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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교룡산성&선국사 (feat 최제우,김개남)

| 조회수 : 1,111 | 추천수 : 2
작성일 : 2018-11-18 02:18:18



남원성 북문쪽


만복사지를 떠난지 5분도 안되었는데 우측으로 남원성이 보이네요

마치 토막난 무우처럼,,,그게 남원성 전부.

남아 있는 거라곤 50여미터 정도.

예전 북문이 있던 자리.



남원성은 기존 읍성을 임진왜란 직전 총 3키로 석성으로 증축했어요.

평양성과 더불어 국내 유이의 네모로 된 석성.

읍성같은 남원성이지만  남원성 만큼 정유재란 등 역사적 전투를 치룬 성도 드물어요

때는 정유재란.

왜군 5만 8천은 임진왜란 패배를 살려 전라도 곡창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두 길로 들어옵니다.

1진은 남해 사천으로 상륙 후 하동~구례를 거치고,

2진은 함양~운봉~여원치를 넘어서 들어옵니다.

조선,명군 연합군은 4천 여명,여기에 주민 6천여명을 더하니 1만이 남원성에서 방어.

그러나 4일간의 공방 끝에 왜군에 넘어가고,,,거의가 전사.

광한루,만복사 등등도 타버리고.

이때 죽은 민군 합동 묘역이 만인의 총(萬人義塚).

그리고 1930년대 일제는 전라선 철로 개설을 구실로 남원성을 뜯어냅니다.



다음은 춘향전 한토막


/이도령이 하루는 춘흥을 못 이겨 방자를 불러 물으시되, “너희 고을 좋은 승지 강산 어데가 제일이냐?” 방자 여쭈우되,

“ 북문 밖에 나가오면 교룡산성 좋사옵고 서문 밖 나가오면 관왕묘도 경치 좋고 남문 밖 나가오면 광한루 좋사온데,

오작교·영주각은 삼남 제일 승지로소이다.” /


관왕묘 얘기가 나오는군요.

남원 관왕묘는 한양 동묘(관우 사당) 보다 먼저 세워집니다,,,조선에서 최초!

3천여명의 명군이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고 다수가 사망한 것과 관련이 크겠죠.

당시 명군 사령관 이여송(1549년 ~ 1598년)은 관우 매니아.

그는 선조에 각지에 관우 사당을 지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여송은 선조가 조선인.



헐리기 전 남원읍성 옛사진




萬人義塚
당시 남원성 전투 사망자 합동 묘
남원성 북문쪽에 위치.
왼쪽산이 교룡산으로 산성 띠가 희미하게 보이네요.
산허리,능선을 따라 빙둘러 성을 쌓았습니다.총길이 2.5키로.
남원성은 평시에 교룡산성은 전시에 활용.

5분거리 교룡산성으로 향합니다.

 






교룡산성 입구 동학농민군 유적지


교룡산성은 남원시로 부터 지척



교룡산성 정문인 남문



교룡산 ( 蛟龍山 518m)은 남원의 진산.

교룡산이 알려진 것도 바로 교룡산성 때문.

교룡산성 ( 蛟龍山城 ) 은 백제시대 쌓은 것으로 임란 직전 승병장 처영이 크게 개축했습니다.

남원 지역 20 여개의 산성 중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죠.




정문인 남문

홍예(무지개 문)도 서산대사 제자인 처영이 쌓았고.





비석군이 보이고.

작지만 보는이로 하여금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합니다.



예전엔 홍예 위쪽엔 누각이 있었다네요.

 성을 지키는 책임은 남원부사(南原府使)와 별장(別將).

비석들은 당시 산성을 지키던 무관 별장(別將)들의 기적비입니다.


미라클 기적이 아닌 '공적을 기린다'는 뜻의 紀蹟碑.



비석군 맞은편 작은 비석에는 '김개남 동학농민군주둔지'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고.




이제 5분 거리 선국사로



때늦은 물봉선



쌓인 낙엽을 밟으며



귀룽나무도 물이 들었고.



붉나무

가을을 가장 먼저 알리죠.

붉게 단풍들어 붉나무.


칡넝쿨도 황갈색으로



어!!

아래는 단풍나무,은행나무 단 두그루가 만들어낸 가을 초상



윤도현

가을 우체국 앞에서

https://youtu.be/dIY6y5f98qk



남원의 가을은 이곳으로 다 모였다는.








작은 바람에도 후두둑 후두둑  순식간에 떨어지고 말데요



순식간에 벌어진 꽃사태!

옷을 다벗고 나목이 된 은행나무.




10여분 서성이다...발길을.



선국사 대웅전

원래는  용천사(龍泉寺)였으나 승병이 거주하면서 선국사 (善國寺)로.

國 자가 들어가는 것에서 벌써 호국사찰 내음.

 

 


대웅전 앞 불두화에도 가을이



보제루(普濟樓)


승병 지휘소 역할을 하기도.

지금은 해체 복원중이라 옛 사진으로.


보제루에 서면 멀리 지리산 서북능선,그리고  남원시가 들어옵니다.

사찰에는 '크게 구제한다'는 뜻의 보제루가 많이 있지만

선국사 보제루 만큼 '실천의 보제루'는 드물다는.


전봉준,손화중과 더불어 동학군의 3대 지도자 김개남!

그는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성,교룡산성에 입성 후 새 세상을 꿈꾸던 곳.

