그의 집으로 찾아와 테스트 합니다.

 

허조 : 애야,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 자를 넣어 시를 지어보거라.

김시습 : 老木 開花 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이렇게 늙은이의 마음까지 읽어내니 이 어찌 감탄하지 않았겠어요.

결국 장안의 신동으로 소문나 세종을 어전에서 대하고.

세종은 비단 50필을 하사했고 이때부터 '오세'라는 이름이(설악산 오세암 유래이기도)

단종이 삼촌 세조에 왕위를 찬탈 당했다는 소식을 삼각산 중흥사에서 들을 때는 그의 21세.

아무도 수습하지 못한 사육신 시신을

그는 승려 설잠(雪岑)이 되어 수습해  노량진 언덕(현 사육신 묘)에 묻어줍니다.

(야사 모음집 '연려실기술'에 기술)

그런데 승려로서 형상이 몹시 괴이했는데 머리는 깎았지만 수염은 길렀다는.

작은 키에 얼굴은 오종종...상상이 되나요?

그의 자화상을 보면 딱 그런 분위기.

 

그리고 유랑길을 관서 지방으로 향하는데 고양,파주,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청천강을 넘으며 수나라 대군을 무찌른 을지문덕의 살수(薩水)대첩 현장을 조사하고

묘향산 거쳐 의주 압록강 까지,이어  백두산 초입에 이르고.

잠시 한양으로 돌아왔다가 파주,철원,금화 지나 금강산 내금강으로.

여기서 그 유명한 만폭동 암릉에 글 귀를 새깁니다.

육당 최남선이 1928년 '금강예찬'서 찬미했던 그것.

樂山樂水 人之常情
我卽 登山而哭 臨水而哭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나는 산에 올라 울고, 물에 가서 우는가" 

최남선은 만폭동에서 매월당을 그리며 '금강예찬'에 이렇게 썼네요.

/이 새긴 글씨를 보고 그를 조상(弔喪)하는 동시에 도로 그 눈물로써 저를 조상하게 됩니다.

아름다움의 덤불이요 기쁨의 더덕인 금강산에서  오직 한 군데 눈물로 대할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육당 최남선도 정말 매월당을 흠모했나 봅니다.

조선에선 잊혀졌지만 일본서 큰 인기를 누렸던 '금오신화'를 역수입해 출판 한 것.

근현대 문장가 중 국토를 가장 많이 누비고 사랑한 사람은 누굴까?

당연 육당 최남선!

1924년의 금강산 기행을 시작으로 하는  육당의 국토순례는

1925년의 ‘심춘순례’와 1926년의 ‘백두산 기행’으로 이어집니다.

(육당은 심춘순례 때 무등산에서도 매월당을 다시 만나요)  

매월당은 이어 양평~여주~원주~평창 거쳐 오대산 월정사로.

월정사서 대관령 넘어 강릉~양양 겆쳐 설악산(오세암)으로.

오세암 암자에 얽힌 사연도 매월당의 어린 신동 일화와 연결되고.

다시 설악산서 동해 따라 고성으로 북진해 해금강 진입 직전에 일신상 이류로 후퇴합니다.

그리고 관서록(關西錄),관동록(關東錄)를 엮는데 이는 그가 손수 모아 였은 최초 시집.

다시 대관령을 넘어 이젠 호서(湖西,제천 의림지 서쪽이란 뜻으로 충청도) 지방으로 향합니다.

괴산,청주에 머물다  강경포구를 거쳐 전라도로 들어서니  세조 6년(1460) 가을,그의 나이 26살.

그러니까 중흥사 빠져나와 유량길 떠난지 벌써 5년 째!

논산(당시는 전라도) 개태사와 관촉사, 전주 귀신사,김제 모악산 금산사,부안 능가산 내소사,

정읍 내장산 거쳐 나주 금성산로. 다시 영암 월출산,장성 진산 거쳐 광주 무등산으로.

무등산에서는 조계산 송광사 거쳐 구례 화엄사~남원으로 입성.

남원에서는 만복사지에 머물렀는데

이때 경험으로 금호신화에 나온 '만복사저포기'를 경주 금오산에서 씁니다..

남원시 만복사지(예전 사진)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 정유왜란 때 불탔어요.

대형 석조는 당시의 사세를 짐작하게 하는데,

밑지름만 3미터가 넘고 상층부엔 사방 4개의 구멍이 나 있는데 이는 불상을 얹기 위한 홈.

신동국여지승람엔 11미터 청동 불상이 있었다고 함.

 

이렇게 2년을 호남에서 배회하다 남원 바래봉의 팔랑치를 넘어 경상도 함양으로.

함양에서 다시 가야산  해인사를 거쳐  경주 금오산(현 남산) 용장사터로 들어가니 그의 나이 31세!

여기서 농사짓고 글짓고 가끔 효령대군과 세조 부름 받아 한양 오가고 7년 여를 보냅니다.

금오산에  머물던 집 택호가 바로 금오산실(金鰲山室).

 최초의 남녀사랑 이야기  금오신화(金鰲神話)는 여기에서 저술.

〈유관서록〉,〈유관동록〉에 이어〈유호남록〉,〈유금오록〉도 이때.

그도 10년 장돌뱅이 되어 떠돌아다니다 보니 지쳤겠죠.

