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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소백산(中)

| 조회수 : 952 | 추천수 : 3
작성일 : 2021-08-04 15:49:04


무량수전 측면

 

무량수전 뒷편으로 가면 부석사 창건 당시를 보여주는 증거들이 나와요.

부석(浮石)의 실제적인 증거들.

부석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키워드가 있으니

그 중 핵심이 선묘(善妙)와 부석(浮石).

부석사 창건주 의상,의상의 현지처 선묘(善妙),그리고 浮石...여기에 부석사의 많은 게 들어있다는.

 

무량수전 뒤편의 浮石

 

바위 편들이 떠 있나요?

떠 있는 것으로 보이면 신심이 클 터.

지금 나에겐 부석사를 지을 때 채굴된 채석장으로 흔적으로 보이네요!!

아래 당간지주,석축단,석등,삼층석탑도 다 이곳 바위를 원재료로 사용했을 겁니다.

부석사 창건 관련 저간의 얘기들은 이래요.

그러나 저간의 얘기란게 부석사 설화로 머물지 않고

원효까지 연결된 삼국시대 종교사에 사상사,

그리고 이웃 일본 종교사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선묘(善妙)는 산둥반도 바닷가 여인으로 부석사 창건설화의 주인공.

부석사 경내 부석(浮石),선묘각,선묘정,석룡이 선묘의 상징물들.

안양루 아래 동쪽에는 아직도 선묘정(井) 흔적이 있어요.

선묘는 부석을 통해 권종이부(權宗異部)의 무리를 물리친 후 석룡으로 변했답니다.

그 석룡은 무량수전 내 아미타불 밑에는 용머리가 뭍히고,

앞 마당 석등 아래에는 꼬리로 이어졌다나.

 

신라 하대 사상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의상과 원효 이해 없이는 어불성설.

둘은 백제 망하고,고구려가 망하고,이어 대당전쟁 시기를 살아간 산 역사적 증인들.

먼저 해동(海東) 화엄종을 처음 연 이는 의상대사(義湘,625-702).

의상은 진골의 왕족으로 20세에 불문에 들어갔어요.

26세에 육로로 당유학을 떠났으나(백제 멸망 직후) 국경서 고구려군의 검문을 받아 체포되어 실패.

10년 후 36세 되던 해에 10년 연배인 원효와 유학길에 오르죠.

당시는 백제는 멸망하고 아직 고구려는 건재했던 시기.

그래서 둘은 고구려를 피해 서해를 택했던 것.

당시에 당성,당황성으로 불린 지금의 화성군 송산면 지화리에서 당나라 사신들의 귀국선을 탑니다.

당시 산동반도를 비롯한 황해 연안은 신라인들이 거주하는 신라방이 있었고.

 

당시 상황들을 송고승전(宋高僧傳)은 이리 전합니다.

송고승전은 고구려 유민 후손으로 당나라에서 승려가 된 북송(北宋)의 찬영(919~1001)이 저술.

통일 신라말 이전 고승 관련 얘기는 거의가 송고승전에 근거할 정도로 절대적 사료.

삼국사기,삼국유사도 원효와 의상 관련은 송고승전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삼국시대 고승을 이해함에 있어 송고승전은 주 택스트요,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보조 텍스트.

송고승전은 의상 죽고 200년이 지난 저술했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무려 5백년이라는 갭이 있네요.

그래서 김부식과 일연이 의상과 원효를 얘기한 것은

지금 우리가 고려말 공민왕과 신돈을 얘기하는 거나 같다는.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고승 관련 얘기란 게 얼마나 전승에 의존했을지도 짐작이 가죠.

 

(자,이같은 현실적 갭을 고려하면서....)

둘은 비오는 늦은 밤 당항성 인근에 도착합니다.

주변 인가를 찾을 수 없었고 할수 없이 둘은 산구릉 토굴에 들어가요.

피곤에 지쳐 이내 깊은 잠에 떨어졌겠죠

원효는 비몽사몽 목이 말라 손에 잡힌 바가지로 물을 마십니다.

이때를 12세기 혜홍이 쓴 임간록(林間錄)에는,

"원효는 목이말라 손으로 떠마셨고 아침에 깨어보니 물속에 해골이 잠겨있었다"고 했네요.

10세기 송고승전에는,

"다음날 하루를 더 무덤 속에서 잤는데 원효는 귀신의 환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했고.

이틀을 토굴서 보낸 원효는 느낀 바가 커 탄식하며 말했어요.

/心生卽種種法生 心滅 ○故墳不二/

"마음이 생기니 온갖 법이 생기고,마음이 사라지니 토굴과 무덤이 다르지 않구나"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

"마음에서 온갖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마음이 사라지면 이들도 없다"

하룻밤을 더 무덤서 묵자 밤에 귀신이 나타나 놀랐는 데,

전날은 같은 토굴에 잤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더냐 며

모든 게 마음에 달려있다고 원효는 깨달은 것.