30년 전에는 수운 최제우 (1824〜1864) 가 은적암에서

적 서차별,남여차별,반상차별 혁파를 주장하며 동경대전을 집필할 때 올랐던 곳.

(수운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다짐으로 본명을 濟愚로 바꿨음)

그는 경주서 수배받자 이곳으로 들어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완성.

이 정도면 교룡산성이야 말로 동학의 성지!!!!










정면 세칸 초미니 대웅전이지만

한껏 처마의 날개짓으로 자태를 뽐내네요.




보제루에서 바라본 남원시



어,대웅전 처마 공포를 장식한 용이 칼을 물었네요.




잇몸에 치아가 정말 리얼하고.



가까이 보니 칼이 아니고 생선.



날개를 활짝 편 화려한 팔작지붕 답게 공포가 그렇게 화려할수가 없어요.

공포들이 짧은 공간에서 조밀하지만 조각이 너무 꾸밈없어 이도 괜찮아 보인다는.


*공포(栱包)는 기둥 위에 올린 것으로 지붕의 하중을 받아냄.



각각의 용들은 연꽃을 물고 있고




목수의 조각 보폭이 얼나마 크고 경쾌한지 절로 감탄이.

단번에 일필휘지,,,그런 느낌

저런 대목장 (大木匠)이라면  어떤 대작을 맞겨도 될겁니다.


사실 선국사는 교룡산성의 승병들이 거주하던 승찰로 크게 볼게 없어요.

건축학적으로는 대웅전 하고 소박한 보제루 제외하면 남아있는 건축물도 없고

있다해도 다 요사채로 쓰이는 현대 건축물.


그래도

그래도

디테일에는 있어요.

저 붉음 보이시나요?




석탑 너머 배롱나무,배롱나무 너머 저 붉음.



뭐지?

온 몸에 이끼까지 낀거 보니 연륜있는 고목.

처음에는 매화인줄.


보이시나요?

화살같은...

요즘 아파트 단지서 정원수로 인기있는 화살나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목은 처음 보네요.











가을 단풍 중 빨강으로 가장 강렬한 게 뭔지 아세요?

화살나무!!

핏빛 선홍색이 강렬하죠.

그러고 보니 이름도 정말 잘 지었다는.

살맞아 흘러내린 선홍색 핏빛을 다 받아낸 잎들.




선국사는 정말 작은 절이여요.

작은 대웅전,보제루 제외하면 요사채 정도.

그래도 강렬.

왜지? 했는데,,,답은 간단해요.

감동은 총체에만 있는게 아니라 디테일에 더 있다는.

그리고 언제 부턴지 총체 보다는 디테일에 감동을.


산성 정문인 홍예,

산사 가는 길 노란 은행잎들,

마음껏 날개짖하는 대웅전,

대목장의 스킬이 유감없이 발휘된 활달한 처마 공포들,

그리고 선홍의 화살나무.

(늦여름 연분홍 배롱나무)

...

그리고 수은 최재우와 김개남의 정신이 깃든 보제루

...

그리고

그 디테일은 찾는자의 몫



9월에 오면 배롱나무로 이래요.

그 뒤 화살나무는 보이지도 않아요.

다 자신의 때와 몫이 있는 법.

선국사는 8,9월도 디테일!



작지만 큰 절 선국사~~

내려오는 데 남문 그 자리 우측으로 산성길이 보이네요.

시간 문제로 고민하다 잠시만 오르기로 합니다.

산성 둘레길이 산책,등산로로 잘 정비되어 있어요

남원 시민에겐 등산같은 트레킹으로 안성맞춤.







10여분 오르니 남원시가 들어오네요.



멀리 지리산 서북능선이 희미하게 보이고.

왼쪽으로 동진하면 여원치~운봉~인월~함양.

광주~대구간 고속도로가 바로 앞으로 지나죠.


남원시는,

남쪽으로는 지리산 주능선과

북쪽으로는 덕유산에서 흘러온 풍악산 사이의 분지 같은 곳.

교룡산(518)은 바로 그 사이에서 남원시와 바로 인접해 솟아있고.



사진 우측이 서쪽.

서남 방향으로 남원평야가 곡성읍 까지 이어집니다.

섬진강 상류인 요천을 중심으로 들판이 백리에 걸쳐 펼쳐지죠.

소금배와 고깃배가 올라올 정도로 호남에서 가장 풍요로운 고을 가운데 하나.

그래서 통일신라 시대에는 남원경

고려시대는 남원부,

조선시대에는 남원 도호부(인근 구례,곡성,순창,임실,장수도 관활지)

지금으로 치면 광역시였다는.




남원을 꿰뚤어 본 세종 때 문장가 강희맹1424∼1483)의 시


/소나무와 계수나무 짙은 그늘 고을을 둘러싸고,

절(만복사)에서 들려오는 종과 풍경 소리 달빛 속에 가득하도다.

으름덩굴과 칡덩굴 덮인 오솔길은 인간에게 부귀를 묻지 않네/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자수정2
    '18.11.19 5:32 PM

    처음 듣는 제 고향의 이야기..
    공부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더불어 엄마도 보고싶고요. ㅋㅋ
    고풍스러운 풍경이 참 편안합니다.

  • wrtour
    '18.11.22 10:24 PM

    오호 남원댁이시군요
    통일신라 이래 쭈욱 남원일 정도로 유서깊은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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