금오산에 정착하면서  당시 심정을 노래한 시 하나.

"이내 몸은 도시 밭둑가의 쑥대로구나

세상 살아가는 길은 모두 험하고 위태로우니

아무 말 없이 꽃떨기나 냄새 맡고  지내는 것이 좋으리로다"

그는 금오산에 처박혀 시나 짓고 책이나 읽지만은 않았어요.

 손수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지었다는.

이렇게 조선의 산천(山川) 치고 김시습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어요.

금오산 생활을 정리하고 한양으로 돌아올 때가 유랑길 20년이 지난 39세.

이후에도 기호, 관동,관서,호서를 떠다니다  결국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하니 그의 승탑도 그곳에.


김시습이 크게 재평가 된지는 사후 불과 20년도 걸리지 않았네요.

김시습이 죽은 지 18년 후 중종의 명에 따라 윤춘년(尹春年) 등이 유고를 모아 '매월당집'을 간행합니다.

그런데 금오신화는 매월당집에 빠졌어요.

당연 성리학에 반하는 귀신 얘기에 남녀사랑을 다룬 것이여서.

매월당은 금오신화를 따로 석실에 보관하면서 언젠가는 후대가 찾게 될거라 했다나...

금오신화의  완본은 전해오지 않다가

육당 최남선이 일본에서 전해오던 목판본을 발견하고 1927년  출판.

일본에서 인기는 청나라로 넘어가 중국에서도 간행되었고.

 규봉암

이제 무등산으로 돌아와~~

藹藹山光滴翠嵐

高低石逕暗檉

神祠佛宇多喬

天近星辰手可探

애애한 산빛에 비온뒤 푸른 색 빛나고

높고 낮은 돌 자갈 길 성책을 두른 듯하네.

절과 사우에는 쭉쭉벋은 기둥들이 많고 

하늘 별자리 가까워 손에 잡힐듯하네.

매월당의 시 등무등산 (登無等山)입니다.

규봉에는 한나절 머물며 시 규봉난야(圭峯蘭若)도 썼죠.

그는 규봉사에서 맑은 바람 낙엽송 향내에 취해 내려오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규봉난야에서 이리 썼어요.

"헌걸차게 왔다가 반시(半時)만 머물다니, 차마 선방을 내려가지 못하겠네."

 규봉서 보면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이 훤이 보여요.

그리고 매월당은 무등산을 내려와 조계산 송광사로 향합니다.

육당 최남선도 무등산을 나와 조계산 송광사로 들어간 후 굴목재를 넘어 섬암사로 들어갔죠.  

그럼 동복호로 가까이 가볼까요?

적벽(赤壁)&동복호

당시 적벽은 호남8경으로  김삿갓의 방랑벽을 멈추게 한 곳.

동복호는 광주시민의 식수원으로 적벽 100미터 높이 중 절반이 댐으로 물에 잠겼고.

물은 섬진강으로 흐릅니다. 장불재 서쪽은 영산강으로.

소쇄원,식영정,송강정 등의 누정 가사문화권~무등산(입석대,서석대,규봉)~적벽을 잇는 문화벨트는

당시 광주목을 찾는 사대부들이 찾은 기본 유람 코스!

중종 때 조광조 (1482∼1519) 도 화순 능주에서 사약을 받기 전 적벽 풍광을 즐겼답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이려나....??

 

삿갓 난고 김병연(1807∼1863)이 방랑길에 오를 때는 22세 무렵.

처자식 남겨두고 강원도 영월 노루목(단양 온달산성 인근)을 떠나 본격 ‘동가숙 서가식’을 시작.

34세 되던 1841년에 첫 무등산 변 화순현 적벽(현 동복댐)을 밟았어요.

장불재를 넘어온 김삿갓은 적벽의 절경에 취해 걸음을 멈추고,

삿갓을 들어 올려 적벽을 응시하고는 괴나리봇짐에서 지필묵을 꺼냅니다.

그리고 짤막한 시 한 수를 읊죠.

無等山高松下在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가지 아래에 있고

赤壁江深沙上流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를 흐르는구나

 1850년 두번째로 화순을 찾고는 50세 되던 해엔 아예 동복(당시는 동복현)  구암마을의

정시룡 사랑방에서 7년을 기거하다 57세로 생을 마감.

그가 죽자 정씨 문중에서 장례까지.

3년 후 차남 익균이 영월서 내려와 탈골된 부친의 유골을 수습해 고향 노루목(현 김삿갓면)으로 이장합니다.

생전 얼굴 한번 못본 자식이 보름 길을 마다하고

부친 유골을 수습해 영월 고향까지 모셨다???!!!

여기서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 이데올로기 성리학의 무지막지함 봅니다.

김삿갓 初墳地(초분지) 묘비

 지금 동복면 구암리에는 정시룡 고가와 김삿갓의 초분지( 初墳地) ,

그리고 그가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경기도 양주,

묻힌 영월 노루목은 김삿갓 유적지로 홍보 관리되고 있네요.

영월군 김삿갓면이라는 행정명도 생겼고.

그러나 생전 김삿갓의 행적을 알수 있는 기록은 없고 죄다 구전된 것들이라는.

산이란 직접 걸어봐야 그 느낌이 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평온한 길. 누구에겐 사색의 길.