 

그런데 원효는 정말 무덤 토굴에 들어갔을까?

광개토대왕 남진정책으로 당항성은 오랫 동안 고구려 영토였어요.

그래서 일대는 전형적인 고구려 무덤인 횡혈식 석실(橫穴式石室)고분이 많았다는.

횡혈식석실고분이란?

무덤에 들어가는 입구(현도)가 있고 안에 무덤방이 있으며 무덤 바깥은 봉분을 쌓는 구조를 말합니다.

보통 부부 합장묘이기 때문에 나중을 대비,입구는 큰 돌로 임시로 막아두곤하죠.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 무덤이 서서히 무너져 어떤 것은 자연토굴처럼 보이기도.

유사시 사람이나 동물이 충분히 들어갈 수도 있는.

무덤 내엔 봉분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흐를 수있는 간이 배수시설도 있었고.

원효는 그런 무덤 토굴에 들어갔고 그런 물을 마신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정작 원효가 해골 바가지로 물을 마셨던,손으로 해골이 잠겨져 있던 물을 마셨던,

그냥 일반 토굴이든,무덤이든 간에 중요한 건

해골물을 통한 '오도설화'의 핵심은 원효의 깨달음에 있다는 것.


부석사 선묘각

 

이리하여 원효는 유학을 포기 유턴하고 의상은 직진합니다.

산동반도 북단 등주에 도착한 의상은 첫날 민가에 묵었어요.

주인집엔 처녀 선묘가 있었고 그녀는 한 중년 구도승에 반했나 봅니다.

그녀는 의상이 산동반도에 있을 때도,

장안 인근 종남산에서 중국 화엄의 제2조인 지엄을 사사할 때도 뒷바라지했을 터.

이렇게 10년이 흘렀고,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듣고 의상은 부랴부랴 귀국합니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는 안동도호부,백제 지역은 웅진도독부를 두고 직접통치하고 있었죠.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묘는 법의(法衣)등 귀국 선물을 바리바리 싸 선창가로 달려갔어요.

물론 사실혼 관계니 같이 귀국하고 싶었겠죠.그러나 의상의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고.

낙담에 빠졌으나 그것도 잠시, 결국 선묘는 정신 승리에 들어갑니다.

"나는 내세를 기다리지 않겠다.지금 현재의 몸으로 법사의 대원을 돕는 몸이 되겠다"며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용이 된 선묘는 뱃길 아래서 폭풍우를 잠재웠고 의상은 무시히 귀국할 수있었습니다.

 

의상은 귀국 길에 서산에 부석사를,첫해 671년 양양에 낙산사 세웁니다.

그리고 6년 후인 677년 정권의 지원 속에 소백산 일대를 두루살핀 후

태백산 끝줄기 봉황산에 절을 세우기로 하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그 터에 마귀,도적때들이 들끓고 있었던 것.

이를 안 선묘는 큰 너럭바위로 변해 하늘 위에서 위협하니(浮石) 도적들은 혼비백산.

이리 의상은 절을 세우고 사찰 이름을 부석(浮石)으로 변한 선묘를 기리는 뜻으로 부석사라.

그리고 선묘는 지하 석룡으로 변해 무량수전 아미타불 아래서 부석사를 영원히 지키게 되었고.

물론 여기서 도적들은 토종 샤머니즘의 숭배자, 타 종파 정도로 유추하면 되겠네요.

당시만 해도 불교가 전국토에 뿌리박히진 못했다는.

신구종교 간의 대결에서 불교의 승리,혹은 타 종파에 대한 화엄종파의 승리를 의미한 것.

 

일본 국보인 '화엄연기 의상도'의 말미 화기(畵記)에는 '선묘와 의상의 사랑'을 이리 정리합니다.

"재가(在家)의 애심(愛心)은 용맹한 신심(信心)을 일으켰다. 공경에 의하여 사랑을 이루었다."

이렇게 의상은 선묘의 영혼 위에 부석사를 세웠던 것.

그런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요?

의상은 지극히 정치적이고,현실적인 기반 위의 승려였죠.

10년간 선묘는 현지처였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선묘는 낙담하여 투신했을 수도 있었겠고,의상은 양심의 가책이 컸을 것이고...

그래서 부석사라 이름을 짓고,선묘각도 세우고,나아가 선묘설화로 예쁘게 상황을 각색했을겁니다.


'화엄종 조사회전'

용이된 선묘가 의상의 배를 지키며 황해를 건너는 장면.

 

여기서 놓칠수 없는 게 하나 있어요.

일본국보 80미터 두루마리 그림 '화엄연기'입니다.

여기엔 원효,의상 일대기가 신처럼 그려지고 있죠.

의상대사와 선묘에 대한 사랑 이야기는

1) 고려의 일연이 1282년에 쓴 삼국유사의 '의상전교(義湘傳敎)'

2) 송나라 찬녕이 982~988년에 걸쳐 편찬한 '송고승전'의 '당신라국(唐新羅國)의상전'에 전하죠.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여요.