고개를 들면 무등산 파노라마가, 숙이면 화순군 수만리의 전원 풍경이 펼쳐집니다.

 아래 사진은 예전 언젠가 초가을

'勝處傷心自哀'

경치 좋은 곳에 오니 마음이 시나브로 슬퍼진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바로 앞 산은 화순읍의 진산인 만연산....너머가 화순읍.

만연산 만연사 일대는 다산 정약용이 청년 시절을 보냈던 곳.  

다산은 열일곱살 때 화순 현감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살며 무등산을 올랐어요.

약현,약전,약종,약용 4형제가 함께.

그런데 무등산에 오른 연유가 재밌어요.

화순 적벽을 구경하고온 지 얼마 안돼 17세 다산은 화순 사람 조익현을 만나요.

이때 조익현은 “적벽의 절경은 여인네가 화장한 것과 같다.

화려하게 분을 바른 모습은 비록 눈을 즐겁게 하나  기지(氣志)를 펼 수는 없다”며

무등산 오를 것을 권유하죠.

다산이 쓴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에 나와 있는 얘기.

시(詩) ‘등서석산’(登瑞石山)도 썼고.

백마능선 정상 낙타봉(930m)이 보이고.

장불재 보다 약간 높은.

낙타봉이라 불린 이유가 한눈에 보이시죠?

낙타봉이 보이고

다들 정상으로 갔으니 너무나 한적한.  

겨울 억새가 주는 서늘한 야성을 오롯이 만끽할수 있고.


백마능선은 호남정맥의 분수령이기도

좌측으로 흐르면 섬진강,우측으로 흐르면 영산강으로.

백마능선 산마루 정상이 보이고.

문득 몇해 전 늦가을,

가을 바람 터치에 수줍어 하던 용담이 생각나요.

당시 사진을 찾아 보니 아래~~.

가을 하늘을 닮은 용담

동복호 옹성산(적벽) 뒤로 백아산,그뒤 멀리 지리산이 보이고.

백아산은 한국전 때 빨치산들의 최후지 중 하나.

당시 오끼나와서 발진한 b29 폭격으로 백아산은 쑥대밭이 되었고.

그래서 소설 '태백산맥' 말미의 무대.

백마능선 정상 낙타봉

 

무등산인들 식후경!

정상에 앉아 베낭 속 이것저것 꺼내 먹어요.

고백컨데 실은 전망 좋은 곳에선 여유를 못즐겨요.

먹어야지,봐야지,찍어야지...

트리플 동시 진행이라 나도 모르게 핸펀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고.

2년 약정 기간에 평균 2~4번은 액정 교체.

낙타봉에 올라 오던 길 돌아보니.

철탑이 장불재.

옛 기록엔 장불치(長佛峙) 라고도 하는데 규봉암서 보면 큰 부쳐가 누워있는 형상이라서요

백마능선은 안양산으로 이어지고.

낙타봉서 바라본 안양산(安養山,853m).

 안양산은  백마능선 끝에 솟은 위성봉.

좌 동복호,댐 너머로 멀리 지리산 주능선이 보이고.

불가에서 극락을 안양이라고도 합니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도 그 뜻.

장불재~안양산까지 2.8km 구간은 봄엔 철쭉으로 가을엔 억새로 유명.

 낙타봉 지나 뒤돌아 보니 낙타봉과 장불재. 

그럼 백마능선의 끝 안양산에서 보는 용마능선 낙타봉과 무등산 정상은 어떤 모습일까?

안양산서 바라본 용마능선(좌) & 무등산 정상(우)

정상은 구름 속에 숨었고

정상 우측 아래 암릉 보이시죠?

규봉 &규봉암!

가서 보면 입석들의 향연에 놀라게 되죠.

예전 무등산 유산기를 보면, 정상에서 곧바로 규봉~규봉암으로 하산들 합니다.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에도 그렇고.

그러나 지금은 정상의 군부대로 인해 정상에서 입석대~장불재로 내려온 후 산허리를 따라 우회.

규봉과 규봉암

 금강산이야 설악산이야?

하늘과 맞닿을 듯한  100 여개 돌기둥이 병풍처럼 펼쳐집니다.(자료 사진)

규봉과 인근 지공너덜은 대한민국 명승 제 114 호로 지정.  

규봉암

규봉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매월당 김시습 & 고봉 기대승.

1571년 3월 고봉 기대승(광주시 광산구 생가)은 제자들과 같이 무등산 규봉에 올랐어요.

그날은 퇴계 이황의 장례가 치뤄지던 날(?).

그리고 추모시 한수를 읊었으니 

선생은 세상이 싫어 백운향에 가셨는데  / 先生厭世白雲鄕

천한 제자 슬픔 머금고 이곳에 있네 / 賤子含哀在一方

멀리 생각하니 오늘 무덤에 묻히시어 / 遙想佳城今日掩

사산의 궂은 안개 점점 망망하리라 / 四山氛霧轉茫茫

 고봉이 퇴계를 조상하는 이 시가 나오게 된 배경이 궁금하지 않으시나요?

서사가 있어요.대충 정리하며 이러하고~~~

 퇴계vs고봉

둘은 25살 터울로 스승과 제자 관계를 뛰어넘은 학문의 동반자.

조선 유학사,아니 한국 지성사에서 가장 빛나는 '퇴계-고봉의 사단칠정 논쟁'의 당사자.