3) 일본 명혜(明慧)가 1228년에 쓴 '화엄종조사회전', 일명 '화엄연기',,,,,,,에는 더욱 선명합니다.

교토 고산사엔 일본 두루마리 그림의 3대 걸작 중 하나인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이 있어요.

줄여서 '화엄연기'(華嚴緣起)라.

12세기 명혜(明慧 1173-1232) 스님이 제작한 것으로

길이가 장장 80 미터로 원효와 의상의 일대기를 그렸습니다.

의상과 원효의 전기는 그림 설명(詞書)과 더불어 에피소드 형식.

특히 선묘가 바다에 투신,용으로 변해 귀국하는 의상을 수호하는 장면은 총 4권의 '의상도' 중에서 클라이맥스.

그는 고산사에다 선묘사를 세우고 선묘상도 봉안했네요.

당시 일본은 막부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다수가 희생되게 되는데,

선묘사는 남편을 잃은 많은 여인들의 위안처였다는.

선묘 설화는 당시 일본 여인들에게 난세를 견디는 버팀목이 되었겠죠.

'화엄종 조사회전' 중 '의상대사와 신라선'

의상이 당에서 귀국하고있는 모습.


이런 명혜스님이기에 전설적일 수 밖에.

반 고흐만이 귀를 잘랐던 것이 아니네요.

명혜는 여신도들 관심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며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버렸다는.

그리고 다음날 고통에도 화엄경을 큰 소리로 독송했답니다.

또한 19세부터 60세까지 자신의 꿈을 한번도 거르지 않고 기록했는데 책의 이름은 '몽기'(夢記).

 

그런데 두 고승의 연애 방식도 극으로 구별된다는.

세상은 비교되었을 때 선명해지죠.

원효는 지방 육두품 출신으로 원효의 여인은 과부에 공주였고 결국 설총을 낳았습니다.

원효는 어느날 길거리에서 선문답 같은 노래를 부르고 다녔어요.

"누가 나에게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려는가?나는 하늘을 바칠 기둥을 다듬을까 한다"

처녀가 아닌 자루 빠진 여자,즉 현재 이혼한 여자를 원한다는 것.

당시 서라벌 요석궁엔 백제와 전투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 요석공주가 있었죠.

요석은 삼국을 통일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누이.

당시 사람들은 이 노래 의미를 해석하지 못했어요.

오직 태종무열왕만이 '귀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얻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현인이 있다면 좋으 터~' 이리 생각했죠.

태종무열왕은 궁인들에게 원효를 찾아 요석궁에 들게합니다.

때마침 요석궁 앞 문천교(橋)를 지나던 원효는 위 사실을 알고는 각본 따라 물에 빠집니다.

(지금 경주 반월성 앞을 흐르는 하천이 문천.)

그리고 요석궁에 들어갔겠죠.

옷을 말리려다 보니 옷을 벗었을 것이고,둘은 필이 왔을 것이고,설총의 씨를 뿌렸을 것이고..

 

이리 원효는 적극적으로 사랑을 구했고 결국 찾았습니다.
이때 원효는 파계했다고 생각하고는 속복으로 갈아입고.

승복이란 형식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소성거사를 자처합니다.소성은 원효의 어릴적 이름.

이제 스님이 아닌 재가인 소성거사로 태어나 중생교화에 힘씁니다.

거리낌 없이 더욱 가깝게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간 것.

저잣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거문고를 켜고 술마시고.

한마디로 행동은 그 어떠한 꺼리낌도 없는 무애행(無碍行).

다음은 고려시대 문사 이규보의 소성거사 찬(讚).

"머리를 깍으면 원효대사요,머리를 두고 건(巾)을 쓰면 소성거사로다.

온갓 몸으로 변신해도 알아보기 쉬우니 비록 두 모습을 가졌으나 한바탕 연극인 것을.."

 

원효는 왜 그랬을까?

의상보다 10살 많은 원효.원효가 살았던 시대는 한반도 역사에서 최고 격랑의 시대.

1년 6개월에 한번꼴로 전쟁을 치루던.

백제와 고구려가 망했고 당나라와는 전후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시기.

전쟁의 고통은 고스라니 백성의 몫으로 백성에 종교적 위무는 쉽고 편해야겠죠.

원효는 그런 시대상을 종교적으로 깨친 것.

원효는 '나무아비타불을 열번씩 대뇌이면 극락에 간다'며 쉽게 접근했죠.

태반이 문맹의 민중들이기에 일상서 부처를 접하게 한 것.

그러나 원효는 교단으로 부터 왕따 당합니다.

한번은 왕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백고좌 법회 초청을 받았으나 문앞에서 제지당하는 수모를 당했어요.

그리고 세월은 흘렀고,경전 금강삼매경이 당나라서 서라벌에 전해졌죠.

그러나 누구도 정확한 해석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원효만이 3일만에 주석을 달았죠.바로 금강삼매경론!

'論'은 보살이나 쓰는 경지의 저술을 일컬습니다.

임금의 청으로 금강삼매경론 짓고나서

원효는 고승 1백명이 참석하는 백고좌(百高座) 법회에 초청 강사로 참석합니다.

모는 게 원효로 귀결되는 순간이 온 것.그리고 이리 일갈합니다.

/그 때는 비록 100개의 서까래 속에도 끼이지 못했지만,1개의 대들보가 필요할 때는 나말고는 없더라!/

 

원효는 한마디로 코스코폴리탄!

당시 당나라에는 손오공 삼장법사의 주인공인 현장스님을 통해 인도서 새로운 경전이 들어왔어요.

현장 이후는 새로운 경전에 대한 해석을 두고 종파간 혼란기.

이때 화쟁(和諍)사상으로 답을 제시한 이가 해동의 원효.

/논쟁은 상황에 따라 설정된 방편에 불과하니,서로 다른 종파간 이견도 부처님의 마음으로 융화가 가능하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해동소(海東疏) 라고도 불리는데

대승불교에 관한 해설서로 세계서 손꼽히는 책.

원효 사상의 핵심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범어로 번역 인도에도 소개되었죠.

원효의 저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당대 최고 승려 삼장도 50여권 저술을 남겼으나 그는 100여종 240권.

당나라의 석학들은 그의 저술을 '해동소'라고 칭송했죠.결국 원효는 당시 동아시아 최고 석학이였다는.

 

그래서 일본의 원효 사랑은 유별납니다.

교토 고산사에 있는 국보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도 그 하나.

화엄종조사회전을 그린 명혜(明惠)는

나라시대에 동대사(東大寺)를 중심으로 번창했던 화엄종을 계승하여,

다시 한번 고산사를 근거지로 화엄종을 부흥시켰던 인물.

그는 원효와 의상을 화엄종의 조사로서 숭앙하였죠.

화엄연기는 총 6권인데,각 권의 머리마다 이리 경구를 넣을 정도.

/화엄종 조사에 대한 그림이다.부정한 곳에 둬서도 잡스런 그림과 섞여서도 안된다/

동대사는 일본 화엄종의 총본산.

승려 심상은 신라에서 원효의 저작물을 대량으로 가져갔고 지금도 원효 학풍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사라지고 없는 판비량론(判比量論)은 거의 모든 종파가 교과서로 쓰고있고.

 

원효는 6두품에 지방 출신,반면 의상은 진골 출신으로 둘은 신분적으로 큰 차이가 나네요.

그러나 의상은 선창가의 여인이였을지도 모를 선묘와 원효는 왕족 과부 요석공주와 연애했고.


'화엄종 조사회전'

의상의 부석사에서 대설법 장면.


그럼 의상의 사랑법은???

당시 불교는 철저히 왕족,서라벌 중심으로 왕가 통치의 이데올로기.

서라벌은 부처가 상주하는 불국토라는 불국토설(設)에다,

심지여 왕족은 석가의 혈족으로 여기는 진종설(眞宗說)도 있었죠.

승려는 왕족이나 진골의 전유물이였으며 교단은 당 유학파들이 장악.

이들은 서라벌에 사찰을 집중하고 궁성서 내린 많은 토지를 소유했으며 왕궁을 기웃거렸다는.

원효와 의상 이전 서라벌을 대표하는 최고 승려는 자장.

자장(慈裝)은 636년에 당 유학을 떠나 7년만에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하죠.

의상보다 25년 전 유학길.당시만 해도 신라불교는 기강이 서있지 않았어요.

조정에서 대국통이라는 최고 직위를 준 것도 그로 하여금 전국의 승니(僧尼)들을 관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를 자장율사(慈裝律師)라 부릅니다.

그는 귀국 후 교단을 장악하고 모든 불사를 관장했죠.

오대산 상원사,태백산 정암사등 문수신앙 발원처도 이같은 배경 하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물론 해동화엄의 초조는 의상이지만 신라에 화엄사상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은 자장.

 

한세대 후인 의상도 자장과 비슷한 정치적인 환경에 있었어요.

의상은 절대 권력 김춘추 세력권 내에 있었고.

의상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 1년 당나라 사신들이 돌아가는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넜어요.

당 사신의 배를 탈수있는 자라면 당연 서라벌 권력의 인너 써클.

그가 양주에 도착한 후에도 주장(州將)의 환대를 받아 아문(衙門)에서 생활을.

이렇게 9년이 지났고 의상은 당나라의 신라 침공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맡게 되죠.

귀국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김인문(金仁問,629∼694)이 직접 귀국을 종용한 것.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의 차남이요 문무왕(文武王)의 친동생으로 23세에 당나라에서 벼슬도 했네요.

아버지 무열왕을 도와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죠.

당시 당은,고구려는 안동도호부를 백제 지역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직접 통치하고 있었죠.

나아가 신라 까지 병합하려한 것.