1559년부터 1566년까지 무려 8년 간 서찰로.

약관도 안된 선조는 스승인 퇴계가 귀거래 하자 후임자를 추천해 달라합니다.

이때 퇴계는 류성룡,정탁,이이 등을 지우고

 '통유(通儒)'라는 극찬까지 하며 신예 고봉 기대승을 천거.

고봉은 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가 ‘통유’라는 표현까지 쓴 후생(後生)이 된 것.

공자가 '후생가외'로 지목한 사람은 제자 안회(顔回).

공문십철(孔門十哲) 애제자 중에서도 안회를 가장 총애했죠.

고봉은 퇴계에겐 공자의 안회같은 그런 존재였던 것.

결국 8년 서신 논쟁으로 퇴계는 자신의 학문을 정립합니다.

이는 100년 후 효종이 1655년 고봉에 올린 제문을 보면 알수 있어요.

 /문정공 조정암(조광조) 선생이 돌아가신 후 도가 황폐해졌으니

이황이 계승하여 창도하였는데 진실로 뿌리와 줄기가 되었다가

경(기대승)께서 도와 좌우로 접하여 바른길로 인도하였도다/

 

1569년 3월 퇴계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낙향할 때입니다.

둘은 동호(東湖)에서 함께 자고   다음날 한강을 건너고는 

봉은사(奉恩寺,현 삼성동 봉은사)에서 하루 더 묵으며 이별을 아쉬워합니다.

(東湖는 동호대교 유래로 옥수동~압구정 사이 한강이 호수처럼 넓어서.

실제로 동호대교가 옆 한남대교 보다 길어요.)

이듬해 고봉은 고향서 퇴계의 부고를 받아요.

고봉은 안동 도산에 묘갈명서(墓碣銘序)와 묘지(墓誌)까지 지어 보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무등산 규봉암에 오르죠.

고봉도 이태 뒤 1572년 46세로 고향으로 귀거래 중 생긴 병으로 전북 정읍에서 생을 마칩니다.

선조는 덕원군(德原君)으로 봉하고 문헌공(文憲公) 시호를 내렸고.

​세월은 흘러  정조도 1788년 제문을 올리는데,

/선배(퇴계)도 두려워하였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늘 신하들을 앞에 두고 학문을 지도했던 정조.

둘 간의 나이를 뛰어넘는 서신논쟁이 엄청 부러웠던 것.

광주광역시...좌측 끝으로 나주시. 

나주시 지나 영산강 물줄기는 영암 거쳐 목포로 이어지고.

태조 왕건이 궁예 휘하에서 청년 장교로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무렵,

개경에서 선단을 이끌고 서해 따라 내려온 후

영산강을 거슬러 오른 후 나주를 접수한 이유가 보이네요.

나주~무진주(광주)는 견훤의 근거지인 전주로 향하는 인후지지였던 것.

예로부터 담양~광주~나주~영암~목포는 영산강 물줄기 따라 물산과 교통망이  연결되었습니다.

 

서남쪽으로 멀리 영암 월출산이 우뚝하고.

 좌 중간 호수 마을 보이시죠? 화순군 능주.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시라면 알수 있는 지명.

조광조가 유배되고 사약을 받은 곳으로 그를 기리는 죽수서원이 있죠. 

 그럼 무등산 정상에서 본 겨울 용마능선은 어떨가?

아래 사진!

서석대서 백마능선 뷰!

 해발 930m의 낙타봉과 해발 853m의 안양산 

앞 유두 볼록한 봉우리가 백마능선 정상 낙타봉.그 옆 펑퍼짐한 봉우리가 안양산.

장불재~안양산까지의 백마능선 거리는 2.8km.

 하산은 역순으로 합니다.

장불재~중머리재~당산나무 거쳐 증심사를 지나니 생각나요.

증심사 일제 강점기 모습.뒤편이 차밭.

차밭은 지금도 재배되고 있고.(아래 사진)

현 증심사(언젠가 가을)

 왼편으로 광주시.증심사 뒷편 차밭 보이시죠?

증심사는 통일신라시대 철감선사가 창건.

사찰 뒤쪽은 일제강점기 때 개발된 다원.

의제 허백련에 의해 춘설차를 만들던 삼애다원은  지금도 그 원형 차밭을 유지하고 있고.

 

무등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들머리에서 증심사를 만나게 되죠.

예나 지금이나 무등산 산행은 그냥 증심사가 들머리.

무등산의 초입에 있다 보니 사연도 많아요.

일제강점기에는 아편 중독자들의 임시 수용소였고,

한국전 때에 빨치산 전남도당본부가 들어서자 토벌 국군에 의해 불탔고.

그리고 남한 땅 사찰 거의 대부분이 이때 불탔어요.

전남 지방만 봐도 광주 원효사,화순 유마사,나주 불회사와 운흥사,장흥 보림사,

보성 대원사,함평 용천사 등의 명찰이 그때에.​

 1950년 9월에서 이듬해 초엽 사이에 집중적으로 탔는데

이는 빨치산 활동,군경의 토벌 작전도 절정인 시기.

이들 절은 빨치산 본거지와 인접해 있었다는 공통점.

​증심사는 1950년 9월 이후 한동안 빨치산 전남도당 본부로,

나주 불회사와 운흥사도 이른바 빨치산 유치지구 안에 있었으며,

함평의 용천사 역시 빨치산 불갑산 지구가 있었다는.