침략 소식에 신라는 불법을 통해 물리치기 위해 서라벌에 '사천왕사'를 세우는데 의상도 관여합니다.

송고승전 의상전에서,

'선묘는 정석(淨石)이 되어 권종이부(權宗異部)의 무리 500여 명을 쫓아냈다'고 했죠.

500여명 무리를 쫓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왕권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

송고승전에는 문무왕이 의상을 대단히 존중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어요.

/국왕이 흠중(欽重)하여 전장(田莊)과 노복을 내렸다.의상스님이 왕에게 말하기를,

'아법(我法)은 평등하여 고하(高下)가 모두 균등하고 귀천이 같은 도리에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의상이 평등주의자가 되었네요.

그러나 찬영이 송고승전을 편찬한 의도는 당연 불교의 포교.

원효,의상 얘기도 더 아름답게 꾸몄을 터.

 

그러나 의상과 달리 우리가 아는 원효는 해골을 통한 득도나 요석공주와의 로멘스 정도.

원효가 산 7세기 불교는 동아시아의 정신 세계로

수많은 해동과 발해,일본,서역의 유학생들이 장안을 활보하던 시대.

당나라는 세계 선진 강국으로 서역의 산물이 장안에 넘쳐났죠.

최치원이 그랬듯 당나라에서 관료로 발탁될 기회까지 열려 있었고.

외국인을 위한 과거제도도 있었는 데 장원은 신라 유학생과 발해 유학생이 휩쓸었습니다.

그러나 원효는 국내파로 해외파 연대가 그를 조직적으로 왕따시켰을 것임에는 불을 보듯 훤하네요.

 

671년 의상이 귀국 후 첫 작품은 낙산사.

양양 낙산사 설화에서 의상은 관음보살을 알아보는 현인으로,

원효는 알아보지 못하는 범속한 인물로 나와요.

얼마나 해외파의 국내파 깔보기가 심했는지 알수있죠.

그 적나라한 실례를 볼까요?

원효가 계속 길을 가는데,
맑은 시냇가 다리 밑에서 소복한 여자 한사람이 여자 생리빨래를 하고 있었답니다.
대사가 목이 말라 그 여자에게 물 한모금을 청했죠.
그러나 여인은 빨래가 잠겨 있는 윗물을 떠주는 것이 아니고 아랫물을 떠 주었고.

화가난 대사는 물그릇을 엎질러버리고,손수 내려가 윗물을 떠먹었어요.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깊 옆 소나무 위에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으며,
"휴재호화상!" 크게 한마디 울고는 어디론지 사라졌어요.
새소리를 들은 대사는 이상하게 여기고 보니 새가 울던 나무 밑에 여자 고무신 한짝이 있었고.
원효는 낙산사에 이르러 관음보살에게 예불하려고 법당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관음보살의 불상 밑에 여자의 신이 한짝 있었다는.
아 뿔사! 아까 파랑새가 울던 소나무 아래의 신 한짝과 똑같은 것.
이때야 원효는 깨치죠.

빨래하던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자신을 시험한 것이라는 것.

의상은 관음보살을 알아보았고,원효는 몰랐고.

원효는 경산 출신으로 일연스님과 동향.

그래선지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편애하긴 했네요.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극락정토에 상주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고.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전각을 극락전(極樂殿)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라 해요.

'무량수'는 아미타여래의 또다른 말로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닌다'는 뜻.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전각으론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봉정사 극락전(국보),부석사 무량수전(국보)이 대표적.



황금빛 아미타여래 좌상 보이시죠?

국립중앙박물관 흑백사진을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흙으로 구운 후 금칠한 소조상(塑造像,국보).

2,8미터 고려 때 제작된 가장 크고 오래된 소조상.

좌상 뒤의 3,8미터 목조 광배도 볼만합니다.

그런데 사는 집 무량수전은 남향인데,

입주한 이아미타불은 서쪽에 좌정해 동향하고 있는 것이 특이해요.

아미타불의 시선은 바로 조사당 가는 길 3층 석탑을 향하고 있다는.

석굴암의 석가여래,서산 삼존마애불도 동향.



무량수전 내부를 올려다 보면 1200년 전의 타임머신을 타고 있음을 실감하죠

기둥,들보,창방,서까래들이 입체적으로 면을 분할하고 시야는 더 넓어진다는.

무량수전은 부처가 상주한 곳이기에 최대한 건축적 기교를 살렸겠죠.

무량수전 안은 옆으로 들어가야.

앞 문은 들어열개식으로 큰 제를 올릴 때는 이를 들어올려 안을 개방.

뒷쪽은 살창으로 되어있는데 살창이란 살을 통풍을 위해 세로로 짜넣은 창.

안에 들어가 고개를 들면 넓고 높음에 놀라요.

고풍 그대로 천장이 서까래,대들보,기둥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이기 때문.

 

경복궁 근정전처럼 궁궐,사찰 중요 전각 안은 바닥에 전돌을 깔았어요.

원래는 무량수전 바닥도 녹색 유리를 녹여 전돌에 입힌 '녹유전돌'을 놓았다는.

아미타경에서 극락세계는 유리로 되어있다죠.

3미터가 넘는 황금 불상에 푸르스름한 광채를 발하는 비취빛 바닥.

당시의 무량수전 안의 그 화려를 알만하네요.

당시 녹유전돌은 유물보호각에 일부가 남아 전시되어 있고.

그러다 조선시대 신도들이 옆드려 절을 하기 시작하면서 마루로 바뀐 것.

이전엔 범접 불가,신성의 장소!

 


층석탑은 9세기 작품으로 높이만 5미터.

3층 석탑서 보는 풍광은 소백연봉의 원근 못지않게 근경도 멋지죠.

탐미적인 사람이라면 무량수전 처마의 곡선미도 여기서 즐길 터.

부석사 조망처로 명당.

아래 당우 넘어로 펼쳐지는 소백연봉,그리고 무량수전와 안양루 건축미를 느낄수있는 곳.

그리고 삼층석탑 지나 조사당으로 향하는 길목.



조선조 많은 명사들이 왜 저 안앙루 누각에 올랐는지 금방 알수있네요.


아~~~~

가운데 볼록한 곳이 정상 비로봉.

좌측 끝 경사면 끝이 조선시대 기간 도로 죽령.

 

맛뵈기로,

아래는 비로봉 & 비로봉에서 죽령 뷰.


정상 비로봉 일대(7월 소백산)



비로봉서 바라본 죽령쪽(서쪽)

앞으로 연화봉이 보이고.

 



안양루


조선 후기 작품

건축학적으로나,기능적으로나,마학적으로나 완벽.

무량수전이 더욱 돋보이는 건 안양루 때문.


안양루는 부석사를 찾는 범부 부터 시인,묵객,문사,경세가

그리고 구도승에 이르기 까지 가장 사랑받는 공간.


조선 사대부들의 문화는 바로 정자와 누대 문화.

조선 주자파(朱子派)들은 불가의 안양루에 올라 자신의 입장대로 소회를 풀었죠.

그 소회를 상형화 해 누대에 걸었고.



말년엔 안양루 오른 김삿갓(1807~1863)도 저 화엄대해에 빠졌네요

  부석사/김병연(김삿갓)

平生未暇踏名區 /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난 곳 못왔더니.

白首今登安養樓/ 하얀 머리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江山似畵東南列/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天地如萍日夜浮 / 천지는 부평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風塵萬事忽忽馬 /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宇宙一身泛泛鳧 / 우주간에 내 한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百年幾得看勝景 / 백년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歲月無情老丈夫/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있네



부석사를 찾는 이 중 '열이면 열' 의아해하는 게 있죠.

아니,이런 첩첩산중 오지에 대찰을 세운 이유가 뭐란 말인가?

지금부터 그 이유을 얘기해 보렵니다.

 

서라벌 권력은 삼국 전쟁서 승리한 후

확장된 국토의 경영 전략에 따라 화엄종찰 부석사를 양백지간에 세웁니다.

양백지간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로 예전 고구려와 접경지대.

소백산은 형제봉,국망봉,비로봉,연화봉,도솔봉으로 이어지는 연봉으로 25 키로에 달합니다.

너머 북쪽은 백제,고구려로 수백년 동안 국경 역할을 했죠

당연 소백 연봉 일대는 신라,백제,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

신라에겐 넘어야 한강유역 진출이 가능했고,고구려에게 소백은 서라벌 진격 위한 인후지지.

과거 광개토대왕,장수왕의 철갑기병들은 수차례 소백 연봉을 넘어와 서라벌을 짓눌렀습니다.

이곳 영주 땅도 한땐 고구려 말굽 아래 있었죠.

 

그 실증은 유적에서 나타나요.

소수서원이 있는 순흥면 읍내에서 보면 북쪽으로 소백산 지능선인 비봉산(飛鳳山)이 있어요.

비봉산은 당연 순흥의 주산.현재 순흥 면사무소 뒷뜰에 누각이 한채 있어요.

1930년 흥주(순흥)도호부 정문 봉서루를 인근서 이곳으로 옮겨왔죠.

정면의 흥주도호부(興州都護府) 현판은 공민왕 글씨라 전합니다.

역사서를 보면 도호부란 얘기가 자주 나오죠?

도호부란 도성을 지키는 지역이란 뜻으로 여기서 순흥의 중요성을 유추할수 있죠.

그 공민왕 현판 옆에는 '봉서루'(鳳棲樓),뒷편에는 '영봉루'(迎鳳樓)라는 현판이 걸려있어요.

봉황이 살고 봉황을 맞는다는 뜻.

흥주의 주산인 비봉산에 봉황이 살고있는 데 이곳을 떠나면 액운이 생긴다는 염려에서죠.