이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조사에서도 일부 확인된 사실.

부처가 도와 살아난 사찰도 있었죠.

  구례 화엄사의 소각을 지시받았으나 당시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은

사찰의 문짝만 상징적으로 태웠다는.

국가보훈처는 이같은 이유로 그를 ‘호국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방한암 스님은 살신성인으로 오대산 상원사를 살렸고,

김영환 대령은 미 폭격 명령을 받았으나 인근에 기관총만 난사해 팔만대장경의 합천 해인사를 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휴전 직후 훈련 비행 중 동체 추락으로 꽃다운 나이로 순국.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된 남원시 만복사지.


****별책 부록!!!!*****


이승의 총각과 저승의 처녀가 펼치는 환타지 사랑 이야기

<만복사 저포기(萬福寺樗蒲記)> 간단 정리본 

저자......매월당 깁시습

시기......15세기

주제...... 생사를 초월한 사랑

장르......남녀 사랑을 주제로 한 환타지로 최초의 한문소설.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筵錄)〉 등 5편의 한문 단편 소설집 '금오신화'의 첫번째 작품

유사 버전.......왕조현의 천녀유혼

배경...남원시 만복사

저술 장소......경주 금오산 용장사터(현 남산)

특이 사항......일본서 인기를 끌다 목판본이 육당 최남선에 의해 역수입.

 

 

전라도 남원에 양생이 살고 있었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장가도 들지 못해 만복사(萬福寺)의 동쪽에서 혼자 살았다.

양생은 달이 뜬 밤이면 늘 나무 아래를 거닐며 시를 읊었다.

"한 그루 배꽃이 외로움을 달래 주지만

  휘영청 달 밝은 밤은 홀로 보내기 괴로워라.

젊은 이 몸 홀로 누운 호젓한 창가로  

어느 집 고운 님이 퉁소를 불어 주네 ....."

시를 다  읊고 나자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이뤄지지 않으리...?"

양생은 기뻐하였다.

이튿날은 마침 삼월 이십 사일이었다. 

이 고을에서는 만복사에 등불을 밝히고 복을 비는 풍속이 있었는데, 남녀들이 모여 소원을 빌었다.

날이 저물어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갔다. 양생이 소매 속에서 저포(윷놀이)를 꺼내어 불당의 부처 앞에다 던졌다.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할까합니다.만약 부처님이 지시면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해 주십시오."

양생이 이겼다.그는 불좌(佛座) 뒤에 숨어서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

얼마 뒤에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들어오는데, 나이는 열대 여섯쯤 되어 보였다.

얼굴과 몸가짐이 마치 선녀 같았다.

 

그녀는 품속에서 축원문을 꺼내어 불탁 위에 놓고 배필을 얻어달라고 빌고 있었다.

양생은 불좌 틈으로 여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어 뛰쳐나가 말하였다.

“낭자는 어떤 사람이기에 혼자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여인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는 좋은 배필만 얻으면 되실 테니까, 이름을 묻지는 마십시오."

둘은 은밀히 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밤이 깊어 달이 동산에 떠오르자 창살에 그림자가 비쳤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낭자가 물었다.

“누가 나를 찾아온 게냐?"

그녀 시녀였고,시녀가 말하였다.

“평소에는 문 밖에도 나가지 않으셨는데,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낭자가 말하였다.

“오늘의 일은 우연이 아니다.부처님이 돌보셔서,고운 님을 맞이하여 백년해로를 하게 되었다.

어버이께 여쭙지 못하고 시집가는 것이 비록 예법에 어긋나지만,

서로 즐거이 맞이하게 된 것 또한 기이한 인연이다. 너는 집으로 가서 자리와 술을 가지고 오너라."

 

시녀가 그 명령대로 가서 뜨락에 술자리를 베푸니, 시간은 벌써 사경(四更)이나 되었다. 

시녀가 차려 놓은 방석과 술상은 무늬가 없이 깨끗하였으며,술에서 풍기는 향도 정녕 인간세상 솜씨는 아니었다.

양생은 좀 괴이하였지만, 여인의 웃음소리가 맑고 고와,

‘틀림없이 귀한 집 아가씨가 한때의 마음을 잡지 못하고 담을 넘어 나왔구나' 생각하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달이 서산에 걸리고 먼 마을에서는 닭이 울고 절의 범종 소리가 들려왔다.

먼동이 트려 하자 여인이 말하였다.

“얘야.술자리를 거두어 집으로 돌아가거라."

시녀는 대답하자마자 사라졌고,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여인이 말하였다.

“인연이 이미 정해졌으니 낭군을 모시고 집으로 함께 돌아가려 합니다."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마을을 지나가는데, 개는 울타리에서 짖고 사람들이 길에 다녔다. 

그러나 길 가던 사람들은 그가 여인과 함께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양총각, 새벽부터 어디에 다녀오시오?" 하였다. 

양생이 대답하였다.

“어젯밤 만복사에서 취하여 누웠다가 이제 친구 집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여인이 양생을 이끌고 깊은 숲을 헤치며 가는데, 이슬이 흠뻑 내려서 갈 길이 아득하였다.

양생이 “어찌 거처하는 곳이 이렇소?"