순흥 사람들이 비봉산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수있다는.

순흥 비봉산 구릉에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순흥은 한때 고구려 영토.

 

그 비봉산 5백미터 산등성이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구려 고분이 있어요.

금관은 신라에만 있듯,고분 벽화는 고구려의 대표적 문화적 특색.

집안,평양 일대에만 100여개나 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순흥 고분의 널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서역인 모습의 역사가 입구 좌우로 그려져있습니다.

한손으로 뱀 목을,또다른 손으로 뱀꼬리를 틀어쥐고있죠.

동쪽 벽에는 봉황처럼 생긴 고구려를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도 있고.

순흥 고분 인근 '어숙묘'에도 벽화가 있는 고구려 고분이 있어요.

신라 땅에 고분벽화가 있는 것은 위 두기뿐.

비봉산 일대만 수십기 고분이 모여있는 데 대부분 일제 때 도굴.

삼국사기에서도 순흥지역이 고구려의 급벌산군이다 했죠.

영주,봉화,예안이 고구려 통치 하에 있었다는 기록적 증거!

 

힘을 비축한 서라벌은 결국 진흥왕 시대에 백제 성왕과 손잡고 소백산을 넘어 고구려군을 밀어냅니다.

중앙고속도로 죽령 북쪽 하행선 휴게소에는 신라 적성비와 적성산성이 있죠.

이곳은 신라 입장서 보자면 죽령을 넘어 앞은 남한강,좌우로 죽령천과 단양천이 흐르는 천혜의 자리.

158년 죽령을 개척한 이래,진흥왕은 545년경 죽령을 넘어 남한강까지 국토를 확장한 것.

그리고 기념비를 세웠는 데 바로 '단양 적성비'로 신라의 영토개척 기념비인 게죠.

적성은 단양의 고구려 옛 이름.

비(碑)에는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이름이 나와요.

김무력 이후 120년이 흘러 처남 매부간인 김춘추 태종무열왕과 김유신 대에 이르러 삼국을 통일.


온달산성


부석사에서 보자면 소백산 바로 너머로 남한강변에 위치.

남한강과 소백산을 얻기위한 고구려,신라 각축전의 현장.

단양~영춘~영월로 이어지는 남한강엔 삼국시대에 구축된 산성이 많다는.

단양의 적성산성,영춘의 온달산성,영월의 태화산성과 대야산성.

모두 남한강 수로 장악을 위한 전략산성. 

부석사가 위치한 풍기,순흥,영주 일대 즉 소백산 남쪽이

서라벌 정권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는 또 있습니다.

부석사에서 정북향으로 소백산을 넘으면 충북 영춘이 나오죠.

지금은 단양군 영춘면이지만 예전에는 영춘현으로 단양보다 격이 높았습니다.

영춘의 남한강 가에 온달산성이 있죠.

(나는 부석사를 떠나 곧 온달산성으로 갈 예정)

온달은 여기서 신라군과 싸우다 죽었는 전설이.

소백산 넘어 남한강 가는 신라와 고구려의 치열한 격전지였던 거죠.


김부식은 당시 삼국 상황을 삼국사기에서 이리 단언했네요.

/들판에는 인마의 피가 내를 이루어 창과 방패가 그 피에 떠내려 갔다/

김훈은 자전거 여행에서 이리~~

/삼국사기에서 7세기에 관한 서술은 '수급 5백을 베었다' '수급 1천을 베었다'는

문장의 연속이였고 베고 베이는 시대였다/

이렇게 의상이 소백산 일대를 부처의 땅으로 가꾸려 한 데에는 서라벌 권력의 필요 때문.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고 백성은 피폐하고,

피눈물 백성에 대한 종교적 위무와 이들의 새로운 사회질서로 편입이 필요했던 것.

670년 귀국 후 소백연봉 일대에 터를 고르던 의상은 바로 이곳을 부처의 땅으로 삼기로 합니다.

송고승전에서는 이리 말했죠.

/고구려의 바람과 백제의 먼지가 미치지 못하며 소나 말도 범접할수 없는 곳이다/

이런 소백산이기에 서라벌 권력은 국가 경영 차원에서 일대를 총괄하는 국가사찰이 필요했던 것.

그리고 총연출자는 의상.

의상은(혹은 의상의 제자들은) 671년 부석사를 세운 후 소백연봉의 사이 사이에도 많은 사찰을 세워요.

성혈사,흑석사,국망봉 밑의 초암사,비로봉 밑의 비로사 등등.

이는 지금 휴전선 사이 사이에 많은 군사단이 들어선 거나 매한가지.

 

태백산~구룡산을 이어받은 소백산은 월악산,주흘산,희양산으로 이어집니다.(백두대간)

사이사이에 많은 사찰을 짓습니다.

소백 서쪽으로 예천의 청룡사와 한천사도 부석사의 비보사찰로 지어졌죠.

명품 '부석사' 들어서고 이미테이션들도 줄을 잇습니다.