하자 여인이 대답하였다.

“혼자 사는 여자의 거처가 원래 이렇답니다."

 

둘이 읊고 한바탕 웃고 하다가 개령동(開寧洞)에 이르렀다.

다북쑥이 들을 덮고 가시나무가 하늘에 치솟은 가운데 집이 있었는데,작으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는 여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방안에는 이부자리와 휘장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밥상을 올리는 것도 어젯밤 만복사에 차려온 것과 같았다.

양생은 그곳에 사흘을 머물렀는데,너무나 행복했다.

시녀도 아름다웠고, 그릇은 깨끗하면서도 무늬가 없었다.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얼마 뒤에 여인이 양생에게 말하였다.

“이곳의 사흘은 인간 세상의 삼 년과 같습니다. 낭군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생업을 돌보십시오."

 이별의 잔치를 베풀며 헤어지게 되자,양생이 서글프게 말하였다.

“어찌 이별이 이다지도 빠르오?"

여인이 말하였다.

“다시 만나 소원을 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 오시게 된 것도 반드시 묵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웃 친척들을 만나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양생이 ‘좋다'고 하자 곧 시녀에게 시켜, 사방의 이웃에게 알려 모이게 하였다.

흥겨운 술판이 벌어지고 흥겨웠다.

...................................................

하룻밤 잔치가 다하고 헤어질 시간이 되자,

여인이 은그릇 하나를 내어 양생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내일 저희 부모님께서 저를 위하여 보련사에서 음식상을 베풀 것입니다. 

당신이 저를 버리지 않으시겠다면, 

보련사로 가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와 함께 절로 가서 부모님을 뵙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생이 대답하였다.

“그러겠소."

(이튿날) 양생은 여인의 말대로 은그릇 하나를 들고 보련사로 가는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어떤 대가의 집안에서 딸의 대상( 大祥) 을 치르려고 수레를 길에 늘어세우고 보련사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대상은 사망한 날로부터 만 2년이 되는 두번째 기일(忌日)에 행하는 상례 )

 하인은 길가에서 한 서생이 은그릇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고는 주인에게 말하였다.

“아가씨 장례 때 무덤 속에 묻은 그릇을 벌써 어떤이가 훔쳐 갔나 봅니다."

주인이 말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인이 말하였다.

“저 서생이 가지고 있는 은그릇을 보고 한 말씀입니다." 

주인이 말을 멈추고 (양생에게 그릇을 얻게 된 사연을) 물었다.

양생이 그 대로 대답하였더니, 부모는 놀라다 한참 뒤에 말하였다.

“내 슬하에 오직 딸자식 하나가 있었는데, 왜구의 난리를 만나 싸움판에서 죽었다네. 

미쳐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개령사 곁에 임시로 묻어 두다 3년이 지나고 오늘 이르게 되었다네.

오늘이 벌써 대상 날이라,재나 올려 명복을 빌어줄까 한거네.

자네가 정말 그 약속을 지키려거든,내 딸자식을 기다리고 있다가 같이 오게나."

그 귀족은 말을 마치고 먼저  떠났다. 양생은 여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이 되자 낭자는 계집종을 데리고 왔다.

둘은 서로 기뻐하면서 손을 잡고 절로 향하였다.

 

여인은 절 문에 들어서자 먼저 부처에게 예를 드리고 곧 흰 휘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친척과 스님들은 모두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오직 양생만이 혼자서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이 양생에게 말하였다.

“우리 부모님과 함께 저녁 드시지요."

양생이 그 말을 여인의 부모에게 알리자,여인의 부모가 시험해 보려고 같이 밥을 먹기로 하였다. 

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오직 수저 놀리는 소리만 들렸는데, 인간이 식사하는 것과 매 한가지였다.

그제서야 낭자의 부모는 놀라 탄식하면서, 양생에게 휘장 옆에서 딸과 같이 잠자게 하였다.

한밤 중에도 말소리가 낭랑하게 들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만히 엿들으려 하면 갑자기 그 말이 끊어졌다.

여인이 양생에게 말하였다.

“제가 법도를 어겼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려서 『시경』과『서경』을 읽었으므로, 예의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도 오래 다북쑥 우거진 속에 묻혀서 들판에 버림받았다가 사랑하는 마음이 한번 일어나고 보니,

끝내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번 절에 가서 부처님 앞에서 향불을 사르며 박명을 탄식하다가 뜻밖에도

삼세(三世)의 인연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소박한 아내가 되어 백년의 높은 절개를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술을 빚고 옷을 기워 평생 지어미의 길을 닦으려 했지만,

애닮게도 업보(業報)를 피할 수가 없어서 이제 저승길을 떠나야 하게 되었습니다.

즐거움을 미처 다하지도 못하였는데,제가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운우(雲雨)는 양대(陽臺)에 개고 오작(烏鵲)은 은하에 흩어질 것인데, 

이리 작별하려 하니 아득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이 여인의 영혼을 전송하자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혼이 문 밖으로 나가자 소리만 은은하게 들려왔다.

여인의 부모는 그제야 그 동안 있었던 일이 사실인 것을 알게 되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양생도 또한 그 여인이 귀신인 것을 알고는 더욱 슬펐고, 

여인의 부모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울었다.

여인의 부모가 양생에게 말하였다.