남쪽 멀리 안동엔 봉정사가 대표적.

부석사 뒷편의 봉화의 축서사,중대사도 의상이 터를 닦았죠.

부석사는 영주시의 동쪽 끝으로 봉화군과 접경을 이루는데,축서사의 로케이션이 부석사와 판박이.

축서사 앞 마당에 서도 소백연봉이 낳은 지능선들이 물결치듯 넘실댐니다.  

의상이 부석사를 지으려고 서까래를 준비하는데 갑자기 사라졌답니다.

찾고 보니 소백산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에 가 있었고.

의상은 부처의 뜻으로 여기고 부석사 보다 먼저 이곳에 절을 세웠다네요.

초암사의 유래입니다.

설화,전설도 그 이면을 잘 읽으면 역사 보입니다.

의상은 초암사를 부석사보다 먼저 지었을 겁니다.

소백연봉에서 떨어지 봉황산 부석사가 아닌 소백산이 직접 품은 소백산 부석사를요.

그러나 의상은 봉황산에 부석사를 지으면서 생각이 바뀌였을 터.

결국 부석사는 화엄종찰이 되었고 부석사가 적자임을 선포하는 '서까래 설화'를 만들었을 겁니다.

 

이것만이 아녀요.

'서까래 설화'를 넘어 '종이 봉황 설화'도 생겼습니다.

의상은 부석사를 세운 후 봉황산 등성에 앉아 종이로 봉황을 접어 날렸답니다.

종이 봉황은 40여리를 남쪽으로 날아 앉은 곳이 바로 안동 천등산 자락.

'봉황이 머문 자리' 이기에 봉정사(鳳停寺)라 이름 지었고.

또 있으니,삼국유사에는 이리.

/오진이 하가산 골암사에 살면서 매일 팔을 펼쳐 부석사 석등에 불을 켰다/

하가산은 지금의 안동 학가산으로 학가산은 부석사에서 남서쪽 30리 거리.

모든 게 화엄 종찰 부석사의 위세가 읽혀지는 전설.

부석사가 있는 영주시는 동 봉화,서 예천,남 안동시 사이에 위치합니다.

소위 경북 북부 지역으로 이들은 이렇게 역사적,지리적,문화적,종교적인 유사성이 매우 크네요.



앞마당에 서서 무량수전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낫익은 장면들이 보여요.

배흘림기둥에 기대어서는 모습들.

네, 나도 아닌척 배흘림기둥에 기대봅니다.

그리고 시선은 소백연봉이 만들어낸 무한강산을 향하고...

1400여년 동안 많은 시인,묵객들은 아래 무한강산을 그리려 무던히도 애썼네요.

그리고 고전이 되어버린 두 문사의 글.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1916 ~1984 )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30년을 길에서 살고 길 위에서 생을 완성한 김삿갓(1807~1863).

그리고 이렇게~~~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난 곳 못봤더니
백수(흰머리)된 후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같아 밤낮으로 떠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타고 달려온듯
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백년동안 이런 경치 몇번이나 구경할까
세상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있네/



부석사가 멋진 데에는 멀리 소백연봉을 앞마당으로 거느리는 부석사의 로케이션 때문.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보거나,

안양루 누각에 걸터 앉아서 보거나,

안양루와 무량수전 까지 동시에 들어오는 3층석탑 둔덕에서 보거나....

그러나 내겐 최고가 따로 있으니~~

절 마당 우측 끝 저 바위돌 보이시죠?



저 반석 위!


반석에 서면 소백산에 스며든 부석사까지 느낄수 있어요.

좌 눈초리로 안양루 누대가 들어오고,

고개를 숙이면 당우들이 낮게 깔리며 소백 원경의 베이스가 되어주죠.

그리고 눈높이에선 대자연 속 시간의 흐름이 펼쳐집니다.

소백의 연봉(連峰)이 낳은 대자연의 망망대해 무한강산.

시간의 흐름처럼 남으로 더욱 멀어지는 연봉들...

해질녁 연봉 넘어 사라지는 붉은 강토는 장엄한 화엄 세계가 됩니다.

댕~댕~~댕~~~~

종각에서 시작된 범종의 파동들...적막강산으로 퍼져가는 부처의 소리.

하산합니다.

 

(계속)

이어서 소백연봉과 함께한 삶,그리고 시간의 역사들~~.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쓰니
    '21.8.5 8:38 AM

    꼭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 wrtour
    '21.8.12 1:05 AM

    봄여름가을겨울 한번씩은 가보면 좋겠다 생각을 해봤어요.전 아직 눈쌓인 부석사는 못봐서요.
    감사합니다 ^^

  • 2. 씨페루스
    '21.9.5 2:35 PM

    불교계의 유명인사 의상과 원효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셔서 잘 봤습니다.
    신처럼 그려진다는 일본 화엄연기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네요.

  • wrtour
    '21.9.8 12:57 AM

    헐~~~~~
    다 읽으셨다구요?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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