“은그릇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또 내 딸자식 몫으로 밭 몇 마지기와 노비 몇 사람이 있으니, 

자네는 이것을 신표로 하여 내 딸자식을 잊지 말게나."

 

이튿날 양생이 고기와 술을 마련하여 개령동 옛자취를 찾아갔다. 

과연 망자를 임시로 묻어 둔 곳이 있었다. 

양생은 제물을 차려 놓고 슬피 울면서 그 앞에서 지전(紙錢)을 불사르고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 준 뒤에 제물을 지어 위로하였다.

"아아.  당신은 어릴 때부터 천품이 온순하고 자태는 서시(西施) 같았고, 문장은 숙진(淑眞)보다도 나았소.

난리를 겪으면서 정조를 지켰지만, 왜구를 만나 목숨을 잃었구려.

다북쑥 속에 몸을 내맡기고 홀로 지내면서,

꽃 피고 달 밝은 밤에는 마음이 아팠겠구려.

......

지난번 하룻밤 당신을 만나

비록 저승과 이승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알면서도 즐거움을 다하였소.

 하루 저녁에 슬피 헤어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아아. 슬프구려. 몸은 비록 흩어졌다지만 혼령이야 어찌 없어지겠소?"

장례를 치른 뒤에도 양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밭과 집을 모두 팔아 사흘 저녁이나 잇따라 재를 올렸다.

사흘 되던 날 공중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당신의 은혜를 입어 타국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승과 이승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신도 이제 다시 정업을 닦아 저와 함께 윤회를 벗어나소서."

 양생은 그 뒤에도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었는데,언제 죽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끝-

 




1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쵸코코
    '22.3.3 10:33 AM

    오늘 아침, 무등산을 보내요.
    중봉까지는 제가 자주 오르락내리락 했던곳 입니다.
    봄이 다 지나가도록 송신소(?) 꼭대기엔 하얀 눈모자가 있었어요. 시내 어디서든 보였었는데...
    지금은 고층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않을련지도...
    좀 있다 저녁 시간쯤에 자세히 읽어 볼래요. 너무 반가운 글이네요.

  • wrtour
    '22.3.14 10:40 AM

    다시 읽으셨죠?ㅎ
    좋은곳에 사시네요

  • 2. 예쁜솔
    '22.3.3 1:22 PM

    저는 언제나 wtour님 발뒤꿈치만 따라 가네요.
    북한산도 대서문까지만
    무등산도 증심사 조금 위까지는 여러번 가봤다는...
    증심사 앞 개울물에 작은 물고기가 많았던 기억도 있고...

  • wrtour
    '22.3.14 10:46 AM

    평소 여기저기 많이 다니신거 같은데
    북한산은 대서문,무등산은 증심사 까지 오르네리셨다니 산행은 별로 좋아하지시는 않으신듯.트레킹 정도 즐기시네요.뭐 트레킹이든 산행이든 산수를 즐기는건 매한가지죠.더 건강하시구요.

  • 3. 푸른나무
    '22.3.4 1:28 PM

    너무 오랫만에 보는 무등산...정말 좋네요
    감사합니다

  • wrtour
    '22.3.14 10:48 AM

    네 무등산 정말 좋은거 맞아요.
    나이 들면 더 좋아지는 그런 산

  • 4. 지음
    '22.3.11 1:50 PM

    늘 선거철이 되면 들어오는게 망설여지는데
    오랜만에 들리니 무등산이 똭!
    겨울의 무등산이 다른 산들하고는 정말 다르네요.
    꼭 한번은 가보고싶다 하면서 봤습니다.
    곁들인 사연들까지 재미나게
    이렇게 자세히 올려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 wrtour
    '22.3.14 11:10 AM

    별책부록도 재밋었나요? ㅎ
    무등산.
    나이 들며 더 좋아진 산.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 산.
    흔히들 10대 명산이라해요.
    설악산.지리산.한라산 3대 명산에 북한산.도봉산.속리산.내장산.주왕산.무등산.가야산.
    이리 10대 명산.
    예전엔 무등산이 8번째로 뽑혀서 좀 의아했는데, 지금 저 개인적으론 더 나아가 4대 명산으로 뽑고 싶을 정도.들어가면 정말이지 평온한게 산 이상의 산.
    '등급이 없다'는 무등이란 이름이 그래서 절묘하고.

  • 5. 산이좋아1
    '22.3.26 10:00 AM

    바쁘다는 이유로
    핸드폰으론 글을 쓰는 속도가 너무나 느려서 ..등등
    여러 이유로 귀하고 너무나 정성들여 써주신 글들에 대한 인사도
    제대로 못하는데...
    아침시작하면서 wrtour님의 무등산을 보았습니다.
    지금이야 차들이 넘 많이 다녀서 탈?이지만
    시내버스도 많지 않던 시절에 여기저기 발이 닿도록 다녔던 그길들이
    허당이였습니다.
    등산화가 있었을라구요.
    운동화신고 증심사에서 중머리재까지 뛰다 걷다
    그랬었는데..무심히 지나쳤던 그 길들에 이리 많은 서사가 있습니다.
    눈 많이 내린 2월초에 다녀왔습니다.
    세인봉으로 올라 해골바위보고
    중머리재 중봉 서석대 입석대로
    규봉암 지나 신선대도 보고 원효사로 꼬막재로 원점회귀했지요
    마이산의 정상석글씨도 멋지고
    무등산의 글씨도 멋졌네요..
    요즘은 산들의 정상석을 너도 나도 크게 …인위적으로
    그래서 별로인데요.
    얼마전엔 용문산으로 중원산을 다녀온적이 있습니다.
    백운봉지나 장군봉에 가니,,
    산의 주인이 사람이 아닐진데…
    장군봉 정상석은 귀퉁이로 몰고 백운봉 전망을 하라고 한건지
    앞자락 나무들을 숭덩숭덩 잘라버리고
    그곳에 데크를 만들어 뒀더라구요.
    갈수록 산은 사람의 편리를 위하는 쪽으로 변모되어가는거 같애서
    안타까웠습니다
    얼마나 더 다리가 허락할래나?늘 이런생각으로 걷기만 한 그 산들을
    wrtour님의 산에선 저까지 차분해져 갑니다.
    이처럼 단숨에도 두고두고도 좋은 글들
    엮어서 책 내심 저 1번 합니다.
    늘 건강하시구요.

  • wrtour
    '22.4.1 10:48 AM

    늘 미래 다리를 걱정하시는 우리 산이좋아님!!!
    건강 염려하시는데 다녀오신 거 보면 20대 청춘이세요.아낌없는 격려와 칭찬.읽다 보면 미소 짖고 힘이 솓는답니다 ㅎ.신선대 쪽 두번 돌았는데 다음 기회가 오면 꼭 다시 가보려구요.무등산 뒷면이라 생각하니 기대가 크답니다.그쪽에 서면 지리산을 더 가깝게 만날수 있겠죠?

  • 6. 씨페루스
    '22.3.30 8:13 PM

    책 내시면 저는 2번 할게요^^
    무등산이 이렇게 멋진 산인줄 몰랐습니다.
    서석대 주상절리 대단하네요. 규봉, 규봉암도요.
    소의 잔등같은 억새벌판은 곧 화사한 철쭉벌판으로 변하겠지요?
    더 먼 여수 해남은 여러번 갔어도
    광주는 갈 엄두가 안났어요.
    망월동에 한번 가봐야지하면서도...
    화순 운주사와 함께 무등산에 가봐야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인문학의 향연이 펼쳐지는 등반기.
    별책부록도 정말 재미나네요^^

  • wrtour
    '22.4.1 11:09 AM

    ㅇ운주사 두번 가봤는데 좋았어요
    저도 무등산이 이렇게 멋진 산인지 최근에야 알았죠.
    아니 느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듯하네요.
    중심사~중머리재 지나 중봉서 바라보는 무등산 정상 뷰는 정말이지 대한민국 경관 탑3에 넣고 싶을 정도.
    너무나 안온하고 평온하고 부드러워요.이런 필링은 나이가 들수록 더하겠죠.왜 無等인지 시각적으로 느낄수 있는.
    시페루스님!!
    꼭 한번 다녀오세요.1000미터 넘는 산 중 아마 가장 손쉽게 오를수 있을 겁니다.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25781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도도/道導 2022.12.08 13 0
25780 삶의 질을 높여 날마다 행복에 빠진다. 도도/道導 2022.12.07 122 0
25779 족쇄와 재갈은 4 도도/道導 2022.12.06 158 0
25778 능력의 부재는 한숨을 쉬게하지만 2 도도/道導 2022.12.05 209 0
25777 대~~~~~~~~~ 한 민 국~ !!! 2 도도/道導 2022.12.03 387 0
25776 돌아 갈곳과 반기는 식구가 있어 4 도도/道導 2022.12.02 498 1
25775 정말 자랑좀 하고 싶어서요 싫으신분은 통과하세요 3 대충순이 2022.12.01 746 0
25774 내 이름으로 등기되지 않았어도 2 도도/道導 2022.12.01 309 0
25773 그날에 너를 만날 수 있기를 2 도도/道導 2022.11.30 324 0
25772 돌아온 녀석이 예쁘다 6 도도/道導 2022.11.29 694 1
25771 비오는 아침도 즐겁다. 4 도도/道導 2022.11.28 422 0
25770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2 도도/道導 2022.11.27 336 0
25769 가을의 빛이 스미는 겨울 2 도도/道導 2022.11.26 345 1
25768 까만 감도 있습니다. 2 도도/道導 2022.11.25 557 0
25767 행복을 쌓아가는 것은 2 도도/道導 2022.11.24 726 0
25766 새벽이 추웠던 날 2 도도/道導 2022.11.23 763 0
25765 자처하는 길 2 도도/道導 2022.11.22 470 0
25764 공수래 공수거 2 도도/道導 2022.11.21 611 0
25763 인형 니트 가디건 2 Juliana7 2022.11.20 755 0
25762 투쟁의 노래가 불려지지 않기를 4 도도/道導 2022.11.19 510 0
25761 순돌이 관찰기 종료 10 지향 2022.11.18 1,454 0
25760 넘어진 김에 휴식을 2 도도/道導 2022.11.18 510 0
25759 내 코가 석자면 보이지 않는다 4 도도/道導 2022.11.17 615 0
25758 감사해 하는 이유 2 도도/道導 2022.11.16 537 0
25757 에프로 누룽지 만들기 도전!!!! 1 둥글게 2022.11.16 1,536 1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